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임종은 시집 '가벼움의 미학'...시적 의식의 아우라
서평/ 임종은 시집 '가벼움의 미학'...시적 의식의 아우라
  • 우종희
  • 승인 2020.08.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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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영 (시인. 문학비평가. 문학박사)

 

채수영 시인, 문학박사
채수영 시인, 문학박사

[시정일보] 시는 기호(嗜好)가 아니다
시인(詩人)에게 시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것일까? 이 물음은 시를 바라보는 본질의 물음이지만 의외에도 시인들이 자기 시에 대한 정리가 미흡함에서 대답을 간과(看過)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단지 좋아함의 대답이라면 이는 시에 천착(穿鑿)의 이유가 부족함이고 호사가(好事家)에 불과한 대답일 뿐이다. 그러나 시에 살고 시에 운명을 함께 하려는 혹독한 마음으로 시를 대면하는 시인과는 전혀 다른 시의 색채가 결과로 나타난다.

시는 시인의 운명이고 시와 함께 숙명의 그림자를 끌고 가는 동일체일 때 시와 시인의 상관은 서로 체온을 함께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취미로의 딜레땅트(Dilettante)가 아니고, 시가 아니면 생의 의미가 무의미하다 라는 각오를 갖고 시를 쓸 때 견고한 의식의 표현이 나타날 수가 있다.

이런 시인의 시를 만나면 향기가 있고 오래토록 체취가 따라온다. 시인의 소망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고 아름다운 시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소망은 시인의 시를 쓰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는 기호품이 아니라 숙명이자 운명의 일체화라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시관(詩觀)으로 시를 대면하는지 <시인의 말>을 들어본다.

최근 많은 시를 접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시의 본류는 서정성이라는 관념에 충실히 하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눈에 밟히는 문제들을 외면할 수가 없어 가장자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역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색과 명상의 시간 할애가 많아야 함에도 일상에 묻혀 생활하다 보니 표현의 순수성을 모색하는데 어려움으로 다가옴을 절감하기도 했다.

시의 역사는 4800년 전 서사시 「길가메쉬」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사포오로부터의 서정시의 출발에서 시는 어디까지나 서정성의 깊이를 천착하고 탐색하는 일이 본령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작금에 시와 산문의 경계가 모호한 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름이지만 어디까지나 서정성의 시는 영원한 감동의 산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장 자리를 배회했다’는 고백은 시에 대한 깊이를 찾아가는 시인의 성실한 탐구를 의미한다. 그리고 ‘순수성’을 찾아 나서는 발길에서 임시인의 시는 건강한 탐험의 길이 열리는 발성이다.

시집 『가벼움의 미학』에는 제6부 100편의 시를 수용하고 있다. 임종은의 시는 나이(44년생)의 숙성에 경험의 다양성과 사고의 폭이 매우 넓이를 갖고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광활(廣闊)하다. 손주들과의 단란한 모습을 위시해서 참혹한 전쟁의 추체험(아마도 6․25가 6살 무렵)을 펼치는 일들은 작금에 좌파득세의 치졸한 사람들의 사고와는 달리 높은 식견이 담겨있다. 시는 경험의 층을 가질 때 철학을 수용하는 길이 열리고 여기에 시적 상상력이 더해지면 진리에 접근하는 시의 위상이 밝아진다. 임종은의 시적 인상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미지의 색채-가벼움 혹은 비움
시는 이미지의 구축이라면 여기엔 시적 의장(意匠)이 함축성을 가질 때, 산문이 갖지 못한 절제와 탄력을 갖는 표현에 미적 거리가 탄생한다. 시가 어렵다는 말에는 이런 경제원리가 작동되기 때문에 언어 운용의 묘미를 터득하는 지혜가 앞서야 한다. 결국 사상이라는 그릇을 어떻게 시로 환치할 것인가는 시인의 재능을 돌아갈 것이다.

세상에는 중력의 법칙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에는 무게가 있고 이 무게는 결국 우주의 원리 속에 작동된다. 시는 엄연히 우주의 원리를 추구하고 내포하는 점에서 가장 큰 그릇이라 칭한다. 이는 시인만이 갖는 예지(叡智)를 의미한다. 앞을 바라보는 안목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평가는 시인이 곧 예지인이라는 뜻으로 돌아갈 것이다.

