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인문학산책/음식문화와 감성
시정인문학산책/음식문화와 감성
  • 임경렬(한국천연염색박물관 관장)
  • 승인 2023.02.20 09:17
  • 댓글 0

임경렬(한국천연염색박물관 관장, 시인)
임경렬 관장
임경렬 관장

[시정일보] 인간이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의식주는 필수적인 요소다. 특히 인간이 생명을 지탱해 가는 데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식생활일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문화의 변천에 따라 음식 생활도 달라져 왔다. 수렵 도구의 발달과 농경사회의 발전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식생활의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강에서 산으로, 산에서 들판으로, 어류에서 육류로 그리고 곡식과 채소와 과일 등 풍부한 먹을거리를 채취하고 생산한 것이다. 요즘에는 식품 재료의 조리 방법과 다양한 첨가물에 따라 같은 음식도 섭취 방법과 영양성분이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음식에 대한 몇몇 기억과 추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가정과 사회에서 접한 많은 종류의 음식 중에서도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오는 손맛의 기억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이것은 음식 맛에 더한 그분들의 사랑이 흠뻑 담겨있어서 더욱더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머릿속에 남겨진 음식과 관련한 많은 추억 중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는 기억을 돌이켜 본다. 외면하고픈 이별이 찾아와 감성을 깨운다. 옛 시절이 그리워지는 오늘, 지난 긴 기억의 시간을 소환한다.

고모와 어머니는 석쇠 구이 불고기를 좋아하셨다. 어렸을 때 석쇠 위에 돼지고기를 펼쳐 짚불로 익혀서 먹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익힌 고기를 상추로 쌈하고 집에서 만든 토종 된장을 보태 김치와 같이 먹었던 맛은 오래도록 침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맛의 기억을 다시 느껴보고자 광주와 인근 지역의 맛집으로 소문난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곡성군 석곡면에 있는 흑돼지구이, 담양군에 있는 돼지갈비, 광주공원 앞 광주천 건너편 골목의 석쇠 구이, 나주와 영산포에 있는 연탄구이, 무안군 몽탄에 있는 짚불 구이 등 당시에 여러 맛집이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여러 음식점을 차례대로 찾아서 막내 고모와 함께 맛 기행을 다녔다. 나는 87년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소유하였다. 교통수단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승용차가 있었기에 여러 곳의 석쇠 구이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식성이 좋아서 어느 집 불고기든 다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모는 영업집마다 음식 맛이 다르다며 특별한 한 곳 음식점의 석쇠 구이를 좋아하셨다. 고모의 입맛에 가장 맞던 그 집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찾아갔다.

어느덧 세월이 거침없이 흘렀다. 2010년 어느 날, 단골집 석쇠 구이를 드시는데 예전 같지만은 않은 고모의 모습을 보면서 다소 걱정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70세가 넘은 고모의 건강이 염려된 것이다. 그때 지었던 시 「석쇠 한 판」을 옮겨본다. 나의 시집 『쓸쓸한 파수』에 실려 있다.

고모와 조카가 마주 앉는다

숯불은 화덕 속에서 활활거리고

뻘건 살이 석쇠 위에서 누릇누릇 익어 간다

째깍째깍 초침은 쉼 없이 전진한다

자글대는 고깃덩이들

푸른 옷 입혀 입속을 채우는데

흔연한 이야기는 세월을 되돌린다

그 조카 여섯 살 되던 해

활옷 입고 연지곤지 찍으셨지요

꽃가마 따르던 두리하님

그 뒤에 몸 숨겨 울먹이던 조카는

어느덧 지천명이 되었네요

석쇠 한 판 추가하니

입맛 없다 그만 먹자 하신다

앨범 속 당신은 세월을 삼키는데

연로하신 고모님

백수는 누리셔야지요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열어 본다. 힘겹게 몇 글자 써놓고 클릭 한 번 못했다. 아니다. 스스로 외면하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 감성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 무어라고 써야 할까, 그 실마리의 시작을 찾아내지 못해서다.

10여 년 전 고모의 칠순 즈음에 지었던 시에서처럼 석쇠 구이 불고기를 드시며 말했던 “입맛 없다.” 하셨을 때, 입맛을 되찾아 백 세까지 누리시라고 했던 바람을 적어야 할까. 그러나 그때 그 마음속에 가졌던 간절하고 깊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모는 82세를 일기로 2021년 1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은 당면한 현실이 나를 가두는 아픔으로 찾아왔다. 야속할 만큼 조급하게 그리고 갑작스럽고 피할 수 없게, 피해 가지도 못하는 냉정한 현실로 찾아온 것이다.

내 가슴 깊숙이 한 부분에 늘 휴화산처럼 머물러 있던,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돌이켜지지 않고 되돌릴 수도 없는 영원한 헤어짐, 그 출몰이 갑작스럽고 무겁게 나에게로 닥쳐왔다.

청년기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나에게는 여러 헤어짐이 있었다. 어느 삶이나 누구의 인생에서나 필연적으로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지만 시기별 편차가 있다.

아픔도 스스로 다독이며 극복하고 또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시간이 필요해서이지 않을까.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예외를 적용했다. 통례적이고 보편적인 일상을 적용하지 않았다.

젊음을 꽃피우며 튼실한 열매를 맺기도 전에, 아주 이른 시기에 힘겨울 만큼 무겁게 연이어 몰려왔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1979년부터 1986년까지 기간에 모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장손인 나는 정신이 없었다. 지인들이 찾아와 조문하고 위로하며 이번에는 누가 돌아가셨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마다 고모는 버팀목이었다. 고택의 주춧돌처럼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지켜줬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스스로 감당하고 스스로 극복해야 할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되돌릴 수도 없는, 다시 찾아온 영원한 이별이다. 한겨울 한파와 함께 찾아온 매서운 현실, 마음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탈한 현실이다.

