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 신드롬에 묻힌 고구려 역사
‘제갈공명’ 신드롬에 묻힌 고구려 역사
  • 시정일보
  • 승인 2008.12.0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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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병 영 민족혼 되찾기 시민단체 대표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호걸 중 단연 손꼽히는 인물은 ‘제갈공명’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전무후무 제갈무후)’는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을 표징한 것으로 ‘유사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제갈 공명 만한 사람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제갈 공명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한 인물에 대한 사실상 최고의 극찬으로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에서 비친 그의 모습이 중화사상이라는 2차 투과 이후 소설들을 통해 한자문화권인 아시아 지역에 퍼지면서 오히려 어떤 신보다 더 높은 절대적 위치로 까지 올려놓았는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제갈공명은 제 나라가 50년 후에 망한다’는 사실도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학대사’와 ‘도선국사’는 ‘고려의 500년’, ‘조선의 500년’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나관중이 ‘중국 삼국지’에서 ‘제갈’이나 ‘사마의(司馬懿)’의 뛰어난 활약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춘추필법'으로 병들게 했는데, 과연 그 시점의 고구려는 어떠했을까?
제갈공명이 위나라의 사마의에 의해 처참한 패배 끝에 결국 생을 마감하고, 사마의는 서안평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의 치밀한 전략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삼국지연의’의 위·촉·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이 채 안 되는, 중국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역사다. 사실 적벽대전의 현장을 가보면 100만 대군이 치열한 전투를 한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협소한 공간이다. 즉, 100만이라는 숫자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자료를 토대로 100만 대군을 출진시키려면, 그 두배에 해당하는 후방군과 보급군이 있어야 되며, 다른 국경을 지킬 군사들과 수도 방비 병력도 존재해야한다.
그리고 장정의 기준을 16세에서 60세까지 잡았을 경우,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경민들까지 포함한다면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100만 대군을 소집하려면 최소 인구는 5천만명에서 7천만명 사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의 내용은 사실상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한 후대의 허구적 구술이라는 편이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윤색해 ‘삼국지’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를 현혹시키며, 중화사상을 퍼뜨리는데 원천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삼고초려’도 나관중의 머리에서 나온 허구다.
제갈공명이 사마의와의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후의 일이다. 위나라에 반기를 든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고, 동천왕은 흔쾌히 군을 출동시킨다.
그렇지만 ‘동천왕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위나라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그 혼란을 틈타 ‘대무신왕’ 때 이미 정복했던 ‘화북'(북경을 포함한 인근지역)을 되찾으면서, ‘요서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위나라 군에 쫓기는 반란군을 가볍게 물리친 고구려 군은 쉽게 서안평을 점령했다. 서안평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토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물리지 않았다. 이에 사마의는 환도성으로 사신을 보내 군사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동천왕은 차일피일 미룬다.
그 와중에 위나라의 명제가 세상을 뜨고 변경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드디어 서안평을 고구려 영토로 선포하기 이른다. 이에 놀란 ‘사마의’는 조카 ‘사마강’으로 하여금 고구려 정벌군을 출동시키며, 세세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을 하달하지만, 사마의 전술과 전략을 간파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에 처참한 참패를 당하고야 만다.
즉,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는 알아도 우리 역사를 모르게 만들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뿌리깊이 심어주게 만든 일등공신(?)인 것이다.
위·촉·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도 안 되는 역사의 나라다. 세 나라 간에 온통 속이고 속이는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역사를 어떻게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온 천년에 가까운 고구려의 역사와 비교를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어떻게 그런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내용을 우리에게 처세의 명저로 행세하며, 이 땅의 내일의 주역인 아이들에게 논술 필독서로 권한다는 것에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중국의 삼국시대는 대략 후한 말기 3세기 무렵인데 당시는 부정부패와 치안이 모두 혼란해 지역군벌들이 너도나도 일어서는 시기였다.
중국 역사상 최강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당나라도 고구려 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한다면, 중국의 삼국 위·촉·오 모두 협공을 해 고구려를 침공한다고 해도 당시 국력과 통치 시스템을 고려해도 능히 고구려는 막아 냈을 것이다.
일본이 무력으로 독도를 침공한다는 가상적 설정으로 쓴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은 “전설적 작가들은 앞 다퉈 삼국지를 편역해 내고, 사회에서도 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이단아나 저능아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저들의 동북공정을 격파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삼국시대의 영웅호걸들이 과연 중국 삼국시대 장수들에 비해 아직도 뒤떨어진다고생각하는 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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