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4 한국인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
공무원의창#14 한국인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1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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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누구였던가. 봄철의 풍경을 어느 시인은 “봄이 되어 뚜껑을 여는 강”이라고 표현했다. 새벽 강이 뚜껑을 열어 차가운 수면 위로 뜨거운 ‘봄’을 뿜어내는 장엄한 광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끓어오르며 넘치는 포말을 어디서 보았던가. 강원도 화천의 북한강이었던가, 아니면 구례의 섬진강이었던가.  #

숙직을 선 아침 7시. 바지랑대로 누가 우케(찧기 위해 말리려고 널어놓은 벼)를 너는지 어둠이 걷힌 바깥은 보리쌀 뜨물을 뿌려 놓은 듯 희읍스름하다. 온몸이 찌뿌둥하지만 다음 근무자인 월번 사령에게 배턴을 넘기는 오전 9시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조금 더 있으면 윗분들의 출근도 이어질 터.

청사 주자장을 가득 메운 안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뛰어온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빼 바지 하나가 안개 속에서 달려왔다. 무슨 다급한 일일까. 4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잽, 잽, 곧이어 스트레이트. 숨 돌릴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 낸다.

“아저씨. 주민등록등본 발급기 어디 있어요? 찾아봐도 없어요.”

바로 로비 앞의 에스컬레이터 입구에 있는 ‘무인 민원 발급 기계’로 안내한다. 두 발짝 앞인데도 급한 마음에 보이지 않은 것이다. 난 그녀의 뒤에서 지켜보기로 한다.

그녀가 천 원짜리 지폐를 투입구에 넣으면, 기계는 밥투정을 하는 미운 5살처럼 다시 뱉어 냈다. 그러길 서너 번. 그녀의 손동작에 잔뜩 짜증이 묻어난다.

“에이, 씨. 지하철역에 있는 무인 민원 발급기에서 안 돼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탁, 탁! 이번엔 쓴 약을 아이에게 먹이듯 지폐를 욱여넣자마자 투입구를 손으로 치며 막는다. 내가 나섰다. 여전히 기계는 눈만 끔벅거리며 “메롱” 하며 돈을 내밀었고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발급을 원하는 증명 종류를 선택하십시오.’를 반복했다.

화폐 투입구에는 “신권 1,000원 지폐만 사용 가능”이라고 적혀 있다. 지갑에서 비교적 빳빳한 놈을 꺼내 넣어 보지만 역시 안 된다. 다시 500원짜리 동전을 넣지만 마찬가지다. 어쩐다. 구청 직원도 어찌하지 못하는 기계라…. 이 정도면 구청의 관리 소홀로 인한 기계 고장이 아닌가. 자청해서 받은 일로 이제는 나 역시 설익은 홍시가 된다.

“기계가 고장인가….”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푸념했다. 나 역시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을 표한다. 다급해진 그녀의 얼굴은 점차 누룽지가 되어 갔고, 홍시 같던 내 얼굴은 점차 창백해져 갔다. 번갈아서 기계를 살펴보지만, 여전히 무인 민원 발급기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해피콜서비스에 전화해 볼까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원인을 알기까지 우린 근 20분을 그 기계 앞에서 쩔쩔맸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중년들의 오래된 습관. 음료 자판기에서 캔 음료나 믹스커피를 뽑아 먹던 버릇이 문제였다. 돈을 넣고 원하는 음료를 선택하면 우당탕하며 음료가 떨어지고 이어 기계가 잔돈을 뱉어 내는, 우린 그 추억의 논리 회로에 갇힌 것이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터치스크린식 키오스크(Kiosk)는 모두 예외 없이 ‘메뉴 선택 → 수량 선택 → 결제수단 선택 → 결제’와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지하철에서 표를 구매할 때나 음식점에서 주문을 할 때에도. 그럼에도 우린 그 추억의 자판기 시스템을 생각했는지, 아니면 “신권 1,000원만 사용 가능”이라는 말에 꽂혔는지 돈만 욱여넣길 반복하며 식은땀을 흘렸던 것이다.

게다가 우린 기계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놈은 끊임없이 ‘발급을 원하는 증명 종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반복 주입했음에도 우린 성의 없는 전자 음성 따위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냥 기계가 일러 주는 대로 했으면 되었다. 마침내 순서를 바꾸자 기계가 돈을 먹었다. ‘증명 종류 선택 → 주민등록번호 입력 → 생채지문 확인 → 수수료 투입’.

돈을 먹은 기계는 비로소 주민등록등본을 뱉어 냈다. 내가 목례를 하자마자 그녀는 끈 풀린 강아지 쫓아가듯 사라졌다. 4전 5기의 신화, 파나마의 복싱 영웅 카라스키야를 눕히고 홍수환은 챔피언 자리에 오른 뒤 TV 카메라에 대고 외쳤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내가 딱 그런 심정이었다.

기계 앞에서 씨름을 했던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승강기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닫힘’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러 대는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에 ‘추억의 자판기 시스템’이 결합되면 누구든 나와 같이 진땀을 뺄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 기계는 바보상자일 수도 있겠다. 관리 부서에 알려 그 바보상자의 이마에 ‘딱’ 정해진 순서를 표식한 안내문의 부착을 요청했다.

한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라. 세계에서 한국인만이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건 바로 한국인은 기계에 설정된 매뉴얼에 따르지 않고, 각종 기기묘묘한 방법을 동원해 기능의 한계까지 밀어붙인단다. 거칠게 말하면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것. 기계는 무한정 편리해야 하고, 한국인은 기계의 제한된 성능에 바로 불만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서 게임 개발자들은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의 첫 론칭을 한국에서부터 시작하고, 전자제품도 한국에서 먼저 시판해 기능의 한계점을 빨리 파악한다. 이런 시장을 기업은 테스트 마켓(test market) 또는 파일럿 마켓(pilot market)이라고 한다. 즉, 그 시장을 제품의 장단점을 가장 빨리 파악하고 소비자 반응의 범위를 확인하기 위한 곳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이를 민원발급기에 적용하면, 아마 한국인이 원하는 기계는 AI가 장착된 머리 좋고 경험 많은 기계일 것이다. 돈을 먼저 집어넣으면 “고객님, 1천 원을 넣으셨군요. 원하시는 증명서 버튼을 눌러 주세요. 추가로 돈을 투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척척 내뱉는 기계 말이다.

아니면 고집스럽게 먼저 돈을 투입하는 고객에겐 “고객님,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증명서 버튼을 먼저 누르지 않고 넣는 돈은 제가 그냥 먹겠습니다.” 뭐 이런 멘트를 당돌하게 내뱉어서 단단하게 굳은 고객의 뇌를 깨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