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0]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0]
  • 임동식
  • 승인 2023.09.22 08:50
  • 댓글 0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임동식
임동식

[시정일보] 1945년 12월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던 어느 날, 대전은 쌍본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뭐인디요? 죽는 것 말고 성님 부탁을 마닥헐 것 있을랍디여!"

대전은 지난번 오근식이 자신의 집을 다녀간 후 오근식에 대하여 인길양반과 나눴던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쌍본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근식이한테 말하는 것보다는 제삼자인 자네가 물어보는 것이 그 친구가 대답하기에 편허지 않겄는가? 그렁께 자네가 그 친구의 맘을 한번 떠보소!"

"아이고! 성님 그까짓 것이 뭣이 힘들것소! 쌈은 말기고(말리고) 흥정은 붙이락 했응께 내가 촥 엉겨붙어서 얘기허면 지가 별 수 있것어요? 내가 발 벗고 나서서 다리를 놀라우."

"그래. 동생 고맙네."

이렇게 하여 쌍본이 오근식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오근식의 집에는 그의 모든 식구, 모든 식구라 해봐야 세 식구인 오근식을 비롯하여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같이 있기에 잘 됐구나 싶어 대전의 뜻을 전했다. 오근식의 어머니는 옳다구나 쌍본에게 다가서며

​"잘 되얐소. 우리 근식이 명년에는 여워야제라우. 외아들인께 집안 대를 잇을라먼 마땅헌 샥시(색시) 있을 때 언능 해사제라우."

하고 순녀와 그녀의 가정사에 관하여 요모조모를 묻는다. 쌍본은 한의원을 하는 인길양반의 내력과 면 직원으로 근무하다 일본 외유를 한 대전의 이력 그리고 살림꾼으로 당찬 모습을 한 순녀의 성향 등을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중신아비가 되어 성혼을 시키자면 거짓말도 조금은 할 줄 알아야 하고 단점은 빼고 장점은 부각시켜서 듣는 이로 하여금 호감을 갖도록 해야 성사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인데 쌍본은 우직하리만치 솔직했다.

물론 거짓말을 하고 과장을 한다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측면에서 권장할 것은 아니지만 중신의 성사를 위한 거짓말을 굳이 선과 악으로 따지자면 악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 이 혼담의 성사를 위해서라면 쌍본이 조금은 과장된 포장을 해도 될 것인데도 쌍본은 솔직담백하기에 그지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도 쌍본의 우직한 말투가 적효한 것일까 근식의 할머니는

"고만허면 우리 근식이한테 잘 맞겄다. 인물이 물짜면 어쩌고 좋으먼 뭣 헌다냐. 샥시 심성이 좋고 집안도 고만허면 더 볼 것 없다. 언능 식(결혼식) 올리고 살림 차라서 나 죽기 전에 손지(손자) 한 번 안아보고 죽을란다."

이렇게 단정하여 말을 했다. 그러나 근식은 입을 다문 채 뜨악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답답하단 듯 근식과 쌍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볼 뿐이다. 쌍본이 답답히 여기며 근식에게 묻는다.

"근식이! 어르신들은 다 좋닥 허시는디 자네는 어쩐가? 좋든 싫든 말 해보소!"

"글씨, 쪼끔 생각을 해 볼라네."

"그래? 허기사 결혼이라는 것이 빠꿈사리(소꿉장난)마냥 하루 이틀 살 것이 아닌께 생각을 해보기는 해사제."

과연 그렇다. 근식의 입장에서 보면 일생일대를 걸고 결단을 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일 것인바, 선 자리에서 당장 대답을 하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쌍본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근식의 할머니는

"생각은 뭔 놈의 생각이여. 이 샥시먼 감지덕진께 눈 딱 감고 이 샥시랑 해라!"

이렇게 채근하는 것이었다.

"자! 그러먼 식구들 잘 타협해 보시기 바람서 저는 갈라우."

근식은 쌍본을 배웅하고자 쌍본의 뒤를 따라 대문을 나선다. 집 앞 아래쪽으로 펼쳐진 황량한 빈 들판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동구를 벗어날 즈음에 근식이 걸음을 멈추며 쌍본을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쌍본이! 사실은 얼마 전에 임자도에 사는 큰댁의 사촌 형님 소개로 맞선을 봤네."

"아~하! 그랬어? 그래서 어찌게 되얐는가?"

