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청기고 / 민주주의로의 갈망 ‘5·18 민주화운동’
보훈청기고 / 민주주의로의 갈망 ‘5·18 민주화운동’
  • 이인섭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 승인 2023.05.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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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섭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이인섭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이인섭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시정일보]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광복을 맞이하고 혼란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우리나라는 국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부 독재자들이 나타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여러차례 위기를 맞이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사망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민주주의를 애타게 바라던 국민들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한 것을 걱정하며, 이를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 절정에 이르렀고 전국각지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외침이 퍼져나갔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시민의식이 깨어있던 학생들이 주도해 시국성토대회를 연일 개최했으며, 도심으로 나아가, 일반시민들과 대규모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고,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던 이러한 집회와 시위는 5월16일까지 계속됐다.

확산되는 시위에 신군부는 군대를 투입해 집회와 시위 진압을 계획했고, 17일 공수부대 투입명령을 내렸다. 이에 시위를 해산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5월18일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의 해산 시도에 결국 충돌이 발생했고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

추가로 파병된 군대는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했으며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계속된 계엄군의 추가와 발포까지 이뤄져 사상자가 급증했으며, 시위는 전남 지역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5월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써 ‘민중자치’를 실현했으나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시민군 다수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인 할아버지의 만행을 대신해 사죄하고 직접 당시 희생하신 분들의 묘소를 방문해 묘비를 닦는 등 가슴 깊은 뉘우침을 했고, 남은 유족들께도 사죄를 청했다. 이에 많은 유족 및 피해자분들이 그의 사죄를 받아주며 조금이나마 그분들께 위안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정착한 곳이 없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일반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이뤄졌고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내외 정세가 혼란한 시대인 만큼 나라의 근본인 국민의 일원으로서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모두가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