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2]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2]
  • 임동식
  • 승인 2023.10.0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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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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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일로의 남로당인민위원장은 과연 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후보자 세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고 단상에 선 쌍본은 당원들을 향해 외친다.

"자! 여러분들 집중해 봅시다! 후보자 세 분은 다 밖으로 나갔응께 옆 사람들 눈치 보지 마시고 여러분의 의견을 거수로 표해 주시면 아까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수의 지지자가 우리의 인민 일로 위원장이 됩니다. 자! 그러먼 기호 1번, 홍윤표 씨를 지지허시는 분 손들어 주이쑈!"

당원들은 서로 옆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두리번거리며 망설인다. 쌍본이 다시 독려했다.

"옆 사람 눈치들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을 들어 불어요! 우리 당의 행로가 엇갈리는 문젠께 이녁들 소신 것이요."

기호 1번 '홍윤표'를 지지하는 사람은 14명이었으며 대체로 감돈리 인근 사람들이었다. 기호 2번 '나정율' 지지자 9명, 기호 3번 '박대전' 18명, 이렇게 거수로 선출 결과가 마쳐지고 그동안 밖으로 나갔던 후보자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사회자 '오쌍본'이 장내를 정리하고 선출 결과를 공포하였다.

"거수로 한 선출 결과는 18사람의 지지를 받은 박대전 씨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어서 일로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대전이 단상에 올라 당원들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당선 소감을 말한다.

"여러분! 여러모로 봐도 부족헌 저, 박대전을 믿고 선출해 주신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 뭣이라고 해야 헐지 모르것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국제정세도 불안하고 그중에 우리 대한민국은 소솔이(해오리) 바람 속에 있데끼(있듯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북조선은 소련이 들어오고 남조선은 미국이 들어와 조선을 반으로 갈라놨습니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내신 김구 선생께서는 남북이 반쪽으로 갈려서는 절대 안 된다고 반탁운동을 하고 계시는데 이 박사(이승만)는 남쪽만이라도 독립정부를 수립허자고 헙니다. 그런가 허면 박헌영 동지는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여 인민을 결합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지러운 때 쪼끔의 힘이라도 규합하여 이 땅에 조선 인민 공산당이 꽃피울 수 있도록 열성을 다해야 쓰겄습니다. 각 지역마다 우리 당원들, 낙오되고 이탈되는 사람 없이 잘 관리들 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러고 제가 위원장을 허는 도중에라도 혹시 잘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꼭 지적해 주시고 저는 그것을 적극 반영할 것이로되 그렇지 못할 시에는 언제라도 위원장직을 내놓겄습니다. 기왕에 위원장으로 선택을 받은 이상 최선을 다허겄습니만 지금이라도 혹시 이 '박대전'이 위원장을 허는데 미덥지 못하다 생각허시면 저는 위원장 자리에 절대로 연연허지 않고 양보헐 테니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면 감사허겄습니다. 여러분, 항시 건강하시고 가정 또한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헙니다. 고맙습니다."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당장이라도 위원장 자리를 양보하겠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대전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앞으로 나서는 것을 버릇처럼 경계하였으며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오며 경험으로 터득한 하나의 처세술이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호남형인 데다가 언변 또한 좋은 사람이었다. 이것을 스스로 내세우거나 과시하면 질투나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나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월한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사람들이 갖는 보상심리 때문이며 자신의 열등감을 우월한 자의 흠을 찾는 데서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 한다는 지론인 것이다.

이러한 지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우쭐대는 일등에 대해서는 질투심이나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는 반면 꼴등을 하거나 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측은지심이 유발되어 일등을 하는 쪽보다 도리어 그보다 못한 사람에게 마음이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일등에 대한 존경심과 본받으려고 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이러한 경우는 제외된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깨우친 대전은 항시 스스로 낮추려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이며 그러한 까닭에 '미덥지 못하다면 언제라도 위원장 자리를 내놓겠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로당일로인민위원장에 '박대전'이 선출되었다.

