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길
예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길
  • 임춘식 논설위원
  • 승인 2023.10.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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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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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식 논설위원

[시정일보] 한국 현대 정치사에 중요한 분기점인 1971년 군사정권의 대학 병영화와 정보공작 통치 철폐를 요구하며 반독재 투쟁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180여 대학생을 구금, 구속, 제적시켜 강제 입영했던 피해자들의 ‘사단법인 71 동지회’(회장 최 열) 단체 카톡방에 며칠 전 뜬금없는 글 한 편이 떴다. ‘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선고’을 받았다는 사연이라 충격이 컸음은 물론 ‘선고’를 스스로 공개한 용기에 깜짝 놀랐다.

# “또 잠 못 이른 새벽 충전도 되었기에 색다른 것이 하나. 희소 암 투병 길에 며칠 전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니 85일이 남았군. 악착같이 버터야 할지 아니면 원혜영(웰다잉운동 공동대표) 동지의 편안한 죽음의 길을 갈지 동지 제현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서울법대 동지들이 최근 4년간 매년 한 명씩 부름을 받고 있네요. 어떤 일일까요. 여러 가지로 대화하기가 불편하니 통화나 면회는 사절하게 해 주십시오. 장0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장 동지는 인천 제물포고, 서울법대를 졸업한 수재로 평생 무역회사와 종합상사 CEO를 두루 지냈다. 평소 ‘꿈만 꾸다 가는가’를 갈구했던 그는 지인들로부터 존경받았다. 그런데 왜인 일인가.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 애절한 사연을 접한 동지들은 재빠르게 위안의 리플을 달았다. 그 원문은 이렇다.

# “장0규 동지. 장 동지는 우리 71 동지회에서 항상 가장 해박한 지식을 피력하였습니다. 새벽은 아침 태양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 태양과 같은 희망에 차보는 것이 어떨는지요? 희망을 노래한 유명한 명언을 몇 가지 드립니다.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헬렌 켈러,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폴레옹,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 -마르틴 루터. 아침 해처럼 장 동지께서 곧 일어나시길 기도 드립니다.” -서0규.

# “장0규 동지의 담담하면서도 의연한 모습이 가슴을 울립니다. 찰나의 차이일 뿐 같은 길을 걸어야 할 동반자로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부디 마음 편히 가지소서.” -이0섭.

# “가슴이 먹먹합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이0덕.

# “장0규 형, 긍정적인 마음으로 건강을 회복하길 기원합니다.” -최 0.

# “장0규 동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슴이 매우 아프네요! 그러나, 인생은 어차피 자기와의 싸움 아니겠소? 장 동지! 학창 시절의 기백으로 병마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장 동지! 다시 한번 패기! 아자! 아자!” -윤0근.

아마도 장 동지는 리플을 읽고 여유 있는 치유를 맞았을까. 아니 의사로부터 “삶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말을 전해 들은 그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혼란을 겪고 있을까. 이런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남은 삶이 윤택할 수 있도록 가족의 역할은 무얼까? 아니면 자신도 ‘아름다운 이별 준비를 미리 했을까?

의사들이 말기 암 진단을 내리는 것은 단순히 암이 4기이거나 전이됐을 때가 아니라,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 화학 요법 등 적극적인 치료가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해 병세가 악화해 수개월 안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될 때라고 말한다.

말기 암이라서 생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이후의 생존 기간은 환자마다 다 다르지만, 통계적으로 10명 중 5명은 2~3개월 생존하고, 평균적으로는 환자 대부분이 3~4개월을 더 산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부 말기 암 환자의 가족은 환자 본인에게 환자의 상태를 말해주지 않는다.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있을 때 더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말기 암 환자는 자기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정확히 못 듣고, 10명 중 2명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모르는 채로 임종을 맞는다는 통계가 있다.

그래도 말기 암 환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질병이 더 악화하여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됐을 때 몸 상태를 알면 삶을 마무리하는 기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더 나은 삶의 질을 유지하며 보낼 수 있도록 환자뿐 아니라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다.

남의 일이 아니다. 만약 내 삶의 남은 시간이 3개월뿐이라면, 아니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면, 남은 시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대해 기록해 보자. 죽음과 삶은 내면 깊숙이 숨겨진 사랑 덩어리의 조각난 파편을 찾아 맞추는 편안한 죽음의 퍼즐이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이 성찰의 기록은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 오직 남은 것은 순백의 도화지일 뿐이다.

어쨌든 ’예습도 복습도 없는 단 한 번의 인생길’이라는 말이 문득 가슴을 친다.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늙고, 사람답게 죽는 것이 삶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남은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뇌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이다. 가족들의 품에서 품위를 유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누군가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

죽음을 위해 그 어떤 대단한 준비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사랑하고, 내 주변에 사랑하는 이들을 더 뜨겁게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한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