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1]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1]
  • 임동식
  • 승인 2023.09.2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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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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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8‧15 해방을 맞은 이후 대한민국은 대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일제 36년 동안 실추되었던 조선 왕실의 위상은 일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복구되지 않고 있었으니 이는 나라 안의 내환을 외세를 끌어들여 해결하고자 했던 무능한 왕실이었기에 존립 근거가 없어진 까닭이다.

일본은 조선을 무대로 하여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위세를 배경으로 칼을 차고 버젓이 조선 왕실 문전을 활보하는 도도함으로 왕실을 능멸하고 억압했다.

청나라의 힘을 빌어 왜세(倭勢)를 견제하고자 했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자 이에 주눅이 든 고종황제는 자신의 안집과 다름없는 궁 안에서조차 일인의 눈치를 봐 가며 목숨을 보전하고자 아관파천을 하는 지경을 맞았던 것이니 어찌 국민들 앞에 왕권을 운운할 수 있으랴!

왕권의 실상이 이러했기에 국민들은 그 누구도 실추된 왕권의 회복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과 국내에 머물던 지도층의 인사들은 서로 앞을 다퉈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그동안 잃었던 국권을 되찾고자 분주할 뿐, 그 누구도 왕권의 보전에 무관하였니 이로써 이씨 왕조 오백 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한편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제정세는 격동기를 맞고 있었다. 1943년, 미국, 영국, 중국이 연합하여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싸우자는 결의를 하였으며 더불어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도 언급되었다.

이어서 미국, 영국, 소련이 얄타회담을 개최하였으며 회담 내용 중 일부는 한국독립 3단계 방안이 논의되었던바, 1단계는 한반도 연합국의 군사 점령, 2단계는 한반도의 신탁통치, 3단계는 한국독립이라는 점진적 독립방법 내용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이에 이어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포츠담회담을 개최하고 전쟁도발국인 일본에 대하여 군국주의 권력과 세력을 축출하고 전쟁 능력의 파괴와 평화안정 및 정의의 신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받아들여야 하며 일본 영토의 제한과 일본군의 무장해제, 전범의 국제사법재판소에 따른 처벌, 군수산업 활동 금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하였다.

만약 일본이 이 요구에 불응할 경우 '우리 연합국은 군사적인 공격을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완전한 파괴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포츠담회담 하루 뒷날 일본의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오직 묵살할 뿐'이라고 언론에 보도했다. 스즈키 간타로의 이 오만한 발언의 대가는 처절하였다.

1945년 8월 6일 새벽, 미 공군 폴 티베츠 중령은 B29 폭격기를 조종하여 티니안섬의 미 공군 기지를 출발하였다. 폭격기의 이름은 '에놀라 게이'이고 이 폭격기에는 핵폭탄 '리틀보이'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 뒤로 두 대의 비행기가 따랐으며 한 대는 촬영을, 한 대는 과학적 측정을 위한 비행기였다. 목표지는 히로시마, 세 대의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 구름 사이를 비행하여 08시 15분 히로시마 9,700m 상공에 이르러 폭탄을 투하했다.

상공 580m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것들은 90% 가 파괴되었다. 폭발과 함께 버섯구름은 18km 상공까지 치솟았으며 폭발 초기 사망자는 7만에 이르렀다.

이후 방사능 피해로 사망자가 약 7만에 이르렀으니 히로시마 원폭에 의한 사망자는 14만 명에 이른 것이며 피해 면적은 11평방킬로미터가 완전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스즈키 간타로의 '오직 묵살할 뿐'이라고 했던 말처럼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에 미국은 사흘 뒤 군수공장이 밀집돼 있는 나가사키에 히로시마와 똑같은 폭격을 실행했다.