영화농장에 봄은 올 것인가? 그동안의 군주제 500년의 이씨 왕조가 무너지고 36년의 일제강점기를 맞아 물적인 수탈과 민족의 혼을 빼앗김으로 황폐했던 영화농장에 좌익사상이 펼쳐짐으로써 봄은 과연 올 수 있을 것인가.

논보리는 도랑을 만들어 배수가 원활케 해줘야 한다. 삼월 중순의 어느 날, 겨우내 불어오던 북동풍은 갯내음 섞인 남서풍으로 바뀌었다. 이 바람이 더하여 훈풍이 되면 그 바람을 맞고 영화농장 들녘의 보리밭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오월이 되어 보리 수확이 끝나고 모내기 철로 이어지는데 이에 앞서 삼월에는 모판에 쓸 볍씨를 담그는 시기이다. 인길댁과 순녀가 토방 아래서 볍씨를 담그고 있다.

"순녀야! 내가 가서 나락을 쫌 더 갖고 올란다. 다섯 배미를 숭굴라면(심으려면) 모지랄 감송께(모자랄까 보니) 반말은 더 담가야 쓰것다. 곤(썩은) 놈은 다 거둬내라!"

볍씨를 이루다 말고 인길댁은 빈 그릇을 들고 곡광으로 갔다. 순녀는 볍씨가 담긴 물을 일렁거려 위로 뜨는 썩은 볍씨를 거둬내고 있고 네 살배기 경배와 그보다 세 살 더 먹은 점돌은 마루와 토방을 오르내리며 놀고 있었다.

"꼬마야! 신발 인 내줘!"

고무 신발을 가지고 노는 경배에게서 점돌이 뺏으려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순녀가 말한다.

"점돌아! 꼬마락 허먼 못 써. 삼촌한테 꼬마락 허면 어찌게 헌다냐!"

타이르는 순녀에게 점돌이 묻는다.

"고모! 어째 동생한테 삼촌이라고 해?"

"으응! 그거는 어째 그냐먼 너는 엄마가 나았고 경배는 할매가 낳으셨응께 경배가 너보다 어려도 너는 경배한테 삼촌이라고 불러야 써!"

"그러먼 내 동생은 왜 없어?!"

"이놈아! 그것은 고모도 몰라. 아니, 엄마한테 물어봐라!"

이렇게 순녀와 그녀의 조카인 점돌의 얘기를 하는 사이 곡광에서 인길댁이 볍씨를 들고 나오며 순녀에게 묻는다.

"뭣을 모른다고 그러냐?"

"이놈 자식이 저는 어째서 동생이 없냐고 그러 안 허요. 그래서 느그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했든 참이어라우."

순녀의 얘기를 들은 인길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리 해 봐도 안 되고 저리 해 봐도 안 되니 어째야 쓰끄나!"

이렇게 알 수 없는 넋두리를 하며 큰방으로 들어갔다. 인길양반은 방 아랫목에 앉아 산채 해 온 약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대전 아부지! 대전이 좀 잘 타일러서 점돌 애미랑 합방을 허게 해 보이쑈!"

인길댁의 이 말에 인길양반은 들고 있던 칼을 놓으며 대답한다.

"어째 뜬금없이 그 말을 꺼내시는가?"

인길댁은 좀 전에 순녀에게 들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인길양반이 정색하며 반문한다.

"글씨 자네 생각은 어쩌신가? 공부한다고 밤이면 지(제) 방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째야 쓰겄는가?"

"한번 뜨끔허게 당신이 야단을 쳐 보이쑈!"

대전은 일본과 만주에서 보낸 6년 동안의 외유 끝에 귀향하여 일 년 남짓의 세월을 보내면서 자신의 처인 경주댁의 방을 찾은 것은 귀향 첫 달에 불과 사나흘이었다.

