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름길
기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름길
  • 임양성/ 해드림 재활주간보호센터 이사장
  • 승인 2023.03.0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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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양성/ 해드림 재활주간보호센터 이사장, 칼럼리스트
임양성
임양성

[시정일보]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 무렵이었다. 마당가에 있는 수돗물에서 아침저녁으로 세수를 할 때마다 바라보았던 무등산으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가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가는 무등산 산행이었지만 당시 교통편을 이용할 형편도 되지 못하였고 또 매일같이 바라보는 산이라서 큰 부담감 없이 정상 정복이라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이른 아침 출발하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땀을 뻘뻘 흘리며 한나절을 걸어 무등산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4수원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등산은 왼쪽에 위치해 있는데 도로는 오른쪽 산 밑으로 한참을 돌아서 가도록 길이 있었던 것이다.

멀리 보이는 도로를 따라서 걸어 가야 할지 아니면 무등산 방향으로 왼쪽 산길을 접어들어야 할지 논의를 하다가 젊음에 거리를 단축할 욕심으로 좌측 산길로 들어서서 직진하기로 하였다.

산길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가시덤불이 우거지더니 아예 길이 사라져 버리고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우거진 숲속이었다. 몇 걸음도 못 들어가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우리는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각인되었다. 지름길 등산로는 직진하는 산길이 아니라 비록 먼 길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여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만들어진 길은 그 이유가 있는 법.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여 만들어진 현재의 도로가 가장 안전하고 빠른 최선의 지름길이라는 결론이다.

우리 인생에서 행복으로 가는 최선의 지름길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만들어진 길이 산행의 지름길이라면 우리가 찾는 행복의 길도 인류가 선택하여 오랫동안 살아왔던 방식이 바로 삶의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삶의 기초를 준비하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낳아 키우며 노후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 삶의 방식이 대다수 인류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후손들이 번성하였으며 숭조(崇祖)와 애족(愛族)을 실천하는 마음을 지니며 살아왔으니 행복이 그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여 살아왔던 이러한 삶의 방식이 바로 행복한 삶을 사는 지름길이 되었음을 생각해 본다.

근래 매우 염려스럽게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독버섯이 있다. 결혼을 기피하여 새 가정을 만들지 않고, 후손들 또한 날이 갈수록 감소하여 가고 있어서 숭조(崇祖)와 애족(愛族)을 실천하는 마음 또한 퇴색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 염려스럽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거의 집집마다 있을 정도이니 부모세대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넘쳐난다. 비혼 자녀들이 놓고 쓰는 말이 혼자서 사는 생활이 편하고 행복하단다. 그동안 가정을 통해 만들어져 왔던 우리 행복한 삶이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독신주의자들에 의해 단절될 것 같다는 염려는 비단 기우에 불과할까.

바라건대 인류가 살아왔던 행복의 지름길 방식을 벗어났다가 오래지 않은 세월 뒤에 후회하는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름길을 벗어난 무등산 산행은 훗날 다시 도전할 수 있었지만, 우리 인생은 재도전의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을 생각해 본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론은 늘 머릿속에서 맴돌던 화두였다.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를 눈앞에 둔 지금 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평범하게 말해지지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단어 ‘근면과 성실, 희망’이라는 세 단어를 말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법으로 회자하였고, 나 또한 내 삶의 방법으로 선택하여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하였으니 이 세 단어가 내 삶을 살아왔던 방법으로 내세우고 싶다. 산행에서 지름길을 선택한 뒤에 쉬지 않는 발걸음과 정상(頂上)에 오르리라는 희망이 필요한 것과 같지 않겠는가?

무애(无涯) 양주동 박사도 말하였다. 성인(聖人)들께서 하셨던 말씀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던 내용들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음을 보았다고. 근면과 성실,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도 너무도 많은 선현들께서 인생을 살아갈 좌우명으로 말씀하셨던 것이지만 나 또한 충분하게 공감하는 삶의 등댓불이 되는 단어이었다.

성실(誠實)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태도이자 사람의 자질 즉 됨됨이를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성실한 사람은 매사에 진실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이는 삶의 기본 덕목으로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성공적인 삶이라는 결실도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삶의 자세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필수조건이 된다.

