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풍납토성
  • 방용식
  • 승인 2011.12.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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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한반도에는 태풍과 열대성저기압이 잇따라 네 번씩 내습했다. 이 홍수로 한강 수위는 뚝섬지구에서 최고 13.59m까지 차올랐다. 하늘에 구멍 뚫리듯 내린 비로 용산은 물론 숭례문 앞까지 물에 잠겼다. 뚝섬 살곶이다리도 이때 부서졌다.

역사는 이 홍수를 을축년 대홍수로 불렀다.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유실 6000여 호, 가옥붕괴 1만7000여 호, 가옥침수 4만6000호의 피해가 발생했고 피해액만도 1억300만원에 달했다. 이 금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수준이다. 총독부는 복구를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고 한강과 중랑천·안양천·청계천 등에 대대적인 제방공사를 벌였을 정도였다.

을축년 대홍수는, 피해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한강이 침수되고 한강 변이 홍수로 유실되면서 백제의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발견됐다. 그러나 약 1500년 만에 다시 햇빛을 본 풍납토성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풍납토성이 역사유적으로서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97년 아파트 단지 공사과정에서 다량의 백제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풍납토성은 현재 동벽(東壁)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가 약 2.7km가 남았다. 그러나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 측정결과 풍납토성은 둘레 3.5km, 밑변 30~40m, 높이 15m, 넓이 26만평이다. 학계에서는 이런 성벽을 쌓으려면 연인원 100만 명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후 4~5세기 백제의 인구는 70만~80만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풍납토성 일대에 강력한 국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일부에서 풍납토성을 백제 초기 왕성으로 보는 까닭이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백제 왕성이라는 추정이 잘못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강대 강사인 이희진 씨는 그의 책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풍납토성은 도성과 왕성이 자리할 규모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럼에도 한성백제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는 쪽은 고민이 없다며 일갈한다.
11월29일 풍납토성 1차 조사 발굴현장이 일반에 공개됐다. 조사결과 3차례의 축성과 판축(版築) 공법이 확인됐고 성벽기둥도 확인돼 정확한 축성연대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풍납토성이 왕성이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지만 우리 고대역사의 더께가 한 겹 벗겨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