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2 어쩌다 문득
공무원의창#12 어쩌다 문득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0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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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그의 밥상엔 늘 술이 있었다. 점심의 반주는 퇴근 후의 술집으로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 그의 해장국 옆엔 또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술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술을 찾았기에 사실상 그는 늘 취해 있는 상태라고 봐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술기운으로 느슨해진 그의 업무 실수는 눈에 띄게 늘었다.

그의 눈빛이 반짝일 때는 오직 푸른 로진스키(진로소주)의 물결이 잔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그는 술이 없으면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월급날이면 인근의 청진동, 무교동 술집 주인들이 찾아와 사무실 문밖에서 서성거렸고 가끔은 옥신각신 몸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매우 명석했다. 한번은 직원 모두 적용하기 어려워했던 하수도요금 조견표를 뚝딱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그로 인해 업무가 훨씬 수월했음은 말해 뭐 하겠는가. 그는 1980년 신군부의 사회정화 대상에 오른 공직자였다. 숙정을 당하고 9년 만인 1980년대 말 다시 복직했다. 신입 여사원과의 염문으로 부인에게 이혼당하고 소위 ‘학교’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다시 복직했지만, 배제된 세월 동안 거칠어진 심정만은 어쩌지 못했나 보다. 하루는 느닷없이 책상 유리 깔판을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을 내더니, 깨진 유리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피와 함께 뱉었다.

“씨팔, 다 퇴근해!”

아니, 이건 뭐지….

나는 그와 1년 동안 함께 근무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우린 서로 다른 일터에서 근무했다. 가끔 폭주하는 그의 성미와 늦은 밤까지 술을 즐겼던 그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와 함께 밤을 지새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어느 날 120 다산콜센터를 통해 그가 연락을 했다. 정문으로 나가 보니 초췌한 몰골의 60대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그였다. 얼굴에는 퍼런빛의 병색이 완연했고, 눈동자는 정처를 찾지 못해 끝없이 흔들렸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몇 시간 전에 마셨을 소주 냄새와 오랜 세월 삭았을 그의 간과 폐와 위장이 뿜어내는 쉰내가 섞여 흘러나왔다.

그와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가 아닌데도 그는 하필 내가 앞가림 못 할 때면 족집게처럼 나를 찾았다. 순박하고 의리의 돌쇠로 보였던 내가 그의 마음에 남았던 것일까. 아니면 누구 하나 그를 반겨 주지 않아서 돌고 돌아서 찾아온 거처가 나였을까.

그는 나를 찾아올 때마다 직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남루하고 더러운 행색으로 변해 갔다. 흡사 산에서 낙오된 빨치산을 보는 듯했다. 그가 올 때마다 난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밥을 함께 먹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챙겨 주었다.

하루는 국밥을 곁들여 소주를 두어 잔 털어 넣은 그가 말했다. 막노동판을 나가는데 작업 현장 동료가 꼬박꼬박 하대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은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그의 민증을 흘끔 쳐다보니 다섯 살 아래였다고. 이분의 본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에서 나는 까닭 없이 서글퍼졌다.

그는 잊을 만하면 불콰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는 돈이 떨어지면 노숙하기도 했고, 오직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와 식당을 나설 때까지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돈이 절실했겠지만, 그는 모처럼의 따뜻한 한 끼 점심을 내어 주는 후배와의 관계마저 망치고 싶진 않았던 듯하다. 아니면 사람들의 거절에 미리 익숙해져있었을지도. 그가 휘청거리며 일어나 골목 저편을 향해 걸어갈 땐 그의 그림자도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소식이 끊긴 지 5년이 지났다. 어쩌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늘 상처 입은 짐승이 잠깐을 은신처에서 몸을 녹이듯, 그는 그때마다 춥고 어색한 웃음을 내게 지었다. 그는 그랬다. 어쩌다 그렇게 찾아왔고, 난 문득 그를 기억해 냈다. 어디서 굶지 않고 사는지…. 내 뼛속에 새겨진, 가장 눈에 밟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