그 후로는 공부를 한답시고 사랑방을 청소하고는 자신의 책과 소지품 몇 가지를 그곳으로 옮긴 후 잠자리를 그곳에서 하였다. 그러니 점돌이가 일곱 살에 이르도록 형제가 있을 리 만무한 것이며 이에 인길댁 내외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인길양반은 답답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점돌 애비가 애기도 아니고 이제는 내가 백날 말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네."

"그라먼 어찌게 해사 쓰요?"

더 이상 말을 해야 개미 쳇바퀴 돌기 같은 얘기가 될 것임을 안 인길양반은

"그것을 내가 어찌게 아는가? 애초에 점돌 애미를 데꼬온(데려온) 사람이 자넨께 자네가 알어서 해 봐!"

하고 쏘아붙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년 전, 대전이 결혼하던 날부터 이 문제만 불거지면 인길댁 내외는 심경이 불편해지고 이야기의 끝은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인길댁은 뚜렷한 방편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하고 인길양반에게 말을 붙였다가 감정만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인길양반은 상한 마음으로 마루 끝에 걸터앉아 궐련을 피워 물었다.

순녀와 인길댁이 마당에서 다 씻은 볍씨를 토방에 있는 항아리로 옮겨 담으려 하자 인길양반이 달려들어 거들었다.

"엄마! 아부지랑 엥게(옮겨) 담으이쑈! 내가 가서 물을 길어 올랑께."

"오냐! 가서 물을 쪼깐 길어오니라! 그나저나 이 볍씨가 잘돼 줘야 가실에 우리 순녀를 여울 텐디…."

볍씨를 퍼 옮기며 인길댁은 다가올 가을의 추수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순녀는 말례와 함께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갔다. 그때 고개 너머 신원목에 사는 '박창헌'이 울타리 옆을 지나다가 인길댁 내외를 보고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그는 일제 때부터 줄곧 목포역의 역무원이었으며 퇴근길에 인길댁 내외를 본 것이다. 인길양반이 지나치려는 창헌을 불렀다.

"잠깐 이리 왔다 가시게!"

창헌이 가다 말고 순녀네 마당으로 들어섰다.

"다름이 아니고 자네는 날마다 목포를 나다닌께 시국이 어찌게 돌아가는지 잘 알 테제. 조선 땅이 남북으로 갈리면 안 될 텐디 어찌게 될 것 같은가?"

"큼메 말이여라우. 일본놈들이 다 물러가고 난께 온 나라가 태풍 지나간 뒤 마냥 원채(워낙) 어수선해서 알 수가 있어야제라우! 김구 선생이나 박헌영은 절대적으로 통일독립을 해서 정부를 세우작 허고 이 박사는 남쪽만이라도 일단 정부를 세우자는디 미군정은 이 박사 손을 들어줌서 말허자면 이 박사와 미군정이 협조 체재를 이룬께 결국은 남북이 갈려서 정부가 세워질 테제라우."

"그리되면 결국은 자네 말대로 남북이 갈리게 생겼그만. 암짝에도(아무래도) 시방 조선의 통치를 소련놈, 미국놈들이 허고 있으니 말이네. 그 옛날 삼한이 갈려서 수백 년의 시대를 보냈듯, 이참에 남북이 갈라지면 쉽게 다시 합쳐지겄는가!? 김구 선생이 그 옛날 일로장터에 온 적이 있는디 그분의 인품이나 살아온 과거, 그러고 현재 주장허는 노선을 보면 그 양반이 앞장서서 나라를 세우면 쓰겄그만…."

"우리 민족의 앞날을 보면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만 그리 될랑가 모르것네요."

두 사람의 소견은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 모두의 소망과도 같은 것이지만 몇몇 지도층 인사들은 소련과 미국의 주장에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고 그러한 양대 강국의 정략적인 노선에 동조함으로써 우위적인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시간, 지도로 출장 근무를 나갔던 대전이 돌아왔다. 얼마 전 대전은 무안군청 직원으로 임용되어 군내의 도서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잔재인 적산가옥을 정리하는 일에 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도 대전은 지도 섬으로 출장 근무를 나갔다가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귀가를 한 것이다.

