시정 인문학광장#40 어느 겨울밤
시정 인문학광장#40 어느 겨울밤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9.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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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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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벌써 저녁 9시가 넘었다. 내 방에서 이곳저곳 회원 가입된 카페를 열어보던 마우스를 멈추고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 쪽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큰 고무 다라이에 고인 물을 양동이에 퍼서 담았다. 베란다에 있는 수도꼭지의 한 방울 두 방울씩 거의 새다시피 떨어지는 낙수를 받아 모아서, 두 내외가 생활용수로 사용한 지가 일 년쯤 되었다.

“누수되는 수돗물도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거지, 그냥 쓰면 도용 아닌가?” 처음에는 핀잔을 주었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명분도 내세울 처지가 못 된다. 베란다 바깥 분리수거장에서 아파트 주민들 말소리와 유리병과 빈 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수거일인 매주 수요일은 네댓 명의 경비원들이 무척 힘들어 보인다. 지금처럼 한겨울 추위가 매서운 저녁나절에는 오륙십 대로 보이는 분들이라 더 하겠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나는 대기업 연구소에 취직되어 20여 년간을 성실하게 근무했다. 부장까지 지내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며 스스로 직장을 나와 직접 회사를 차렸다. 연구 개발한 제품으로 특허도 내고 제조업체를 차려 수십 명 직원을 먹여 살리며 힘들게 운영했다.

부침을 거듭하며 20여 년간 세월과 돈만 낭비하다가 결국 사업을 접고 아무런 대책 없이 집안에 칩거한 지가 한 해를 넘어간다. 얼마 전에 구인광고 신문을 보고 근처의 아파트 경비원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 세 명이 왔었는데 힘든 일을 했음 직한 두 명은 되고 나만 나중에 보자더니 연락이 없었다. 설령 되었다고 해도 내후년부터는 나이 때문에 그 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내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대학을 나와 결혼한 지가 어언 40주년이 되었다. 간호학을 전공해서 양호교사로 재직하다가 8년쯤 전에 명예 퇴임을 했다. 내 얘기를 들은 아내는 나를 대신해 몇 푼 벌어보겠다며 이력서를 작성하더니 용케도 요양보호사 학원에 강사로 나가고 있다. 어제, 그저께 연이틀 주간과 야간 강의를 힘들게 하고, 오늘 낮에 모처럼 여고 동창 친구 만나러 외출했던 아내는 5시도 안 되어 돌아왔다.

“더 놀다 오지 뭐 이리 빨리 왔어?”

“김 교수 대신 야간 좀 해달라는 급한 연락이 왔어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어제 학원 제자가 줬다는 매생잇국에 잡곡밥 말아먹고는 서둘러 챙겨서 나갔다. 야간 강의 3시간을 마치고 오면 10시쯤에나 당도할 것이다.

양동이에 절반쯤 물을 채워서 조심스레 들고 주방으로 날랐다. 식탁 위에 타월을 펼쳐서 두 손바닥 넓이의, 아내가 쓸 찜질 팩 두 개를 겹쳐 놓고 네 모서리를 감싸 접어 양동이 물속에 담갔다. 아내가 오면 욕실에 미리 퍼다 날라놓은 다른 양동이의 찬물과 섞어서 뜨뜻하게 목욕할 물을 데워놓을 참이다.

양동이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매번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고 힘도 약한 아내가 그동안 살림하느라 무척 힘들었겠다 싶다. 어쩌다 찬장 높은 곳의 그릇을 내릴 때면, 아슬아슬하게 까치발을 했을 아내를 생각하고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식탁 옆 벽에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 장남 내외와 차남이 내려다보며 “아버지 뭐 하세요? 그냥 보일러 더운물로 샤워하지 그러세요.”하고 웃는 듯해서, 멈칫 민망해졌다. 서른여덟 살인 장남은 결혼해서 손녀가 올해 봄에 입학하고, 세 살 터울의 차남은 직장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집안 행사가 있을 때나 들른다.

보일러 가스비용 아낀다고 조그만 전기장판 두 개로 거실 마루와 안방 침대만 데우고 지내왔다. 그러다 낼모레 새해 떡국 먹으러 올 어린 손녀를 생각해 며칠 전부터 보일러 작동을 시켰었다. 그런데도 어제 나온 가스비용 고지서를 보고는 아내가 놀라서 기함했다. 지난달보다 다섯 배나 많이 나와서 나도 함께 놀랐다.

