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1세기 양반(兩班)의 식별
기고/ 21세기 양반(兩班)의 식별
  • 임종은 (한국문학신문 전 편집국장)
  • 승인 2023.06.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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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은 (한국문학신문 전 편집국장)
임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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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요즘 세상에 ‘양반’을 얘기한다는 것은 고물상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퇴색된 가구를 연상할 만큼 시대적 추세에 합당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오륙십 년 전만 해도 어른들에게 듣던 말 가운데 “뉘 집 자식인지 참 양반 후손답구나” 또는 “성씨가 양반 성씨로구나“ 등의 칭찬을 흔히 들었던 기억이 있으리라 본다.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범적이고 선량한 사람을 흔히 ‘양반’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한동안 일상 언어생활 속에서 인칭대명사로서 ‘양반’이 감초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양반이란 본래 왕이 정무를 볼 때 왕을 기준으로 왼편인 동쪽에는 문관이 동반(東班)으로서 늘어섰고, 오른편인 서쪽에는 무관이 서반(西班)으로서 늘어섰던. 그들을 두 개의 반(班)이라는 의미에서 양반이라 하였다.

양반(兩班)은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었으며, 원래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 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사족(士族)은 관료뿐만 아니라 그의 직계 가족과 후손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양반은 문무반 관료만을 칭하는 용어였지만 관습적으로는 관료 사회와 혈연으로 연결된 지배층을 뜻하게 되었다. 이처럼 양반은 지배층인 동시에 지식층이었으나 예법을 준수해야 하는 등 정신적 의무도 지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관료인 동시에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고, 조상에 대한 예우를 대단히 중시하였으며, 씨족의 역사인 족보를 기록 보존하여 가문의 기원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양반의 대비되는 말로 상인(常人) 또는 상민(常民)이라는 말이 있으나 사실 상민은 농업,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백성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어 상공업 분야에 대규모 재력가들이 대두하였으며 이들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사족(士族)은 국민의 공복 즉 심부름꾼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 즉 지위가 역전된 셈이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사회적 계층이 양반 세력과, 中人 계층 즉 양반과 상민 사이에 의원. 역관 등 기술 관리 계층, 다음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에 종사하는 양민 계층, 마지막으로 노비. 광대. 백정 등 천민 계층으로 분화되면서 상민의 지칭도 천민 계층으로 축소 변화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양반제도나 생활상을 언급할 때는 연암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소설 속에는 양반이 지켜야 할 복잡한 행동거지들이 많이 열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여종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신발을 땅에 끈다. 그리고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자를 쓰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을 묻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맨상투로 밥상에 앉지 말고, 국을 먼저 훌쩍훌쩍 떠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룩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중략) 추워도 화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소 잡는 일을 하지 말고, 돈을 가지고 놀음을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으로서 어긋남이 있으면, 이 증서를 가지고 관(官)에 나와 변정(辨正)할 것이다.’

<양반전>은 18세기 조선 후기 신분제도의 변동 과정에서 양반사회의 무능과 부패상을 폭로하고 풍자한 소설로서, 부자(富者) 상민의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양반이 되려 하지만 양반이 지켜야 할 복잡한 형식적 조건에 놀라 양반되기를 포기하게 되는 이야기도 나온다. 형식에 얽매여 스스로 자립 능력을 상실해 가는 양반의 무기력과, 부를 축적하여 무턱대고 양반이 되려는 상민들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철 지난 양반 제도에 대하여 장황하게 늘어놓게 된 의도는 21세기 현대판 양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가문이나 혈통은 동양권에서만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예전에는 중요시해 왔다. 미국도 케네디 가문, 루스벨트, 제롬 파월 가문, 영국의 처칠 가문처럼 혈통을 중요시하는 예들이 많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혈통을 따지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값비싼 몸값을 간직한 개나 말도 혈통을 따지는 마당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언젠가는 존엄성의 범주 안에서 혈통에 대한 연구과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과거의 제도나 계층 따위는 모두 잊어버리고 현대판 양반의 조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첫째, 말과 행동이 절제되고 교양이 있을 것. 둘째, 공사 생활에 모범적일 것. 셋째, 남을 배려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울 것. 넷째, 봉사와 베푸는 삶을 살 것 등.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이면 아무리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더라도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교양 있는 세계인으로 그리고 현대판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반대로 남에게 배려할 줄 모르고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비양심적인 행위, 욕설과 거친 행동으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축재와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사는 행위 등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재력이 많다 하더라도 현대판 천민임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치거나 여러 사람에게 지탄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조상에게까지 욕을 먹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몰상식하고 몰염치하고 비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은, 대대로 내려오는 천민 노비의 DNA가 자자손손 전수 되고 표출되면서 자연스럽게 비천한 유전자를 여러 사람에게 확인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