대전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점돌이 대전의 품으로 달려들며 누구보다도 반가워하고 대전은 그런 점돌의 손을 잡고 큰방으로 들어섰다.

"아부지! 어무니! 저 댕겨왔습니다."

대전의 인사를 받은 인길양반이

"오냐. 고상했다. 피는 못 속인닥 허더니 애비가 돌아오니 점돌이가 제일 존갑다! 피곤헐 텐디 언능 가서 옷 갈어 입어라!"

하고 대전을 향해 말하자 대전은 큰방을 나서고 점돌도 그 뒤를 따라나선다.

제 아버지에게 달라붙듯 쫄랑거리며 따라 다니는 살가운 모습의 일곱 살배기 점돌이……. 그렇다. 부자간의 정이란 그런가 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고 시키지 않아도 하고 싶은 것이 부자간의 정리인가 보다.

이것이 사랑이요, 뜨거운 혈육지정이 아닐까.

이날 초저녁, 인길양반이 대전의 방을 찾았다.

"으흠! 애비야, 나다."

"야~! 아부지 안 주무시고?"

마침 대전은 가방을 챙기며 외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즈음의 대전은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가며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하며 더불어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겸하고 있던 중이다. 인길양반이 막 집을 나서려는 대전을 붙든 것이다.

"애비야! 잠시 앉거라!"

인길양반과 대전이 마주 앉았다.

"오늘 밤도 나갈 모양이구나?"

"야~, 광암에 좀 갔다 올라우."

"그럴래? 갔다 오그라만은 요새 나라가 시끄럽고 안정이 안 되야서 혼란스런디 처신을 잘해야 쓰겄다. 지난 36년 왜정이 끝난께 인자는 미국놈들이 들어와서 군정을 헌다고 허니 아무짝에도 그놈들을 등에 업은 자가 득세허지 누가 허겄냐? 그러니 미국놈들의 군정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펼친다는 것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인즉, 너도 그것을 유념허고 그 사상에 더 몰입허지 말고 손을 떼도록 해라!"

"아부지 말씀 명심허겄습니다. 지금 박헌영 동지가 서울에서 많은 인민들의 지지 속에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잘 이끌고 있닥 헌께 쪼깐 지켜봐야 쓰겄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허는디 말이다. 오늘은 점돌이가 '어째서 저는 동생이 없냐'고 즈그(자기) 고모한테 그러더란다. 그러니 이 애비는 그 점도 꺽정스럽다."

"아부지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불효를 용서해 주이쑈! 제가 걱정 안 허시도록 노력헐랍니다. 인자 저는 좀 갔다 올랍니다."

대전이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서는데 점돌이 따라 일어서며

"아부이! 또 가?"

하고 울상이 되어 묻자 대전은 대답 대신 점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방문을 열었다. 이때 방문 앞에 언제부터였는지 경주댁이 서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점돌아! 언능 이리 오니라! 가서 자자! 글고 당신은 뭣 헌다고 또 나가요? 거그 가면 쌀이 나오요, 밥이 나오요?"

하고는 점돌의 손을 낚아채듯 하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대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서고 인길양반은 큰방으로 돌아왔다.

큰방에는 인길댁과 말례와 순녀, 세 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인길양반이 들어서자 마치 먼 길 손님을 대하듯 반색을 하며 인길댁이 묻는다.

"점돌 애비한테 뭔 말 좀 해 봐겠오?"

인길양반이 대답한다.

"참말로 안타깝네.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저만한 인물에 사람 좋겠다, 배우지를 못했나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을 아인디…. 꺽정이네, 꺽정이여."

시원스러운 대답을 할 줄로만 알았던 인길양반은 도리어 넋두리만 하는 것이었다. 인길 양반의 넋두리를 들은 인길댁은 누구보다도 속이 터질 노릇이다.