쌍본은 귀가 솔깃하여 근식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임자도의 처녀는 면장의 딸인디 호릿헌 몸매에다 인물도 곱상허니 이쁘게 생겼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잇는 근식의 얘기 내용은 이러했다. 스무 살 임자도의 아가씨는 면장의 외동딸로서 광주의 모 여고를 졸업하고 이후로는 가사를 도우며 마땅한 혼처가 있으면 결혼을 할 요량으로 신부 수업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잘 아는 근식의 사촌 형이 주선을 하여 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처녀의 이름은 연의라고 했다. 연의의 용모는 아름다웠다. 검게 그을린 여느 섬 여자들과는 달리 연의의 우윳빛 하얀 피부는 가냘픈 선을 그리며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렸으며 심연처럼 까만 눈동자와 눈과 입가에 스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미소, 그녀의 고요한 미소는 잠자는 이성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하였다.

근식은 이처럼 아리따운 규수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설렘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바로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침 처녀 쪽에서도 근식의 준수한 외모를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하였던 것인지 선을 보던 그 자리에서 청혼에 응했던 것이었다, 연의의 어머니나 당사자인 연의가 똑같이 근식에 대하여 호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근식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의견은 판이하여 결혼을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문의 격이 너무 차이가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 이유는 연의가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역질인 호열자에 걸려 그로 말미암아 대학진학을 포기했던 것인데 그나마도 겨우 목숨을 건진 정도이니 건강이 얼마나 좋지 않겠냐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는

“옛말에 사우는(사위는) 부잣집에서 데려오고 며느리는 가난헌 집에서 데려오락 했단다. 그러고 우리 집에 올 며느리는 짱짱해야 써! 그래야 집안일을 잘 차고 나가고 애기도 잘 낳제. 그 처녀는 너머 양갓집 규수인디다 건강도 좋덜 안 헌께 당최(전혀) 안 된다이!”

이렇게 완강히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근식은 난처하였다. 그러나 삶의 선생에는 체험처럼 좋은 선생이 없는 것이며 어른의 말씀에 거슬러서 잘된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뜻에 따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식은 연의가 있는 곳, 임자도를 다시 찾아갔다. 신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마음속의 뜻을 전하기 위해 연의의 앞에 선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행위지만 그러나 결코 마음먹은 일, 죄인이 된 심정으로 연의의 앞에 섰던 것이다.

이런 근식의 마음을 알 길 없는 연의는 불현듯 나타난 근식을 화색이 만면하여 반갑게 맞았다. 게다가 근식에게 주려고 여러 날에 걸쳐 손수 짰노라며 털실 목도리를 근식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연의는 첫 선을 본 이후로 오매불망 늘 근식을 그리는 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목도리를 건네준 연의가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구체적인 결혼 방안을 논의하려고 가까운 날에 일로의 예비사돈댁(근식의 집)을 찾아가려는 참이라고….

이 말을 들은 근식은 눈앞이 깜깜해지며 도대체 무거워진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근식은 결국 찾아온 내막을 이야기하였다.

의외의 말에 연의는 근식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할 말을 잃고 있었으며 근식은 차마 이러한 연의를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은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연의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이녁이(당신이) 정녕 그러신닥 허면 나는 어찌게 허께라우?”

연의는 근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근식은 이제 피어나는 파란 새싹을 짓밟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차마 연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근식은 손수건을 꺼내어 연의의 뽀얀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손을 꼬옥 잡아 주며

“참말로 미안허요. 나보다도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간절허게 바랄께라우!”

이렇게 말했다. 연의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볼멘소리로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개빈디(운명인가 본데) 여자인 내가 가신다는 이녘을 어찌게 틀어 잡겄어요. 가시쑈! 떠나가시쑈!”

라고 말할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하며 신부양난(信否兩難)의 심경이 된 것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약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 해도 붙잡지를 못하고 가시란 말밖에는….

근식을 떠나보내는 임자도 처녀, 연의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처럼 연약하기만 하였다. 근식은 더는 연의의 앞에 서 있을 수 없어 도망을 치듯 발길을 돌렸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와 길모퉁이에서 근식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연의는 아직도 고갯마루에 서서 갯바람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망부석처럼 근식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며 근식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루터로 향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근식이 말하는 임자도 처녀 연의와의 짧고도 애절한 운명의 내용이었다. 긴 이야기 끝에 근식은 힘없는 소리로

"그래서 지금도 내 마음은 허둥둥 떠 있는 마음이여."