피폭의 현장은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파괴된 처참한 모습이었으며 폭발 초기의 사망자는 3만5 천 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인류 역사의 유래에 없는 대참사였던 것이며 이렇게 하여 일본은 겪지 않아도 될 대비극을 맛본 후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이 요구했던 사항들을 모두 수용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즈키 칸트로의 무리, 이들은 민족주의자들인가 민족주의를 빙자한 위선자들인가. 내 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정자들, 혹은 그에 준하는 몇몇 사람을 위한 체계의 존속을 위해 많은 인명의 희생을 감수해 가며 전쟁 도발을 한 것이다. 조선 침략과 대동아전쟁을 봐도 그렇다.

그들은 천황을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세뇌 교육을 통하여 자신들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마치 전쟁 도구처럼 이용하고 있는 이들의 처사는 민족주의를 빙자한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설사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범주를 벗어나 민족주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민족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것으로서 인류의 성현인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공자님, 슈바이처가 봤을 때 그들은 지극히 불량한 자들임이 틀림없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조선반도는 이미 얄타회담에서 거론된 바가 있는 신탁통치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획을 긋고 그 획에 대하여 소련에 넌지시 묻자 소련은 긍정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북을 가르는 38선이 생겼으며 38선의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게 된 것이다. 9월 7일 맥아더는 포고령을 발표, 전승군은 38선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하고 '38선 이남 주민에 대한 행정권은 나에게 있다.'라고 발표한 후 9월 8일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조선은 미 군정하에 들어가게 되고 북조선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됨으로써 남북이 갈리어 신탁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점령군들은 38선 165마일에 걸쳐 쇠 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친 후 남북의 왕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내의 여러 지도층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신탁통치 반대와 통일독립을 주장하고 일어섰다. 시민들은 깃발을 들고 시가지를 행진하며 반탁구호를 외쳐댔다.

중국에서 광복 활동을 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는 남북이 분단된 상태의 독립은 절대 불가함을 강조하며 통일된 조국의 독립을 실현시키고자 38선을 넘어 남과 북을 오가며 끝까지 통일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조선 땅에 민주 정부를 수립해 보겠다는 야심 찬 희망을 가지고 서방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신탁통치에 대하여 온건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해방 소식을 듣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있던 맥아더를 만나 조국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고 귀국을 했던 터라 반탁에 대하여 적극 동참을 하지는 않았으나 남북이 갈리는 데에는 그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점령군들의 의지는 뚜렷했고 힘은 막강했으며 이에 반탁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지도층의 인사들과 시민들은 슬그머니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우리 민족 스스로 이뤄낸 것이 아닌 연합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알기 때문에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국내의 굵직한 몇몇 인사들은 계파를 이루어 서로 자기 방식대로 정부를 수립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김구는 끝까지 남북이 분단된 독립은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미군정은 그러한 김구가 그들의 군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눈엣가시처럼 걸림돌이 되고 귀찮은 존재일 뿐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 편, 1945년 8월 20일 조선 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박헌영은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제목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였으며 이 테제는 이후로 좌익 계열의 지침서가 되었다. 테제의 주된 내용은 민족적 완전 독립과 토지 문제의 완전한 해결, 자유 민주적 권리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8시간 노동제 주장, 이것들의 실현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들이 이뤄내야 한다.

조선의 독립은 우리 민족의 주관적 투쟁적 힘에 의해서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소, 영, 미, 중에 의해서 이뤄진 것으로 우리 조선은 민족적 자기비판을 해야 할 모멘트에 이르렀다.

인민 정부는 일반 근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이며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로 발전하면서 혁명의 높은 정도로의 발전을 보장하는 전제 조건을 만드는 것이니 우리는 모든 힘을 집중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영도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대중을 전취하여야 하며 대중이 지지하는 혁명적 인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조선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속히 넘어가게 만들기 위하여 그 전제 조건인 문제를, 즉 반제 반봉건적 투쟁으로 그 자유로운 발전의 길을 열어주고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정권의 수립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확립이란 중요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민족적 통일 전선의 실현을 강조하여 둔다는 것이 테제의 주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발표한 후 공산당원들은 '조선 공산당 만세, 세계 혁명 운동의 수령 스탈린 동무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미국은 조선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남조선의 점령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박헌영의 정치 노선을 미군정의 시선에 고울 까닭이 없었다.