기본 자질을 갖춘 인간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제자 재여(宰予)에게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朽木不可彫), 썩은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 손질을 할 수 없다.(糞土之墻不可圬)”고 하셨다.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마치 썩은 나무나 흙처럼 중요한 용처(用處)에 사용될 수 없다고 비유법을 써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고, 뛰어난 학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실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가 물려받은 소유물들을 탕진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반면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힘든 생활에서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만족스런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성실한 사람은 하늘의 무지개를 좇는 듯한 허황된 목표는 세우지 않는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작은 것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 성품을 갖는다. 아무리 뜻을 높고 크게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천 리를 한걸음에 내닫는 발걸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리 급한 성격으로 답답하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천 리에 도달한다.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쌓은 탑은 높이 오를 수 없으며 공든 탑이 될 수 없다.

근면(勤勉)은 문자 그대로 부지런함을 말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근면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보통 성실과 근면은 두 단어가 합해져서 사용되는데 근면한 사람이 성실하지 않을 수 없고, 성실한 사람이 또한 부지런히 일하는 근면함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근면 성실’이라는 말로 함께 사용된다.

무엇보다 게으른 사람은 기회를 얻지 못하며 설사 기회가 눈앞에 왔다 하더라도 이용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린다. 게으른 사람은 손은 놔두고 생각과 눈으로만 일을 한다. 손은 묶어놓고 눈으로만 일을 하니 일이 진척될 리 있겠는가?

옛 속담에 ‘눈은 게으르고 손은 부지런하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보기에 엄청나게 많은 듯싶었던 일도 막상 착수하여 처리하다 보면 끝이 나게 마련이다는 뜻이다. 성공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과일이지 게으른 사람에게 돌아갈 여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부지런한 사람은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서 준비를 한다. 때문에 부지런한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다. 반면 게으른 사람은 일이 닥쳐서야 준비하기 때문에 막상 기회가 왔을 때는 이를 살리지 못한다.

기회를 맞이했을 때 자신에게 기회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여부가 곧 성패를 가른다. 시험 날짜가 닥쳐서 시험공부를 시작하는 학생은 결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 학습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시간에 빠듯이 쫓기거나 아니면 몸 컨디션이 갑자기 받쳐주지 않아 힘이 들거나, 불가피하게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는 의외의 사단들이 꼭 발생하여 시험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반면 평상시에 학습 준비를 잘하고 있었던 학생에게는 바쁠 이유가 없으며 서두르는 법이 없이 준비된 상태로 시험을 잘 치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이치는 모두 같다. 평상시 저축을 하지 않아 자본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좋은 투자거리가 생긴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평소에 기술 습득이나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기업들의 수많은 구인광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통장에 두둑이 잔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좋은 투자처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본을 준비한 만큼 투자의 기회는 많아질 것이며, 전문기술의 습득 여부가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가 될 것이니 준비라는 과정이 성패를 가르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발명왕 에디슨이 발명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 말도 근면함과 상통하는 말이다. 공부든 일이든 노력을 한다는 것은 바로 부지런함을 일컫는다. 공부든 일이든 시간이 부족한데 언제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있겠는가? 열심히 도는 물레방아는 얼 새가 없다고 하였다.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는 강추위 속에서도 얼지 않는다는 속담인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너무도 짧고, 또 허망하게 흘러가 버린다. 10년 세월은 분명 긴 시간이다. 그러나 지나가 버린 10년을 돌이켜 볼 때 무엇을 하였는지조차 딱히 기억에 남은 일이 없이 흘러간 덧없는 세월이다.

덧없는 10년 세월을 불과 서너 번 지나고 나면 은퇴할 나이가 되고 한평생이 의미 없이 가버린다. 사람들은 빠른 세월과 인생의 짧음만을 한탄한다. 오죽하였으면 95세까지 살았고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였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묘비명으로 새겨 넣으라고 했다 하지 않는가.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고.