“박 선생 집에는 15도에 맞춘다는데, 우리는 19도나 되니까!” 보일러 조종기 온도 수치를 들여다본 아내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투덜거렸다. 처음 보일러 켤 때 아내의 요구를 묵살하고, ‘상온이 20도인데, 19도에 맞추는데 뭘 그래!’ 하며 윽박질렀던 터라 계면쩍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가스레인지 불을 약하게 켰다. 50분은 걸릴 거니까 이따가 센 불로 끓이느니, 약하게 오랫동안 데우면 아무래도 가스비용이 덜 들겠지 싶었다. 주접스럽게 궁상을 떨고 마나님이 오셨을 때 지적받을 건 없을까 둘러보며 주섬주섬 치우고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학창 시절에 문예부에 들어있었던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지금은 상금이 걸린 SF(공상과학) 소설 공모전 몇 군데에 응시할 원고를 쓰고 있다. ‘우주와 별’ 카페에서 새로 올라온 기사를 열어봤다. 두 은하계가 충돌해서 생긴 블랙홀이 가스성운을 엄청나게 빨아들이고 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다. 광활하고 끝이 없어 보이는 이 우주도 고작 92개의 자연 원소로 구성되어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인간도 그중 몇 개의 원소로 구성된 셈이다. 죽으면 육신은 분해되어 원래의 원소로 환원되겠지만 혹시 영혼이라는 게 있어 어딘가에 머물며 영원히 존재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삑, 삑, 삑~” 몇십 분도 안 돼서 출입문 도어 잠금장치의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의 끝날 시간도 아닌데 벌써 아내가 돌아왔다.

“왜 이리 일찍 왔어?”

“몸이 아파서 얼른 끝내고 왔어요. 감기 걸렸나 봐. 콧물도 나고.”

“감기? 낮에 놀러 가서 걸려 온 거 아니야?”

“모르겠어요. 목도 꽉 잠기고 오슬오슬 춥네요.”

큰일 났다 싶어 얼른 양동이의 가스 불부터 세게 올렸다. 그사이 아내는 가방에서 밀감이랑 찐 계란, 무말랭이무침을 꺼내 놓는다. 나이 많은 학원 수강생들이 갖다 준 것들이다. 자주 있는 일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느라 양쪽 어깨가 아팠던 아내는 몇 달간을 치료했는데도 아직 덜 나아서, 윗옷을 벗을 때는 내가 도와준다. 코감기약 한 알을 먹고 속옷 바람으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아내는 욕실로 들어갔다.

“나 먼저, 일찍 잘게요.” 아침 식사 때만 해도 표정이 밝았는데, 해쓱해진 얼굴이 너무 안쓰럽다. 이럴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내가 받는 연금은 내가 사업할 때 지인들에게서 빌린 부채 탕감에 거의 다 들어가고, 내가 받는 몇 푼 안 되는 연금도 별로 여유가 없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마다하지 않고 직장에 다니면서, 오히려 내가 다른 생각이나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기색을 볼 때면, 하릴없는 회한으로 가슴이 멘다.

“그래, 잘 자고 푹 쉬어! 내일 또 강의 있지?” 어물쩍 뒤따르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담뱃값이 두 배로 올라, 대책이랍시고 절반만 피우다 재떨이에 세워둔 꽁초에 불을 붙였다. 오늘따라 꽁초가 더 쓴맛이 난다. 3년 전에 갑상샘 수술을 받아 회복은 되었지만, 담배 연기가 해로울 아내를 위해서라도 끊어야 할 텐데, 인디언들의 영령과의 교감이 어쩌고 하며 억지 주장을 내세워 아직도 피우고 있다. 구제 불능인 한심한 인간! 폐 속으로 깊이 삼켰던 연기를 내뿜는데 식탁에서 달그락 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약을 먹어 그런지, 잠이 잘 안 와요.” 아내의 양 볼이 볼그레하게 부은 듯이 보여 걱정이 된다. “티브이라도 좀 보다가, 여기서 자든지.” 거실 바닥에 펼쳐놓은 내 이불을 들치고, 소파 끝에 베개를 받쳐 등받이를 만들어 줬다. 이렇게 따로 잠자리 만든 지도 몇 년 되었다. 아내가 좋아하고 나는 별로인, 여러 명이 나와서 남편과 아내 흉이나 보는 채널에 맞춰주었다.

잠시 후 조용하다 싶어 보니, 아내가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이 들어있다. 예전엔 내가 곁에 없으면 잠도 들지 못했는데. 잠든 아내의 얼굴이 신혼 때 새색시처럼 곱다. 아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봤던 그 순진하고 귀여웠던 얼굴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