이후로 박헌영은 미군정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미국인들과 쌓아온 인맥이 많았다. 그러한 이승만은 대한독립국민촉성회를 만들고 이를 지지하는 자들을 기반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1946년 2월, 미군정이 주도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의 의원을 맡아 하던 중,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미소가 회담을 가지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의장직을 사퇴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남한 단독으로라도 위원회 또는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맞아 봄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정작 그 봄바람은 사리사욕에 가득 찬 사람들에 의한 요동치는 산란스러운 바람인 것이며 모든 인민들이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심의 때를 털어버리고 가녀린 세상을 향해 손길을 내밀 때 비로소 한반도에 따스한 봄바람은 불어올 것이다.

1946년 2월 말, 곧 있으면 봄이 다가올 것이고 그리되면 못자리에 쓸 볍씨를 담가야 할 시기이며 그 전의 영화농장은 농한기다. 이 시기, 영화농장의 간척 초기에 공출미를 운반하기 위해 일본인 소나다에 의해 놓였던 협쾌철로의 해체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철로는 공출미 창고가 있는 농장에서 두래미 간의 제1 선로와 농장에서 돈도리 간의 제2 선로로서 지난해의 해방과 더불어 공출미 반출이 없어지게 됨과 동시에 도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영화농장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해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해체 작업을 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다.

"허이쓔! 이놈의 철뚝을 치워분께 속이다 시원허네."

"맞어. 인자는 그 히도미(일인 소나다의 하수인)란 놈 안 보게 된께 나는 그것이 제일 좋그만."

이렇듯 영화 농장 사람들은 일제 36년간의 긴 세월 동안 한 해 농사 중의 일부를 공출미란 명목으로 이 선로를 통하여 수탈을 당했던 것이니 이 선로는 수탈의 길이요, 통한의 선로인 것이다.

따라서 선로의 해체 작업을 하는 것은 마치 앓던 이를 빼는 일처럼 영화농장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일인 것이었다. 해체 작업이 통한의 흔적을 지우는 즐거운 일이 되는가 하면 일면으로는 해체된 선로에서 나오는 레일이나 갱목이 나름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일에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레일을 토막 내어 집으로 가져가는 사람, 갱목을 지게에 져가는 사람, 선로의 해체 작업은 누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할 것도 없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삽시간에 끝이 났다.

레일과 갱목이 해체되고 바닥의 흙을 고르고 다지니 들 가운데 곧게 뻗은 길은 멋진 신작로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영화농장 복판에 길게 늘어져 있던 일제의 잔재는 사라졌다.

이제까지 소나다에게 바치는 공출미를 나르는 데 쓰였던 길, 영화농장 사람들의 혼을 앗아가던 이 길은 이제부터는 영화농장 사람들을 위한 길이 된 것이다.

1946년 2월 어느 날 저녁나절, 대전과 광암리의 종기, 월곡의 나도남, 도덕지의 오쌍본과 박동봉이 영화농장의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박동봉은 도덕지에 사는 대전의 사촌 동생으로서 얼마 전에 공산당원으로 입당을 한 신출내기 당원이다.

이들이 가는 곳은 일본인 소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인 작년도까지 공출미를 쌓아 두었던 농장의 빈 양곡 창고이다. 그곳에서 이날 남로당 일로면 위원장을 선출하기로 한 날이었다.

해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고 들판 위로는 수많은 기러기들이 하늘 가득 수를 놓은 듯이 날아다니고 들판의 논바닥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긴 겨울, 혹한을 견뎌낸 보리싹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일행의 뒤를 따르던 종기가 말한다.