예전 대전이 총각이던 시절, 그 많던 신붓감들을 다 제쳐 두고 자신의 눈에 좋으면 아들 눈에도 좋으련 하고 지금의 경주댁을 맏며느리로 선택한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에 아들의 가정생활을 지켜볼 때마다 인길댁은 내심 애를 태우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전이 과거에 일본과 만주로 외유를 갔던 것이나 지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 실마리가 가정생활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지난 과거에 자신의 잘못한 선택에 대하여 끝없이 밀려드는 후회스러움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인길댁이 어린 경배에게 젖을 물리며 자리에 눕자 인길양반이 나직한 소리로 순녀와 말례를 부른다.

"순녀야! 너는 올 농사를 지어서 가실에(가을)는 시집을 가야 헌께 잘 들어라!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편이 뭔 일을 허건 내조를 잘해야 쓰고 절대적으로 순종을 해야 쓴다. 느그 올케언니마냥 고집을 부린다거나 오기를 파서는 절대로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여. 그러면 다가서던 마음도 도망을 가게 되지. 설령 남편이 억지를 부린닥 허드라도 그 면전에서 비수처럼 쏴붙이거나 냉정히 비판만을 허게 되면 남편의 마음은 점점 멀어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의 억지에 일단은 순종허고 언젠가 자신의 잘못된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순종하는 마음에 감동허게 된단다. 이것이 어질고 순종할 줄 아는 아내의 덕목이고 지혜인 것이다. 말례야! 너도 뭔 말인지 알것지?"

"야~아."

"그래. 꼭 명심허기 바란다. 인자 늦었응께 가서들 자그라!"

순녀와 말례는 인길양반의 훈계를 듣고 큰방을 나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례야! 요 위에다 베개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 자! 이렇게."

"어째서 그래?"

"보면 알 텐께 시킨 대로 해야! 그러고 우리는 오빠 방으로 가서 자자!"

말례는 언니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어리둥절하여 그저 언니의 말에 따를 뿐이다. 순녀 자매는 방의 한 가운데에다 큰 베개 두 개를 이어놓고 이불을 덮은 후 자신들의 방을 나와 대전의 방으로 갔다.

"말례야! 우덜 오늘 밤은 오빠 방에서 자자!"

"그러믄 오빠는 어찌게 허라고…. 오빠는 어디서 자?"

"그것은 오빠가 알어서 헐 테제. 긍께 오빠가 와서 깨워도 모른 체 허고 그냥 자기만 해!"

이렇게 순녀의 자매는 그들의 오라버니 대전의 방을 차지하여 잠들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대전이 귀가하여 방문을 열고는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깜짝 놀란다.

"누구요?"

대전이 잠든 이들을 향해 물어보지만 대답이 없자 성냥불을 켜고 살펴보니 순녀와 말례가 아닌가.

"순녀야!"

"……"

"말례야!"

대전은 잠든 동생들의 이름을 번갈아 가며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자신의 잠자리를 두 여동생에게 내어 준 대전은 하는 수 없이 마당 건너 순녀의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여기도 누군가 누워서 잠들고 있지 않은가. 대전은 열었던 방문을 슬그머니 닫고 토방으로 내려와 처마 밑에서 서성거린다.

밤바람에 실려 오는 솔부엉이 울음소리는 슬픈 신음소리가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검푸른 밤하늘 은하수를 가로질러 별똥별 하나가 쏜살같이 사선을 그리며 땅끝으로 곤두박질을 한다.

밤바람이 차가운데 처마 밑에서 서성이던 대전은 결국 경주댁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순녀가 놓은 올가미에 걸려든 대전…

이렇게 하여 인길댁 내외의 고민은 임시방편으로나마 해결이 되었던 것이며 왜 자신에게는 동생이 없냐는 점돌의 소망이 이루어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