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하나가 밝히는 세상
촛불 하나가 밝히는 세상
  • 시정일보
  • 승인 2006.11.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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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춘 기 논설위원



남아공의 전 대통령 만델라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한평생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마침내 세계제일의 흑백 인종차별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앞길이 환한 평등 민주국가로 탈바꿈시켰고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하였다.그런 그가 취임 직후 저소득 서민층을 위해서 자신의 급료를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는 토픽뉴스를 외신이 전한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어느 저널리스트가 이렇게 말했다. “급료가 얼만진 모르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렇게 조그마한 자선이나 베푸는 것으로 생색내는 자리가 아니다. 더 크게 멀리 보아야 한다. 멸시당하고 착취당하며 핍박받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급료 포기선언을 하는 것보다 더 시급히 역점을 두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고.
최근 우리나라의 어느 시장님도 만델라의 급료포기와 같은 선언을 했지만, 최선을 다해 다중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는 공인으로서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타인의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주위가 너무 어두우니 촛불 하나는 켤 필요가 없다’는 논리도 있고, 좀 해학적이긴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도 있다. 발이 얼었을 때 온도가 36.5℃쯤 되는 오줌을 누면 잠깐 따뜻함을 느끼긴 하겠지만, 물은 열을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다시 차가워질 것이고 도로 얼어버릴 터이므로 동상을 악화시킬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작은 마음이 마침내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말없는 한 사람의 조용한 희생이 천둥소리처럼 큰소리로 증폭되어 잠자는 만인을 깨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엔리코밀리우스 달가스는 군 제대 후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덴마크 국민들의 용기와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그 첫걸음으로 몇몇 친구를 모아 ‘히스협회’를 조직하고 황무지와 다름없는 히스가 무성한 땅을 개간하여 나무심기에 나섰고, 달가스 일당의 열성에 감동한 덴마크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황무지에 나무심기를 거듭한 끝에 거친 땅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고, 실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달가스의 자기희생적 사회봉사는 지친 국민의 마음에 불을 댕기고 사회적 진보의 동인이 된 것이다.
영국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을 듣고 터기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로 가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여 영국 국민들의 광명의 천사로 부르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보급의 집중관리에서 보여준 열정, 그리고 의료구호제도의 조직 및 간호사의 양성과 본분을 확립한 헌신적인 삶은 국제적십자운동의 선구자적 역항에 손색이 없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봉사와 헌신과 열정은 엄청난 다수의 복리와 온 인류의 행복으로까지 이어지고, 피 흘리지 않는 혁명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기도 하고 천지를 울리는 함성이 되어 멀리 넓게 퍼질 수도 있다. 그 봉사와 헌신과 열정이 지속적으로 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발휘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칭송되며 큰 감동을 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강력한 기둥 가운데 하나가 선거이다. 선거 때마다 선거관리위원회 같은 곳에서 하는 투표참여 독려 때문이 아니다. 나 하나의 투표권행사가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혁명이란 말의 의미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사건으로 기록되는 혁명은 한사람의 판단과 선택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만의 생명유지에는 성공하였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어울려 사는 세상살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으로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옛말의 뜻도 작은 촛불 하나라도 무시하지 말라는 지혜의 충고를 담고 있다. 작은 촛불하나가 온 세상을 밝히는 햇빛처럼 큰 빛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