"며칠 사이에 철로를 싹 걷어 내고 길을 맷쫒허게(말끔하게) 손 봐 불었네! 인자 장에 나댕기기는 좋겄네."

레일을 걷어 낸 후 종기는 이 길을 처음 가는 중이다. 월곡의 나 도남이

"그렁께 말이세. 이놈의 철길을 뜯어 가락 헌께 어느 놈이 와서 뜯어 간지도 모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뜯어가 불었어. 그나저나 인자 공출미를 안 내게 된 것만 해도 그것이 어디여."

하고 설명해 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장서 가던 쌍본이 걸음을 멈추며

"도남 성님! 위원장으로 누가 좋을게라우? 제 생각에는 성님이 연장자이시고 헌께 위원장을 맡으셨으면 좋겄는디요!"

하고 나도남을 쳐다보며 묻자 나도남은 손을 흔들며 대전을 지목한다.

"에끼 사람아! 내가 뭔 아는 것이 있어야제. 근다고 말을 잘허기를 허는가? 인물을 보나 실력으로 보나 대전이 동생이 위원장으로 딱 맞는 사람이시."

"맞어요. 대전이가 딱 맞습니다."

하고 광암리의 임종기가 나도남의 말을 거들었다.

"아니여라우. 도남 성님이 허셔야 따르는 사람이 많고 경험 또한 많으신께 위원회를 잘 이끌 것입니다."

하고 대전은 사양하였다. 소나다의 양곡 창고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녕들 허시오? 많이들 오셨군요! 늦어서 미안헙니다."

"야~아. 언능들 들어오이쑈! 인자 올 사람은 다 왔는개비요."

창고에 모여든 사람들은 40여 명 남짓으로써 모두가 일로면 사람들이었으며 외지 사람은 단 한 사람, 청계면에서 온 청계면 공산당 위원장인 박병관이라는 사람뿐이었다.

박병관은 이날 일로면 위원장 선출을 격려하기 위해 온 것이며 광암리의 임종기가 초청을 하였던 것이었다. 먼저 온 사람 중에 평정의 오근식도 끼어있었다.

대전과 임종기가 먼저 와 있던 박병관에게 다가갔다. 대전이 손을 내밀며 박병관에게 인사를 한다.

"아이고! 박 위원장님! 이렇게 먼 디서 오셨는디 늦어서 미안헙니다. 예의가 아닙니다."

"아니여라우. 나사 시간이 남어돈께 일찍이 나서 갖고 오다 본께 쪼깐 일찍 도착했소. 근디 위원장 선출을 어찌게 헌답니까?"

하고 박병관이 물었다. 임종기가 대답한다.

"그것이사 후보자를 두세 명 뽑아서 거수로 해 불어야제라우. 도남 성님! 어쩌요?"

이렇게 말하며 나도남과 대전을 쳐다보자 나도남이

"그러제, 그러제! 그러먼 누가 사회를 봐야제. 사회는 쌍본이가 보면 어쩌까? 그러고 우선 청계 박 위원장님이 먼저 인사 말씀 좀 해 주시고!"

하고 대답하며 박병관을 쳐다보자 박병관은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쌍본이 앞으로 나갔다.

"여러분! 저는 도덕지 사는 오쌍본입니다. 제가 오늘 임시 사회를 보겄습니다. 먼저 선출에 앞서 우리 일로면 공산당 위원장 선출을 축하해 주시자고 멀리 청계면에서 와주신 청계 위원장님의 소중한 말씀을 듣도록 허겄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어 주시기 바랍니다. 위원장님!"

박병관은 박수로 환대를 받으며 단상으로 나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웃 청계면 공산당 위원장 박병관입니다. 오늘 일로 위원장 선출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중략) 끝으로 오늘 어느 분이 일로면 공산당 위원장에 선출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잘 의논들 하셔서 좋은 분을 뽑아 앞으로 일로지역 발전과 더불어 정통한 공산주의 사상을 일로지역에 잘 정착시켜 살기 좋은 공산주의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산당 만세!"

