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8 돼지 새끼 한 마리
시정 인문학광장#8 돼지 새끼 한 마리
  • 이재영 ㈜뉴런 대표이사
  • 승인 2023.06.0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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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이재영

[시정일보] 장남의 외동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방글방글 웃으며 제 엄마 손 잡고 입학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나 보다. 내 후손의 맏이가 그 긴 세월 동안 무탈하게 소정의 과정을 잘 마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으니, 온 가족이 졸업식에 참석하여 기념사진을 찍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6학년에 올라간 작년 연초부터 괴질 ‘코로나 19’가 극성을 부렸다. 사이버 가정 학습으로 새 학기를 시작하더니, 한 학기가 다 지나서야 겨우 일주일에 두세 번 학교에 나가서 정상적인 대면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연말에 하루 감염 확진자가 1천 명을 넘어서는 ‘3차 대유행’이 시작되고 학교에는 다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번지더니 급기야 졸업식도 집에 앉아서 비대면으로 하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호스트가 되고 학생들은 게스트가 되는데, 교장 선생님도 정해진 시간에 해당 학급의 ‘줌’에 게스트로 들어가 함께 졸업식을 치른다고 한다. 인사말과 축사 등이 끝나면 손뼉을 치고 웃으며 졸업식 노래를 부르는데, 유명한 그룹 015B(공일오비)의 국민 엔딩 송 ‘이젠 안녕’이 축가라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자, 57년 전 내 국민학교 졸업식 장면이 떠올랐다. 강당에 모인 5학년 후배들이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라고 먼저 불렀다. 그러면 졸업생 6학년은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우리는 떠나갑니다...”라고 답가를 부르며 훌쩍훌쩍 눈물을 닦았다.

아울러 그때 졸업식을 회상하면 꼭 기억나는 다른 추억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돼지 새끼 한 마리”이다. 6년 개근상과 학업 성적 우등상, 교육장 상 등을 주고 나면 마지막으로 특별상인 국회의원상이 수여되었다. 공부는 매우 잘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 한 명을 골라서 그 지역 국회의원이 주는 상이었다.

그런데, 사회를 보는 선생님이 “부상은 돼지 새끼 한 마리!”라고 말하자 모든 학생이 까르르 웃었다. 상을 받는 김광휘라는 친구에게 격려의 손뼉을 치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37년이 흐른 2001년 5월에 우리 53회 졸업생이 주관기가 되어 모교에서 개교 106주년 한마음 큰 잔치 행사를 치렀다.

내가 다닌 진주(중안) 초등학교는 1895년에 개교했는데,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로 꼽히고 있다. 내 아내가 5·6학년 같은 반이었고 나는 6학년 때 전교 어린이 회장을 지냈던 터라, 수원에 살던 우리 부부는 부득이 시간을 내어 함께 내려갔다. 행사 전날 밤에 졸업 후 처음 김광휘 그 친구를 만나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너, 졸업식 때 돼지 새끼 한 마리 받았지?”

“응, 맞다. 기억하고 있네.”

“그 돼지 새끼 키워서 많이 불렸더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당황한 광휘가 머뭇거리자, 다른 친구가 대신 대답했다.

“광휘 야는 지금 돼지는 둘째고, 소를 수백 마리나 키우는 갑부다. 흐흐.”

“그래? 축하한다야. 너는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진심으로 광휘 친구의 발전을 축하했다. 그날로부터 14년 후에 광휘는 당당히 진주 축협 조합장에 취임했다. 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꿈꾸는 제일 높은 자리다.

졸업식 날 부상으로 받은 돼지 새끼 한 마리로 시작한 소년의 원대한 꿈이 5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내 손녀에게도 졸업 선물로 ‘돼지 새끼 한 마리’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겠다 싶어, 연하장을 하나 샀다. 일간지에서 본 어떤 기사를 인터넷 신문에 들어가 연하장 속지 크기에 맞게 축소해 출력했다.

내용은 수를 세는 방법 중 말로 부르는 ‘명수법’인데, 억 단위 이상의 큰 수의 명칭이 설명되어 있다. 억 다음은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수로 이어진다. ‘항하사’는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은 엄청나게 큰 숫자이며, ‘무량수’는 10의 68승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이다.

연하장 안에 접어 넣고 속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착한 규리가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구나. 축하해요.” 아래 칸에는, “새봄에 중학생이 되면 국내 제일의 AI 교수가 될 멋진 대학생을 꿈꾸며 다시 6년간 노력하자꾸나. 할아버지가.”라고 썼다.

작년 설에 언뜻 장래 희망에 관해 손녀에게 물었을 때, 제 아빠가 대신, “규리는 구글에 입사하겠대요.”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었다. 구글(google)사의 원래 이름은 구골(googol)이었는데 회사 이름을 등록하러 간 사람이 구골의 알파벳 철자를 잘못 쓰는 바람에 구글이 됐다고 한다.

‘구골’은 1938년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카스너의 아홉 살짜리 조카 밀턴이 “수를 쓸 때 손이 아파 더 쓸 수 없을 정도의 수로, 1 다음에 0이 100개가 있는 수”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의 명칭이다.

연하장에 쓴 내 뜻이 잘 전달된다면, ‘무량수’와 ‘구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손녀가 10년 후에 AI(인공지능) 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작은 회사를 하나 차릴 것이다. 구글 입사 대신 AI 관련 회사를 설립해 수만 명을 먹여 살리는 CEO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비록 손녀딸이라 후손이 족보에는 못 올라도,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훌륭한 인물이 되려는 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올해 칠순인 나도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노력할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