이렇게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쌍본은

"그러네. 참말로 자네는 둘도 없는 효자네. 그렇게 이쁜 처녀에게 뒀던 맘을 접기가 쉽겄는가? 그러제만 그 처녀와 혼담 이야기는 나도 자네 어무이의 입장허고 같네. 그렁께 순녀랑 결혼을 헐지 말지 잘 생각해서 결정허소!"

이런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쌍본이 돌아가고 근식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상을 방 가운데 놓고 그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종이에 '박순녀, 방년 17세'라고 쓴 후 종이를 상 가운데 놓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생김새는 인길양반과 인길댁을 절반 씩을 닮았다. 마른 듯 큰 키와 흔들림 없이 사물을 주시하는 힘 있는 눈빛은 인길양 반의 복사판이다.

약간은 불거진 광대뼈에 늘어지게 큰 귀 그리고 가르마를 타 쪽 지은 모습은 인길댁의 정갈스러운 모습과 같다. 몇 번 되지는 않지만, 순녀는 볼 때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보아 그녀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성실함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늘의 명인 것이며 이를 통하여 도에 이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이 두리번거리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곧아서 간사하지 않은 사람이다. 반듯한 콧날과 꼭 다문 입술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통틀어 그녀는 허툴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여지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반면에 임자도 처녀, 연의는 어떤가? 갸름한 얼굴에 하얀 피부는 티끌 하나 없이 곱다.

애수에 찬 듯 까만 눈동자는 유혹의 눈동자이다. 가는 허리와 유려한 몸매는 남성들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발동케 하는 가녀린 모습이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서는 항시 아름다운 향이 풍길 것 같고 그녀가 지닌 모든 것들은 다 정결할 것 같다. 그녀가 지닌 마음까지도….

'가시쑈! 떠나 가시쑈!'

이것은 여성으로서 순종적인 모습이다. 그렇다면 임자도의 연의는 나와 천상 배필 아니런가? 그러나 너무 나약하다. 선하기는 할지언정 강하지 않을 것이니 이상적인 여인이라면 모를까 현모양처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일 것 같다.

게다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나의 배필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합당한 사람, 나와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세파를 헤쳐 나아가고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여인은 누구인가?

그렇다. 영화 농장 처녀, 박순녀! 근식은 눈을 떴다. 그리고 하얀 종이에 '박순녀'라는 이름 석 자를 다시 한번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며칠 뒤, 오근식은 쌍본을 만나 자신의 굳혀진 마음을 털어놓았다.

"쌍본이! 인자 내 마음을 결정했네. 우리 어무이나 할매의 말씀도 그렇고 해서 곰곰이 생각 끝에 임자도 처녀에게는 미안헌 일이지만 인자는 깨끗이 잊어 불고 순녀와 결혼허기로 맘 묵었네. 자네나 대전이 성님, 다들 고맙게 생각허네."

근식의 이 말을 듣고 쌍본은 근식의 등을 다독이며

"뭣이 고맙기는 고맙당가 친구지간에…. 하이간에 잘 생각했네. 내 대전이 성님한테 자네 뜻을 전할 텐께 인자 결혼 날짜만 잡으면 되것네. 잘 되얐어."

이렇게 말하며 쌍본은 친구의 새로운 운명의 길에 가교가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2월 1일 음력 섣달그믐 날, 순녀네 부엌은 내일 정월 초하루 날 쓸 제수 반찬을 장만하느라 부산스럽다. 인길양반은 안방 아랫목에서 신원목의 응만과 바둑을 두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부엌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만으로도 신이 난 듯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뛰어놀고 있었다.

해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순녀네는 남달리 음식 장만을 많이 해야 했었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까닭이다. 부엌에서는 인길댁과 경주댁 그리고 순녀 자매, 저마다 음식 장만에 손길이 바쁘다.

경주댁은 검정 솥뚜껑을 뒤집어 부뚜막에 걸고 그 위에 돼지비계 기름칠을 해가며 생선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으며 순녀는 식혜가 앉혀진 큰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인길댁은 생선찜이 담긴 광주리를 들고 안방 건너 곡광으로 갔다. 다 만들어진 고기반찬이나 나물들을 곡광에다 갖다 놓고 손님들이 오면 그곳에서 손쉽게 음식상을 내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광주리를 들고 곡광으로 간 인길댁의 고함이 곡광에서 들려오고 그와 동시에 태곤과 점돌이 맨발로 마당으로 '후다닥' 도망을 친다.

