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앞/ 혁명과 ‘자유’
시청앞/ 혁명과 ‘자유’
  • 방용식
  • 승인 2013.04.1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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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3월23일. 버지니아의회 의원인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의회 발언대에 나섰다. 헨리는 이날 의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을 했고, 이 연설은 미국의 독립운동-미국혁명-을 촉발시켰다. 이 당시 영국은 1765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13개 주에 인지조례를 발표하며 식민지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1770년 3월에는 보스턴 부두에서 술을 마시던 노동자와 시비가 붙은 영국군이 발포해 11명이 총에 맞아 5명이 숨지는, 이른바 보스턴 학살사건(Boston Massacre)도 발생했다.

요즘에야 자유가 ‘별 것 아닌’ 듯하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자유는 귀족을 위한 ‘특권’이었다. 폴란드 태생 유대계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그의 책 <자유>에서 16세기말까지 “자유는 귀족적 태생이나 양육, 고상함, 관대함, 대범함 등과 동의어였다”고 말한다. 옥스퍼드사전은 ‘자유’를 어디든 갈 수 있는(1483년), 제한 없이 행동할 수 있는(1578년), 일이나 의무에서 풀려나는(1697년)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때의 자유는 고상한 자들과 명예로운 자들, 즉 귀족만이 가졌던 권리로 이해됐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가 ‘다수를 대상으로, 인민의 절대적 개념’으로 외연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선 영국의 대헌장, 권리장전, 청교도혁명, 명예혁명은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미국독립혁명은 영국왕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은 모두 더 많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혁명의 목적은 자유, 반란의 목적은 해방”이라고 정의했다.

53년 전 이맘때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궐기가 잇따랐다. 정권연장을 위해 1960년 3월15일 치러진 대통령·부통령 선거결과를 조작한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대한 전국적인 항의였다. 의거(義擧)에서 명칭을 바꾼 4.19혁명 역시 국민이 정권담당자를 뽑을 권리, 즉 정치적 자유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아렌트는 해방은 자유로 이어질 수 있으나 공적·정치적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시인 김수영(1927~1968)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했다.

내일은 쉰 세 번째 4.19혁명 기념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