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창 #6 천생연분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무원의 창 #6 천생연분까지는 아니더라도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5.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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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났음에도 ‘불법건축물 이행강제금’을 체납하고 있는 분이 있었다. △△동의 ‘빅 마우스’로 눈썹이 숯과 같이 진한 분이셨다. 그분은 직원들 사이에선 ‘괴물’로 통용되었다. 수년간 송사를 하며 민원을 반복해서 제기하여 붙은 별칭이다.

관련 사안을 꼼꼼히 살펴본 후 담당자와 함께 그분의 집에 찾아갔다. 가족들과 한 시간가량 얘기를 나누었다. 이후 나는 2차례 현장과 구청을 오가며 그 건을 살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이행강제금이 잘못 산정되어 과도하게 부과된 부분이 있었다. 감액해 드리자 나에 대한 믿음이 쌓였는지, 서울시청까지 쫓아다니던 그분이 내게 호소했다.

집에서 여기까지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 이제는 허리도 망가졌고 몸도 성치 않은데 매일 이 지경이라며 한숨을 뱉었다. 그분을 댁까지 차량으로 모셔다 드리는데, 그는 감액 또는 탕감을 호소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순간 고지가 눈앞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연을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5층짜리 다가구 주택의 5층이 불법이었다.

“4층까지는 정상적으로 준공검사가 났고, 시공업자는 구청에서 5층은 증축으로 준공검사 해 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허가부서에서 약속을 어겼어요.”

내가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법원도 선생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잖아요. 혹시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내가 꼬치꼬치 캐묻자,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살았습니다. 시공업자에게 당했어요. 시공자가 설계 등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준다고 하기에 돈을 줬지만 막상 일이 터지니 법정에서 자기는 시공 안 했다고 하고, 당시 시방서·계약서 등은 찢어 버린 후라서 판사가 계약 근거를 제시하라고 하는 데도 제시 못 했습니다.”

소송은 이미 완전히 종결되어 만약 체납처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공매까지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체납된 3,700만 원을 3회에 걸쳐 완납했다.

불법건축물 단속이나 무허가 노점 단속과 같은 업무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업무의 특성으로 인해 나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보다 적대감으로 찡그리고 노려보는 얼굴을 더 많이 만났다. 불법을 저지른 이가 오히려 “돈 받은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단속이야!”라며 삿대질을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욕설을 퍼부을 땐 정말 복장이 터진다고나 할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엔 부모에게 버림받아 평상 따돌림당하고 살아왔던 ‘동백’이라는 여성(공효진 분)이 등장한다. 그녀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마을 기차역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녀가 선망하는 직업은 철도공사 유실물센터 직원이다. 그녀에게 유실물센터 직원은 물건을 잃어버려 가슴을 졸이던 이들에게 언제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물건을 찾았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직업이다.

아마도 이 장면을 보면서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콜 센터 직원과 같이 감정노동을 하며 고객의 분노와 욕설을 끝없이 감내해야 하는 이들.

내가 닥친 분노는 주로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라기보다 오래 묵은 적대감과 증오심 같은 것들이었다. 불법을 바로잡으려는 공무원과 그 ‘시정’으로 인해 자기 삶이 흔들린다고 믿는 이들. 하지만 만남이 그렇듯 사람마다 결이 있고, 또 극악할 것 같은 상황에서의 어떤 만남은 묘하게도 유순하게 흘러가곤 한다.

별것도 아닌 일로 직원을 쥐 잡듯 괴롭히는 민원인이 어느 날 나의 대수롭지 않은 행동으로 유순해지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사람마다 맞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나는 천생연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연이 시작되는 곳에서 좋은 인연의 씨앗이 뿌려지는 경험을 꽤 했다.

마케도니아의 군주 알렉산드로스는 당대의 폭마(暴馬) 부케팔로스를 단번에 길들였다. 부케팔로스는 사람까지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난폭하고 힘이 좋은 말이었다. 마케도니아의 맹장들이 나섰지만 모두 이 말을 길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가 무섭게 날뛰는 이유를 ‘두려움’이라고 보았다. 해를 등지고 다가오는 이의 그림자를 보고 흥분했다고 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손길이 닿자 부케팔로스는 잠잠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의 처지를 살폈고,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교감하며 순명했다. 그의 나이 12세였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나중 부케팔로스가 죽어 매장한 땅에 ‘부케빌리아’라는 이름을 선사해 추모했다고 한다.

영웅의 곁에는 항상 명마가 있었다. 트로이전쟁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의 신마(神馬) 크산토스, 나폴레옹의 마렝고, 항우의 오추마,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고선지에게는 청총마가, 적토마(赤兎馬)는 동탁, 여포, 조조, 관우, 마충으로 이어졌다. 조조에게는 또 다른 명마, 발굽이 노랗고 번개처럼 빠르게 내달렸다는 ‘조황비전’과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렸다는 ‘절영마’가 있었다고 한다.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갈아엎은 조선의 국부 이성계에게는 ‘유린청’이 있었다지.

업무를 위해 달린 곳을 전장으로 친다면, 나의 애마 페가수스는 대우 르망 GTE일 것이다. 1995년 의정부의 K 선배가 물려준 산전수전 다 겪은 연로한 백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