무슨 일인지 순녀가 곡광으로 가 보았다. 곡광 바닥에 조청이 묻은 숟가락이 팽개쳐져 있고 생선 광주리 옆에는 뚜껑이 열린 조청 단지가 놓여 있다.

태곤과 점돌이 조청 단지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삼촌 한 숟가락, 조카 한 숟가락' 이렇게 단재기의 반을 먹어 치운 것이다. 그러다가 곡광으로 들어선 인길댁에게 들킨 것이니 이를 두고 인길댁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인길댁은 도망쳐 나간 아이들을 쫓다 말고 문 앞에 서서 화가 몹시 난 듯 마당에 선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저런 박살헐 놈들! 내일 묵어야제 오늘 그 많은 놈을 다 묵어 불먼 낼은 뭣을 묵겄냐? 순녀야! 가서 비땅(부지깽이) 좀 가져오니라! 저놈의 자식들 양씬 패 줘야 쓰겄다."

"어무이! 제가 가서 혼내주 껏인께 들어가이쑈!"

"그래. 저놈의 자식들 혼내줘라! 그나저나 저놈의 자식들 청(조청)을 저렇게 양씬 묵었는디 설사헐감솝다."

인길댁은 순녀의 만류에 못 이긴 척 부엌으로 향했고 순녀는 아이들의 신발을 들고 마당 구석에 쫓겨가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이놈 자식들! 묵고 싶으면 누나한테 돌라고 해사제 둘이 단재기째 들고 묵어불면 쓰것냐? 언능 신발 신어라!"

순녀는 아이들의 발을 닦아주며 방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부엌으로 향했다. 먹을거리가 모자라던 이 시기, 특히나 명절을 반기는 것은 아이들이다.

이는 평소 굶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별식을 맛볼 수 있는 시기가 이 시기이니 이처럼 좋은 시기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비록 인길댁에게 야단을 맞을지라도 태곤과 점돌,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다가온 설날은 좋기만 한 날인 것이었다.

이윽고 설날이 되었다. 점심에 다 이른 시간, 순녀네 집에 세배객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이들은 순녀의 부모인 인길댁 내외에게 세배를 온 것인데 모두가 복룡촌에 사는 순녀의 사촌 남매들과 조카들이었다.

신년하례가 끝나고 다과상이 차려졌다. 아랫목에 앉아 있던 인길 양반이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자! 차도 마시고 조청에다가 떡들도 찍어 묵어라! 그러고 올해는 느그들한테 헐 말이 있는디 마땅히 자손들로서 조상의 내력을 알고 사는 것이 당연허다고 생각되어 말허것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방 안은 숨소리조차 거슬릴 만치 조용해졌다.

