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방황 끝에 도초에서 찾은 행복
독자기고/방황 끝에 도초에서 찾은 행복
  • 시정일보
  • 승인 2013.03.2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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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로나 알마 (도초면 수항리/필리핀)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네에서 필리핀댁으로 통하는 발바로나 알마입니다. 나이는 마흔 두 살이고, 남편과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아줌마랍니다.

남편과는 친구 소개로 만나 2003년에 필리핀에서 결혼했고, 한국에 들어와 다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처음 신혼살림을 시댁에서 시작해 남편이 다니는 가구회사가 있는 경기도로 이사했습니다.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보내며 드디어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직장을 자주 옮기고 수입도 일정치 않아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다보니 한국말도 배우지 못해 더욱 외롭고 힘들 무렵 둘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둘째를 가졌을 때 저는 영어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 남편은 개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모르는 사이에 셋째 아이가 또 생겼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무작정 식구들을 데리고 목포에 있는 시댁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추석명절을 보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경기도로 다시 올라가지 못하고 짐도 가져오지 못한 상태로 편찮으신 시아버님을 간병하다 셋째 아이를 낳았고 한 달쯤 후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은 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웠는데, 시어머님은 집안에 사람이 잘못 들어와 그런다고 저와 아이들을 미워하고, 저에게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는 말도 했습니다.

힘든 날이 계속되던 차에 서울에 볼일이 있어 첫째와 셋째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다시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복지기관에 도움을 요청해 한 교회복지관에서 생활하게 됐고, 영어학원에서 일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복지관에 한 달 가량 있다 남편이 일자리를 구한 남원으로 우리가족은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선 살 집이 없어 웨딩홀에서 10개월 정도 머무르며 저는 영어학원에서 일했고 남편은 일자리를 구했으나 월급을 받지 못해 다시 목포에서 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목포로 먼저 내려가고 한 달 후 우리가족은 다시 시댁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은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나는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7개월 동안 시댁에서 살던 중 시어머니가 “너희들 따로 나가서 살아라” 하셔서 우리는 분가를 했습니다.

남편은 다른 지방으로 일을 가서 저 혼자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아이들 셋을 돌봐야 했습니다. 첫째 아이의 입학통지서가 왔고, 시어머니께 부탁하려 했지만 학교와 시댁의 거리가 너무 멀어 남편과 상의 끝에 남편의 고향인 신안군 도초면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고, 저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하고, 남편은 염전에서 일을 하고, 내 땅은 아니지만 논과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친정이 멀어 자주 갈 수 없는 나에게 이웃주민들은 엄마, 언니처럼 아이들 키우는 방법이며 한국음식 만드는 법, 살림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고 우리 아이들도 예뻐해 주십니다.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하고 즐겁게 학교에 다니고, 남편도 열심히 일하고, 나는 한국말도 더 많이 배우면서 조금씩 불어가는 통장을 보며 ‘행복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공기 좋고 조용하고 인심 좋은 도초로 들어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에 온 지 10년,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하느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나의 세 천사를 보며 견딜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은 지나고 이제 도초에서 찾은 행복을 영원히 지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