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1 국밥집에 앉아서
공무원의창#11 국밥집에 앉아서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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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그 집이 그랬다. 낡고 어지러운 느낌. 옥호도 그렇고 입구도 그저 그랬다. 응암동 전통시장 안의 한 볼품없는 식당 앞에서 망설이다 메뉴 하나를 확인하고 들어갔다. 훅하고 달려드는 열기. 식당 안은 가마솥과 뚝배기가 펄펄 끓는 한증막이었다. 삼삼오오 대여섯 테이블이 차는 동안에도 나의 기대감은 배꼽시계보다 너그러웠다.

드디어 내 것이 나오고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니 기대 이상이다. 소문난 종로구 견지동의 이문설렁탕보다, 서대문구 행촌동의 대성집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격은 사천 원이 더 쌌다. 국물이 너무 좋아 좀 더 달라고 했더니 사장님은 아예 투가리째 주방으로 가져가 새로 끓여서 준다.

또 한 가지 내가 눈여겨본 것이 있다. 그 식당에선 탕이 나오기 바로 직전 밥과 반찬이 나왔다. 보통 열에 열은 손님이 앉으면 밥과 반찬이 먼저 나온다. 그러면 막상 국이 나올 때 밥은 식는다. 많이 배고픈 이들은 국이 나오기 전에 밥과 찬을 곁들여 먹어 허기를 달랜다. 내가 업주라면 꼭 실천하고 싶었던 대목이었다.

바깥에서 볼 때와 달리 안은 널찍하다. 영락없는 한증막 구조다. 대충 데워서 주는 탕집이 아니고 뚝배기마다 일일이 끓여서 주는 집이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상호며 고객이 드나드는 입구며 왜 더 깔끔하게 꾸미지 않았는지. 이 집은 굳이 꽃단장을 하지 않아도 입맛에 끌린 사람들이 끝없이 찾는 집이다. 개미장처럼 밀려오는 이들은 진짜 맛을 아는 미식가들. 낮밤을 끓고 끓여 깊이 우러난 설렁탕, 도가니탕, 갈비탕. 역전이나 전철 입구에 늘어선, 다품종 대량생산의 천박한 급식 시스템에서 나오는 음식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동물은 삼키고, 인간은 먹고, 영리한 자만이 즐기며 먹는 법을 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미식학의 선구자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이 한 말이다. 난 음식을 두루 맛보며 즐기는 식도락가는 아니다. 다만 나는 음식의 연원과 풍미를 온전히 간직한 미학자를 꿈꾼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게스트로노미스트(Gastronomist)를 꿈꾸는 것이다. 국밥 한 그릇에 무슨 거창한 미식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

유럽의 미식가들이 치즈 하나에 목숨 걸듯 우리 역시 장에 목숨 건 민족 아닌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정성 없는 음식을 내오는 밥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밥 한 그릇이었지만 그 음식은 마음을 녹이고 기분 좋은 대화를 이어 가기에 충분했다. 국밥집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처음에 누추하고 번잡하다고 느꼈던 보잘것없어 보였던 밥집의 용모가 소담하게 느껴졌다. 감동은 이럴 때 배가되나 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했다. 꾸밈(형식)이 바탕(내용)을 이기면 사해진다고. 그 어떤 것이든 속과 겉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다고 했다. 이 문질빈빈의 가치는 문학예술에도 적용되고, 사람의 행실을 볼 때에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사람도 그 밥집의 음식과 같아 껍데기를 포장하여 알맹이의 실체를 가리려는 이들이 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선 실질적으로 효과를 보기 어려운 정책을 각종 숫자와 통계를 인용해서 그럴듯한 정책이라는 것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비쌀수록 고급이고, 희귀해야 명품이라는 평판 가치를 활용해 겉만 화려하게 꾸며 파는 상인들도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겉만 꾸민 것인지, 그 속도 알찬 것인지를 알아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국밥 한 그릇 먹고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