"잘 들어 보그라! 그 옛날 우리 아부지이신 박경림 씨, 긍께 느그들의 하나씨(할아버지)께서는 고 씨 할매를 맞아 초혼을 허셨드란다. 그런디 이 고 씨 할매는 결혼을 허시고 몇 해가 지나도 자식을 낳지를 못허셨지. 이때쯤 마침 과년한 딸을 앞세우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 댕김서 대바구니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디 이 부녀가 우리 동네에 오면 하나씨는 이들 부녀를 가여히 여겨 사랑채 방을 이들 부녀의 숙소로 내주고는 허셨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씨가 그 바구니 장시(장수)에게 하나씨의 사정 얘기를 허심서 딸을 달라고 허셨는디 그렇잖아도 과년한 딸의 앞날을 걱정허던 바구니 장시는 옳다구나 하고 순순히 하나씨의 요구에 응허게 되야서 하나씨는 임 씨 할매를 둘째 마누라로 맞아 재혼을 허셨더란다. 그런디 우리 하나씨, 느그들의 증조하나씨는 이것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어째 그냐 허면 이 임 씨 할매의 출신이 천허다는 것이 그 이유여. 하나씨가 임 씨 할매를 첩으로 맞으신 이후로 날마다 증조하나씨는 하나씨에게 닥달허셨다. 어디라도 내세울 수 있는 반듯한 집안의 규수를 정식 아내로 맞으시란 것이 증조하나씨가 강조허시는 말씀인 것이제. 그리하여 하나씨가 세 번째로 맞으신 분이 나의 어무니이신, 느그들로서는 김 씨 할매이시다. 공교롭게도 이 두 할매들은 같은 해에 똑같이 아들 하나씩을 낳았는디 임 씨 할매는 내게 몇 달 형이 되는 준규 씨를 낳았고 이로부터 몇 달 후 김 씨 할매는 나를 낳으셨더란다. 그렁께 이것으로써 느그들의 하나씨께서는 그동안 고독했던 세월을 한꺼번에 청산 허시게 된 것이제. 그러고 또 공교롭게도 임 씨 할매와 김 씨 할매는 똑같이 아들과 딸 하나씩을 더 낳으셨으니 이렇게 해서 느그들의 하나씨께서는 여섯 남매를 낳으신 것이다. 이후로 나와 준규 형은 가문을 이을 적자 문제를 갖고 잦은 다툼을 허게 되얐었다. 뭔 이야기냐 허면 준규 형은 출생이 나보다 빠르니 자신이 적자라 주장을 허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법도를 따라 정실의 자식이 나이기 때문에 내가 적자라는 것을 주장했었다. 이것은 뭔 말이냐 허면 임 씨 할매는 정해진 거처도 없이 동가식 서가숙 허셨던 분이라 하나씨께서 얼렁뚱땅 데리고 사셨기 땜세 첩이라는 것이고 김 씨 할매는 양갓집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관혼상제의 예법에 따라 정식 혼례를 치르고 데려오셨기 땜세 본실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내가 도덕지로 이사를 하게 됨으로써 이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된 것이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렁께 오늘 복룡촌에서 내려온 조카들은 임 씨 할매의 후손들이고 여그 도덕지 사는 조카들과 대전이나 순녀는 김 씨 할매의 후손이다. 내 대에서는 이 태생의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 다툼이 있었제만, 그것은 적자와 서자의 처우 관계가 극명했기 때문인디 인자 느그들은 임 씨 할매니 김 씨 할매니 편을 가르고 따지먼 안 된다. 어째 그러냐면 인자는 적자, 서자를 논헐 필요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덜 모두, 조카들 모두는 박경림 하나씨의 후손임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렁께 느그들은 앞으로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형제임을 명심하여 서로 어려울 때 협동하여 난관을 타개허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화목허게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고 덧붙여서 병술년, 올 한 해에 이 방 안에 있는 박씨 문중의 우리 식구들 모두 무병허고 잘 살아가기를 기원허겄다."

이렇게 인길 양반의 신년사가 끝나자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던 것이다. 설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정월 초 이튿날, 해거름이 되자 한바탕 세배꾼들이 왔다 간 순녀네 큰방은 파시가 끝난 장터처럼 조용하다. 인길댁은 방 안쪽에 앉아 길쌈이 끝난 무명베를 손질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서는 태곤이 그의 조카 점돌과 마주 앉아 놀고 있었다. 이때 아랫목에 앉아 두꺼운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보던 인길양반이 문밖의 인기척을 듣고 태곤을 불렀다.

"태곤아! 누가 왔는갑다. 문 열어 봐라!"

태곤이 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아부지 성님 왔어."

하고 태곤이 인길양반을 향해 소리쳤다. 세배를 하러 간다고 아침 식사를 마치면서 집을 나갔던 대전이 돌아온 것이다. 대전의 뒤로 광암리의 임종기, 평정의 오근식, 도덕지의 오쌍본, 이 세 사람이 따라 들어왔으며 오근식은 사과 궤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친구의 부모들을 찾아 돌아가며 세배를 하고 마지막으로 평정의 오근식의 집으로 가 세배를 마친 후 순녀네로 온 것이다.

"자! 안으로 들어가세!"

대전이 근식에게서 사과 궤짝을 받아 들며 세 사람을 안방으로 안내하였다. 사과 궤짝은 신년 인사로 선물을 한다며 근식이 사 온 것이다. 세배객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인길양반은 보던 책을 덮고 반쯤 일어나며 이들을 맞는다.

"추운디 이렇코들 오셨는가? 그리 앉거서 발들 좀 녹이소!"

"아니여라우. 아버님! 인나지 마시고 앉으시쑈! 글고 저 어무이 이리 오셔서 아버님 옆에 앉그셔라우! 저희들 세배 드릴랍니다."

종기의 이 말에 인길댁은 아랫목의 인길양반 곁으로 가 나란히 앉았다.

"그러먼 저희 세배드릴랍니다. 자! 세배드리세!"

셋 중 연장자인 종기의 말에 세 사람은 옆으로 나란히 서고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한다.