이렇게 박병관의 축사가 끝나자 장내는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하였다. 이어서 위원장 선출 방식이 결정되었다. 무작위로 후보자를 추천하고 지지하는 후보에 거수하여 많은 지지를 받는 사람이 위원장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우선 후보자를 추천 받을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마땅헌 분을 호명해 주이쑈!"

누구를 추천할 것인지 한참 동안의 술렁거림 끝에 세 사람이 결정되었고 거명된 세 사람은 차례로 앞으로 나가 자신을 밝히는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1번 감돈리의 홍윤표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헌 제가 위원장을 맡는닥 허는 것이 택도 없는 일이지만 기왕에 나섰응께 심차게 밀어붙여 볼랍니다. 저를 뽑아 주이쑈! 감사합니다."

기호 1번 홍윤표는 작달막한 키에 앞뒤, 상하로 살이 많고 단단한 체격을 하였으며 눈이 부리부리하였다. 어떤 일에 부닥치면 앉은 자리에서 뿌리까지 다 뽑으려는 시원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요, 달리 말하자면 급박스런 성격의 소유자인 듯하였다.

"여러분! 이러코 만난께 참말로 반갑소. 2번 청호리 나정율입니다. 인자 왜놈들도 물러가고 나라는 뒤숭숭허니 어지럽습니다. 그렁께 시방 우덜은(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사 씁니다. 우덜은 여지까지(여태까지) 부자들에게 노동력을 착취 당험서 살아왔습니다. 시방처럼 우덜이 변화 없는 시상을(세상) 산다면 평생을 놈의 집 살이나 험서 살게 될 것인께 우덜은 인자 시상을 바까야 헙니다. 우덜도 논밭을 많이 가진 부자들처럼 잘사는 시상, 공평허게 다 같이 잘사는 시상으로 말입니다. 제가 위원장이 되면 죽자거니 그 일에 앞장 설랍니다. 여러분! 저을 뽑아 주이쑈!"

2번 청호의 나정율은 훌쭉하니 큰 키에 검게 그을은 얼굴이었다. 너무나 솔직하여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학식 또한 짧은 듯 과연 패기만으로 위원장이란 책무를 감당할 수 있으랴 싶은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3번 도덕지 박대전올씨다. 감히 제가 위원장직을 맡아 허기에는 여러분 기대의 절반에도 못 미칠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이 단상에 섰습니다. 그러제만서도 우리들의 염원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이 젊음 다 바치고 싶은 열정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열정 하나로 시대가 요구허는 과업을 완수허는 데 최선을 다해 보것습니다."

이 세 사람의 후보자 인사가 끝나자 장내는 잠시 술렁거렸고 오쌍본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여러분! 쪼깐 조용히 해 주시고 인자 세 분의 간단한 인사와 더불어 자기소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느 분을 위원장님으로 선출해야 좋을까 여러분들 마음속에 정해지셨을 것으로 생각험서 1번 홍윤표 님부터 차례로 거수를 해서 젤로 많은 지지를 받는 분이 우리 일로면 남로당 위원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일로의 남로당 위원회, 이것은 유사 이래 일로 사회에 없었던 생소한 단체이며 이들의 사상과 활동에 의해 과연 일로 사회가 크게 개화될 수 있을지, 이들에 대한 면민들의 반향은 어떨지 이것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틀림없는 사실은 이들의 성분과 성향이 지극히 가난한 계층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모험심과 탐구심이 뛰어난 진취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임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로 하여금 일로 사회의 환경이 개선되고 문화가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저 하늘의 별을 따다 호롱불을 삼겠다는 것처럼 허황된 얘기일까.

그렇다. 원시시대의 문맹으로부터 오늘의 발전된 문명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이상주의자들의 꿈에 의한 것이다. 일로의 이상주의자들을 대표할 남로당 일로 위원장은 과연 누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