시인은 지난(至難)한 상황에서는 예지를 발동하여 인도(引導)의 노래를 부르고 평화로운 때는 장식의 화려함으로 살아가는 존재-시인의 운명이다. 이육사나 한용운은 일제의 엄혹한 시대에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인도자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도 무게요 무게를 가진 것도 존재의 모습이다. 심지어 바람이나 공기조차도 무게를 감지하는 것이 시인의 예민한 촉수라야 한다. 인용으로 증거를 삼는다.

“먼 길을 떠나는 여정
짐을 비우고 가랴, 채워서 가랴,
갈등 속에 흔들리다.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모순의 수레바퀴 무수히 회전시키다
결국은 가식적인 몸부림만 자리를 맴돌고

치열한 이성理性의 명분에 눌려
통 큰 결단을 미룬 채, 허공에 둥둥 띄어만 놓고 있다.
통속의 끈을 놓지 못하고

여백의 미학도, 비움의 청정함도
버림의 홀가분함도
성자聖者의 이상理想일 뿐
위선의 장막 뒤에 숨어 눈만 끔벅거리고 있다.

뇌세포의 정확한 명령체계 속에서도
엔터키를 쉽게 누르지 못하는 무기력한 영혼

얼마만큼 더 비워야
저 맑은 하늘을 닮아 갈 수 있을까?
이젠 집착의 분진 훌훌 털어버리고
포근한 뜬구름의 풍요를 닮아가고 싶다.”

-「가벼움의 미학」

비움과 채움은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수레바퀴는 비어있기 때문에 무거운 짊을 옮길 수 있고 교실은 비어있기 때문에 학생으로 채워지는 이치는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은 다시 비움이라는 불가(佛家)의 공즉색(空卽色)이나 색즉공이라는 철학의 깊이를 담고 있다. 그러니 있음과 없음은 모두 허무요 이런 탄식은 성인들이 이미 설파했다.

임 시인은 여정의 시작을 의문부호로 시작한다. 즉 ‘길을 비우고 가랴.’ ‘채우고 가랴’를 물으면서 모순의 수레바퀴를 회전하면서 일생을 살았다는 상징이 앞장서고 결국은 몸부림만 자리를 맴돌고’에서 허망한 자취를 인식한다.

사는 일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찾는 일은 철학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그러나 종내는 아무것도 없는 허망 앞에 사라지는 존재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이러하매 ‘허공에 둥둥 띄어만 놓고’의 서글픈 고백이 나오지만 이는 시인만의 현상은 아니다.
인간은 궁극에 모두 같은 궤도를 지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얼마를 더 비워야/ 저 맑은 하늘을 닮아갈 수 있을까?’의 물음 앞에 처연(凄然)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이리하여 마지막 소망은 포근한 ‘뜬 구름의 풍요를 닮아 가고 싶다’의 원망형이 마침표로 다가든다

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 생애를 면벽(面壁) 수행하는 스님들도 비움의 방도를 알기 위해 일생의 화두로 삼지만 종내는 허접한 육신의 태움으로 마치는 일이 인간사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이 그렇더라도 찾아 나서는 길을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종점에 이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임종은은 詩集 제목에서 철학의 깊이를 찾아가는 길을 발성(發聲)하는 점에서 의미의 층계를 높인다. 비어있음은 위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에 해당한다.

마침표 앞에서
한 사람의 시인은 한 가지의 우주를 소유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곧 우주를 포괄하는 질서의 개념도 들어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확장된 시선도 보인다. 이미지 구축이나 언어 탄력의 중심을 잡을 때, 시적 무게는 한층 고도한 세련미를 갖추어야 할 것이지만 투박한 묘미 또한 임종은 시만의 독특한 표정이고 그가 갖고 살아온 생의 무게가 더욱 고귀한 정서의 표출에서 진중하고도 사고의 건전성이 노래로 다가오는 길이 넓고 굵은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