"아버님! 어머님! 만수무강허시고 복 많이 받으시쑈!"

"어이! 고맙네. 자네들도 올해는 건강들 허시고 뜻허는 것들 다 잘 이루시게!"

신년 하례가 끝나자 인길댁은 순녀를 시켜 저녁상을 차리게 했다. 잠시 후 경주댁과 순녀가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김이 모락거리는 떡국에 빨간 실고추가 뿌려진 죽상어와 조기찜 등 상은 정성 들인 음식들로 가득하였다. 인길양반은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내가 술을 즐기덜 안 헌께 술 인사는 않네만 정초인께 복주(福酒)라 생각허고 탁베기 한 잔씩을 권할 텡께 받으시게!"

이렇게 말하며 대전을 제쳐두고 종기, 근식, 쌍본에게 차례로 막걸리 한 잔씩을 따라주었다.

대전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대전을 제쳐둔 것이다,

이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대전이 말한다.

"내가 술을 못 마신께 그렇제 그래도 남자라면 술 한 잔씩은 헐 줄 알어야 재미진디 말이여 나는 우리 아부지를 닮다 본께 술을 못 마시니 자네들이 부럽네. 많이들 드시게!"

대전의 이 말에 인길양반은 허허 웃으며

"그거 잘 묵으면 약과 같이 좋은 것이고 안 묵어도 정갈해서 좋은께 그렇코 부러울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한 후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근식이! 쩌참에 내가 자네를 본 후, 자네가 맘에 들어 우리 딸 순녀를 자네와 짝을 지어주자고 했는디 자네도 좋다고 했담서(했다면서) 사실인가?"

하고 오근식에게 물었다. 오근식은 인길 양반을 마주 보며 대답한다.

"야~아. 제 어무이와 할매께도 말씀드려서 그렇게 허기로 했는디 저를 그렇게 잘 봐 주신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래. 잘 되얐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디 내 생각으로는 올 농사를 지어서 가실에 식을 올려주고 잡네만 자네 어르신들께서는 어찌게 생각허실지 여쭈어보시겠는가? 허기사 순녀 어메가 자네 집을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기는 헐 것이제만…."

인길 양반의 이런 말을 들으며 근식은 인길 양반의 말하는 기품과 바른 예절에 맘속으로 감동을 하며 대답한다.

"야~아. 어르신께서 그리 해 주신닥 허면 저야 좋습니다. 제 어르신들께도 그리 말씀 드릴랍니다."

"그렇코 허시게나! 결혼은 인륜지대사요, 이성지합이 백복지원이라 했으니 서로가 좋은 배필을 만나 혼인을 허게 되면 비로소 만복이 발원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결혼은 하늘이 내리신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네.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을 허면 팔불출이라 허데만은 우리 순녀가 절세미인은 못 되지만 지혜롭고 총명해서 자네한테는 좋은 내조자가 될 것이니 이것을 천생연분으로 생각허고 성실한 마음으로 둘이 협심하면 빛이 되는 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일세.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하는 것이니 가정을 통해서 이웃에 덕을 베푸는 것, 이것이 곧 빛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덕은 자손만대에 이를 것이여. 인자 양가의 뜻이 하나가 되얐응께 좋은 날 잡어서 식을 올리도록 허시자고 자네 어르신들께도 이러헌 나의 뜻을 전해 드리게나!"

인길양반은 이렇게 말을 함으로써 이 혼담에 대하여 쐐기를 박는 한편 두 사람에 대한 삶의 방편까지도 넌지시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길양반의 말이 끝나자 화제의 주인공인 근식보다도 종기와 쌍본이 더 좋아하며 한마디씩 격려 조의 덕담을 했다.

"근식이! 축하허네! 경술년, 새해 초부터 자네 복 터져 불었네. 올해 넘기지 말고 총각 딱지 띠어(떼어) 불소!"

이즈음의 결혼 양태는 이러했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혼인을 하는가의 문제는 자의적이기보다는 타의적인 것으로 양가 부모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다만 혼인을 하는 당사자의 뜻은 반영이 될 뿐, 주도적일 수 없었던 것으로 혼인을 하기 위해 양가의 부모들끼리 선을 보고 부모들끼리 마음에 들면 혼인을 하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었다.

순녀의 혼인도 예외일 수 없이 그녀의 아버지요, 오라버니인 인길 양반과 대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날 세배상 머리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하여 순녀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그녀의 내면에 근식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이미 싹트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