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9 지하도 무뢰배
시정 인문학광장#9 지하도 무뢰배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 승인 2023.06.0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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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이재영

[시정일보] 티브이 방송을 보는 중간중간 휴식 시간에 끔찍한 장면이 나온다. 비쩍 마르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골 같은 아프리카 어린애를 안아 보이며,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이 아이에게 온정의 손길을 보내 달라는 공익광고다.

다른 비슷한 광고에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양동이를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맨발로 십여 리 길을 걸어가서 흙탕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소개하며 이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우물을 제공하자고 호소한다.

어떤 광고는 히말라야 산간 오지에서 수십 리의 험준한 길을 걸어 등·하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자고 하고, 또 어떤 광고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온이 오르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생존의 위기에 몰린 북극곰을 구해주자며 성금을 보내 달라고 간청한다.

한 달에 2만 원 정도면 저런 안타까운 사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처럼 들린다. 장면마다 사정이 몹시 딱해 보이고 2만 원이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다 싶어 마음이 솔깃하게 동요하기도 한다. 그런데, 연예인까지 내세운 광고가 하도 자주 나오다 보니 ‘무슨 놈의 아프리카 애들까지 우리보고 도와달라는 건가?’ 싶어, “돈 많으면 니나 도와라, 아프리카!” 하는 반감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국내의 어느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린 소녀가 아픈 할머니를 걱정하는 애달픈 장면을 보여주거나, 유명 가수가 독거노인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며 동참을 호소하는 단체도 생겼다. 그런 구호단체나 사회단체의 이름을 다 외울 수는 없지만, 얼핏 봐서 ‘유니세프’를 비롯해 열 개쯤은 되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초등 6학년 손녀에게 줄 책을 사러 안산 시내에 들른 적이 있다. 가끔 신문에 난 신간 서적 중에 손녀가 읽을만한 것을 사 뒀다가 집에 오면 주는데, 내가 사는 시흥시에는 큰 서점이 없어서 전철을 타고 안산시 중앙역 근처의 D 서점에 가서 사 온다. 전철역에 내려 지하도를 건너는데, 지하도 반대편 계단 아래에 청년 두 명이 서서 행인을 붙잡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유니세프’에서 나온 20대 청년들이다. 파지 줍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어느 남자 어린이 사진을 확대하여 큰 패널에 붙여 놓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보이자, 한 명이 와서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하루에 칠백 원만 아끼시면 저런 OO이 같은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루에 칠백 원? 그러면, 한 달에 2만 원만 내면 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2만 원 주고 가면 되는 거지?”

“네? 아, 그게... 여기 이 후원금 송금 계좌로 매월 2만 원씩 보내주시면 됩니다.” 하면서 안내문과 계좌번호가 적힌 전단지를 보여줬다.

2만 원을 한 번만 내고 마는 게 아니라 매달, 계속 도와달라는 말이다. ‘이런, 화적 보따리 털어먹을 무뢰한을 봤나!’ 1년이면 24만 원, 칠순을 바라보는 내가 앞으로 10년을 더 산다면, 24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다. 그 돈이면 내 손녀에게 매달 책을 사줘도 남겠다.

내가 은퇴 후 여생을 작가로 살겠다며 모 종합문예지 신인상에 응모하여 당선되면서 5년 동안 쓴 수필이 그럭저럭 30여 편이 된다. 내 남은 인생의 꿈은 개인 수필집을 발간하는 것인데, 그 비용이 200만 원 정도라 매달 받는 연금의 용돈을 아껴서 마련할 계획이다. 그러니, 저 가엾은 어린이를 도와주려면 내 수필집 출판의 꿈을 아예 접어야 한다.

“에이, 내 사정에 그렇게까지는 못하네. 미안하구먼. 수고들 하시게.” 하며 시큰둥하게 돌아섰다. 책을 사고 오면서 보니까 대학생 같은 젊은 여자 두 명을 붙잡고 설득하고 있다. ‘저렇게 두 명이 서서 온종일 몇 명이나 포섭할까?’

낮에는 봉급쟁이 직장인이 드물 테고, 저녁 시간대까지 열 시간쯤 노력해서 한 시간에 한 명꼴이면 하루에 10명, 한 달이면 300명이다. 1인당 2만 원씩 후원한다면 한 달에 600만 원이 모이는 셈이라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런데, 저 청년들 식사비용과 일당을 합하면 1인당 한 달에 300만 원은 줘야 할 것 같다. 두 명이니까 모은 돈 600만 원 다 들어가지 않는가?

도대체 산술적 계산이 안 돼서 계속 도리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킨 김에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유니세프’에 대해 검색해봤더니 정기후원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매년 어린이 590만 명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는데, 적립된 정기후원금으로 자연재해, 전쟁 등 긴급상황 발생 즉시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교육을 통해서만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으며, 월 3만 원이면 매월 공책 80권, 연필 290자루를 전달하고 어린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을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 당연히 공감이 간다.

그런데, 적자일 것 같은 후원금을 얼마나 모았나 살펴보니 놀라운 내용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6·25 한국 전쟁이 터진 1950년부터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다가, 19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유일한 국가라고 한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1994년부터 2018년까지 25년간 기부한 금액이 모두 8억 9,867만 달러(약 1조 원)로 이는 한국이 43년 동안 지원받았던 금액(총 2,300만 달러)의 39배에 달한다고 한다. 25년 동안 1조 원의 금액이 모이려면 1년에 약 400억 원인데, 한 달에 3만 원씩 계속 송금하는 후원자가 12만 명이 있으면, 월 36억 원으로 연간 432억 원이 된다.

12만 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다. 물론 10여 개 단체를 고려한 전체 후원자 숫자는 훨씬 많겠지만, 안산 지하도의 청년들처럼 전국에 흩어져 단체의 목적과 취지를 알리면서 티브이 광고도 병행한다면 상당한 후원자를 모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한국위원회’가 유니세프 본부에 보내는 기부 금액이 34개 유니세프 국가위원회 중에서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고 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구호물자로 생계를 잇던 우리나라가 어느새 세계 10위권의 무역국이 되어, 한 해 국가 예산이 500조 원을 넘어섰으니 가능한 일이다 싶어 가슴이 다 뿌듯해진다.

물의를 빚은 모 단체와 같은 파렴치한 무뢰배 집단만 아니라면, 좋은 일을 벌이는 가상한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 소원인 수필집 출간을 접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예상외로 좋은 일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아서 천만다행이다.

나도 열심히 글을 써서 상금 있는 공모전에 응모하여 당선되면 그 상금으로 수필집을 내고, 용돈으로는 매달 송금하는 후원 계좌에 사인하여 하다못해 북극곰 새끼라도 한 마리 구하는 데 동참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