일할 시기에 열심히 일한 개미와 빈둥대면서 일할 시기를 놓쳐 버리고 겨울을 맞이한 베짱이 이야기. 사람에게는 언제든 어려운 위기의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위기에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려움을 맞이한 사람이 바로 동화에서 말하는 베짱이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공부도 사업도 모두 열심히 준비해야 할 시기가 있다. 게을러 준비할 시기를 놓치고 난 뒤 어려움이 닥칠 때 크게 후회하게 된다는 교훈이 아닌가. 동양의 스승 주자(朱子)께서 생활 속의 사례들을 모아 10가지로 간추려 ‘주자 십후회(朱子十後悔)’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어렸을 때 공부하지 않은 것, 여유가 있을 때 절약하지 않은 것, 그리고 봄에 씨 뿌리지 않은 것, 부모님 계실 때 효도하지 않은 것 등등의 내용이다. 모두 준비해야 할 시기를 게을러 놓치면 후일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경구(警句)들이다. 이 준비해야 할 시기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자세가 바로 근면이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성실과 근면이 사람 됨됨이의 기본 자질을 말한다면 희망은 됨됨이를 갖춘 사람이 성공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동기 부여라고 하겠다. 희망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난관이 닥친다 해도 이를 견디어 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아무리 근면과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희망을 갖지 못한 삶이라면 성공의 도달이 빛바랜 목표가 되고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쉽게 포기해 버린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권운동가이며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는 1964년 44세에 감옥살이를 시작하여 1990년 71세에 이르는 무려 27년 동안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혹독한 감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그는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남아공에서 흑백 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철폐하였으며, 1993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7년간이나 감옥에 있었던 동안 가족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보통의 사람들은 절망하여 죽었거나 정신이상자가 되었을 것이나 그는 그 긴 세월을 굳굳하게 잘 버티었다. 어느 날 큰딸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면회를 왔다.

큰딸이 "아버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이렇게 말하자 만델라는 땟국물이 찌든 종이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 종이에는 그 유명한 “Azwie”(아즈위: 희망)라고 하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의 언론들은 그를 가리켜 ‘인간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놓은 사람’이라고 존경을 드렸다. 만델라는 회고록에서 그렇게 오랜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힘이 "위대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희망(Azwie 아즈위)을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희망이 위대한 인간 승리의 만델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요즈음 우리 언론에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젊은 청년들이 이 땅에서 자조적(自嘲的)으로 절망하며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단어이다. 여기에 카푸어(carpoor),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 빚투(빚내서 투자한다), 벼락거지(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급격히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 등 신조어가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하고 있다. 모두 헬조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뉴스에서 20·30대 젊은 세대가 자신의 소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수입차를 구입해 타고 다닌다는 ‘카푸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원룸에 사는 한 택배기사가 월 3백만 원 정도 수입을 갖는데 2억대 포르쉐 차량을 구입한 후 거의 모든 수입을 할부금으로 지출하며 식사비조차 아끼려고 라면 등으로 때우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신세대들은 자신이 만족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면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제법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까지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었다.

비싼 차, 명품 가방, 해외여행 등 과잉소비의 행태에 대한 원인이 빈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 탓의 결과 자신은 부유한 계층에 도달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도전을 포기하고 순간을 즐기자는 삶의 태도가 반영된 소비행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결혼과 출산조차도 포기한 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이나 소유하고 싶은 것들에 올인하여 소비하는 형태가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심리 현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현상이 우리 젊은 세대들이 갖는 보편적 가치관이라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상식을 벗어나는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아무리 현재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황금 같은 청춘의 시간들을 고급 차나 명품백 따위의 뒷바라지와 맞바꿀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고급 차를 타고 명품백을 둘러메면 자신의 삶이 부유층들과 같이 럭셔리해 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이들이 미래의 희망을 상실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힘들게 번 돈을 모두 쏟아붓는 소비형태나 결혼과 출산조차 포기해 버린 삶은 미래의 희망을 상실한 모습이 분명하다.

희망을 가슴에 품지 않은 삶은 의욕이 넘치는 생활이 될 리 없으며 의욕이 상실된 생활은 우울증으로 삶의 매력조차 상실한 채 살아간다. 선진국 38개국(OECD)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삶의 만족도가 가장 뒤처진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알려져 있음은 매우 가슴 아픈 현실이다.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이라면 아무리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이라 하더라도 미래를 바라보며 살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희망은 오늘의 힘듦이 미래의 성공이라는 밑거름이라 여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고 오늘 현재에 절망하는 생활을 살지 않는다. 희망은 삶에 활기를 공급해 주는 윤활유와 같기 때문이다.

근면과 성실, 그리고 희망. 이 세 가지 덕목(德目)은 힘든 시대를 살아왔던 기성세대들의 좌우명으로만 존재하는 전유물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우리 미래 젊은 세대들에게도 변함없이 받아들여지는 인생 지침으로 가치가 충분하다. 나는 내 후손들이 인류가 선택하여 살아왔던 지름길을 걸으며 근면과 성실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가슴에 가득 담고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