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제2의 인생을 살면서
<독자기고>제2의 인생을 살면서
  • 시정일보
  • 승인 2013.03.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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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모임, 텔레비전, 낚시를 좋아하는 항상 바쁜 한국 남자다. 쉬는 날에도 집에서 지내는 일이 거의 없다. 이런 아빠에게 아들이 편지를 써 왔다.

“아버지 회사 끝나면 빨리 오세요. 아버지와 놀고 싶어요. 아버지랑 노는 재미있는 꿈을 꾸어요.”

아들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편지를 읽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아들이 아빠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편지를 읽은 남편도 한숨을 푹 쉰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남편에게 나는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남편과 함께 동네 시골길을 산책할 때는 아직도 소녀처럼 가슴이 뛴다.

낮선 땅 한국에 시집와서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산 그 세월이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요즘 들어 다문화가정을 위해 나라에서 지원을 많이 해 주신다. 한국 국민여러분과 수고해 주시는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한국에 와서도 마치 고향에 온 듯이 느낌이 좋았다. 신혼살림은 시댁에서 3년 동안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다. 시부모님의 말씀은 사투리가 심해서 거의 이해할 수 없었고, 순수 한국말과 억양은 지금도 따라할 수 없어 자신이 없다.

나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한다. 한국음식은 베트남음식보다 더 맵고 짜고 맛이 강해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입맛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입맛에 길이 들 때까지 음식을 먹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시어머니에게 집안일을 배워가며 한국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1년이 지나 식구가 늘었다. 나를 제일 기쁘게 해주고 위로해 주고 힘이 되어주는 예쁜 딸이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려고 하면 시어머니가 모유보다 분유가 더 좋다고 하시면 분유병을 아이의 입에 물리셨다. 아이 키우는 게 서툰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다 소문을 내셨다. 아이가 6개월 정도 되던 때 아이에게 먹일 죽을 만들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그 어린 아이에게 과자랑 사탕까지 먹이고 있었다. 나는 속이 상했지만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니면 외국인 며느리가 하는 일이 달갑지 않아 그러시는지 여쭈어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아이를 낳고 8개월 되던 때 분가를 했다. 분가를 하면 정말 홀가분하고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순간순간 혼자라는 생각, 외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저 환하게 웃고 있는 딸아이만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시끄럽고 귀찮게 여겼던 시어머니의 간섭이 그토록 그리워질 줄은 나도 몰랐다. 시어머니와의 오해도 풀렸다. 시어머니는 손녀가 귀여워서 맛있고 귀한 것을 손녀에게 먼저 주고 싶어 하셨던 것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됐고, 시어머니께 무척 죄송했고 부끄러웠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한 것인데 나는 베트남 식으로만 해석해서 이런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모처럼 지난 시절 행복했던 순간들을 담아 놓은 가족 앨범을 펼쳐보았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은 때도 여러번 있었지만 잘 헤쳐 나왔다. 내 부모님, 시부모님,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으로 또 다른 제2의 인생을 사는 원동력이 되어준 남편과 천사 같은 아이, 이들을 통해 내가 받은 기쁨과 행복을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줄 차례가 된 것이다. 베트남 고향의 친정 부모님에게도 부끄럽기 않는 딸, 한국 땅의 내 아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