운명이라는 것, 나에게만 냉혹한 것일까. 머릿속 생각이 엉키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힘들지만 애써 담대해져야지 하고 가슴을 억누르고 기억세포를 역순으로 배치해 본다.

그러나 나의 기억 세포의 순리와 섭리로는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고등방정식처럼 풀 수가 없다. 감정의 계량이 측정되지 않는다. 수십 년 전 무엇이 급했는지 세상을 일찍 외면한 어머니. 그 어머니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같이 살았던 나의 막내 고모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고모 세 분은 유달리 친정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 씨족사회에서도 소문난 친정에 대한 무한 사랑이다. 고모들은 할아버지의 딸이라는데 항상 큰 자부심으로 사는 분들이었다.

시집가기 전 처녀 때 그렇게 엄하고 무서웠던 할아버지인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가르침의 결실에 스스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늘 말하였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개혁청년회를 창립하여 강령을 ‘민족의식 고취, 자립정신 함양, 문맹 퇴치, 봉건 타파’ 등으로 정하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구체적 실행으로 독서회, 웅변대회, 연극 공연 등 지속적인 문화 활동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4년 중추절에 반일 공연 중 친동생과 함께 8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6년 후학 양성을 위해 민립 회진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육성했으며, 씨족의 대표(도유사)를 맡아 선조들의 많은 선양사업을 이루어내고 봉사하며 일생을 지내셨다.

내가 회진 고향 집(덕효당)에 살 때는 전국에서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항상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매일 먹었던 다양한 모양의 다식, 약과, 정과, 산자, 수정과, 식혜 그리고 담근 술 등등이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같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할머니가 가장 즐겼던 황실이 요리, 참기름 바른 김구이, 조기구이, 낙지요리, 생조기탕, 복지리 등 지금도 복요리를 제외하고는 어릴 적 그 맛 기억이 생생하다.

막내 고모는 내가 6살 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고향 나주를 떠나 광주로 전학을 왔다. 당연히 생활하는 곳은 고모 집이었다. 무엇이 되겠다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어른들의 결정에 떠밀려 왔다.

8년여 만에 광주에서 다시 만나 고모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낸 기간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막내 고모와 함께 지냈다. 고모의 영역 내에서 지도를 받고 배우면서 성장한 것이다.

그 당시 대도시인 광주는 여러 면에서 참 좋았다. 새로 접하는 도시 생활에는 놀 곳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초등학교 방학 때면 매년 고모 집이 있는 광주에 와서 놀다가 갔었다.

충장로와 사직공원과 광주공원 그리고 공원 광장의 동백식당에서 먹었던 국밥의 추억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당시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공부하라는 성화와 통제에서 벗어나 느끼는 그 자유를 중학생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고향 나주 회진에서 5살 때부터 광주로 전학 온 중학교 때까지 계속해서 개인 과외를 받았다. 어릴 때는 숫자와 한글 깨우치기로 시작하여 초등학교 때는 기초적인 한자와 영어 읽히기 등 현시대에도 성행하고 있는 문제의 선행학습이었다.

당시 마을에는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상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인척 관계의 사람이 있었다. 그분에게 과외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참 동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계곡으로 강변으로 몰려다니며 신나게 뛰고 놀면서 보내야 할 시기였다. 산딸기와 정금과 삐비와 소나무껍질과 개복숭아와 밥칙 등을 직접 채취해보지도 못하고 동무들이 가져와서 주는 것만을 먹어봤다.

집에서 먹는 어떤 것보다 맛있고 특별했다. 그런 재미있는 일상을 그렇게 체험해보지도 못하고 소년 시절을 지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크다. 통제받았던 고향에서의 생활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많지 않다. 대부분 추억은 광주의 중학 시절부터 쌓여 있다.

중고등학교 때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추종하려는 어머니는 잊지도 않고 때맞춰 광주에 교대로 오셔서 꼬박꼬박 성적표 검사를 하였다. 고모는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이유를 만들어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지 않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나의 영원한 우군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0년, 5‧18항쟁 때 일이다. 5월 16일 늦은 오후에 나주로 내려가 당숙모를 모시고 심야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서울에는 당숙모네 딸을 비롯한 친척들이 사는데 급작스러운 사고가 생겨서다.

5월 20일, 광주는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이었다는데 서울에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언론을 통제하여 TV 화면에는 시민이 계엄군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장면만 보여주고 있었다.

믿지 않았다. 5월 16일 오후까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평화적인 집회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나는 목격했고 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주로 돌아가려고 했다.

조카가 서울에서 광주를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유동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앞만 보고 걸어서 겁 없이 다녀왔던 41세의 고모. 평소에 정 다음으로 겁 많던 분이다.

고모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훗날 돌이켜 말하였다. 조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스스로를 이겨낸 용기이다. 그때 목격했던 잔혹한 현장을 오래도록 되새기며 신군부를 규탄하고 민주시민이 되었던 고모.

1986년 4월, 내가 결혼하는 날까지도 미덥지 못해서 세심하게 챙기던 우리 호랑이 할아버지의 막내딸이다. 작년 연말에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다.

머지않아 코로나19가 퇴치되면 보자며 만남을 애써 피하셨다. 그러더니 한마디 남긴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다면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갑작스럽게 당신의 부모 곁으로, 올케 곁으로 떠나면서 남아 있는 나에게 무슨 말이든 하셔야 하지 않았을까. 영정 사진 속 모습을 바라본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계신다.

딸들이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픈 눈물을 흘린다. 위로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슬픈 현실에 나는 객체가 아닌 또 다른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는 석쇠 한판의 추억이 아쉽고 슬픈 기억으로 오래도록 가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