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사 순국 78주기에 부쳐
윤봉길의사 순국 78주기에 부쳐
  • 한국시정일보
  • 승인 2010.12.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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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 (서울지방보훈청 보상과)
돌아오는 일요일 19일은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지 78주기가 되는 날이다.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육군대장 등을 폭살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전 구국활동과 자신의 의거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에 대한 의사 스스로의 평가에 대해서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윤봉길 의사는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신교육을 받았으며, 수권의 시문집을 짓는 청년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셨다. 또한 신문잡지를 구독하고 신학문 서적을 탐독해 열심히 신사조를 수용했다. 19세가 되던 해부터는 야학, 독서회, 강연회 등을 주재하며 농촌개혁 운동에 앞장 서, 농촌 계몽과 자립 활동을 비롯해 민족정신을 구취하는 단체를 운영하시기도 했다. 윤의사는 이후 23세인 1930년 3월,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남기시고 망명길에 올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을 찾아 살신구국의 큰 뜻을 밝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다.
일제가 중국본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상해전승기념축전을 홍구공원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에 윤의사는 민족독립과 세계평화의 이름으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또 침략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해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가 사망하고 많은 주요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일경에 체포된 윤의사는 일제 군법회의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1932년 12월19일 향년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셨다.
윤의사는 의거 후 심문과정에서 자신의 의거의 의의를 명백히 밝히셨다. “금회의 사건과 같은 것은 독립에는 당장 직접의 효과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 하는데 있다”라고 하시며 자신의 의거에 대한 냉정한 평과와 함께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분명히 밝히셨다.
윤의사의 의거는 단지 조국의 답답한 상황에 울분을 느낀 식민지 청년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사업 전개를 거쳐, 조국 광복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 각성을 얻고자 살신성인 정신으로 실현한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25세 청년으로 살아계신 윤의사의 굳은 의지, 넓은 혜안, 냉정한 자기반성은 개인적으로 본받아야할 덕목인 동시에 우리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흠모하고 따라야할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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