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19 저녁 밥상 위 고등어의 눈을 보며
공무원의창#19 저녁 밥상 위 고등어의 눈을 보며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26 08:50
  • 댓글 0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내가 자란 일로(읍)는 무안군에 속해 있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저 일로(一老)라고 불렀다. 풍양 사람들이 행정구역상 예천군이지만 여전히 풍양에 산다고 말하듯 오래된 고장의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 황토, 고구마, 양파, 낙지가 명물이고 33만㎢라는 엄청난 크기의 흰 연꽃 자생지인 회산백련지가 있는 곳이다.

마당극에 각설이 타령을 곁들여 근대 한국인의 애환을 그린 연극 〈품바〉가 초연된 곳이기도 하다. 〈품바〉는 5천 회 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의 다례인(茶禮人)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초의선사의 고향도 일로다. 그는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차서(茶書) 『다신전』과 『동다송』을 저술하였던 다성(茶聖).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고장엔 농수산물이 풍부했다. 환경의 바로미터라는 작은 고래 상괭이의 집단 군무를 그 시절 자주 볼 수 있었다. 또 무안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어 도립공원으로도 지정되었다.

난 대학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진로는 중학교 때 결정해야 했다. 그 시절 난 대학 아니면 취업 외에 제3의 진로는 없는 줄 알았다. 나는 목포기계공고를 목표로 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당시엔 지역에 이름난 상고와 공고가 있었다. 비평준화 지역이라서 경쟁도 치열했다.

1979년 합격 이후 낮에는 학과 수업을 하고 밤에는 실습했다. 군 정비창에 커다랗게 붙어 있던 표어,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자’라는 말은 이때부터 익숙했다. 실습실에 들어가면 A0제도용지인 하얀 켄트지와 자브(과업지시서)가 기다렸다. 쏟아지는 형광등을 받은 켄트지는 마치 폭설이 내린 대관령을 선글라스도 없이 걷는 듯한 눈부신 설원이었다.

기계로 깎는 것이 기계과의 영역이라면, 내가 선택한 기계설계는 상상 속에서 자르고 부수고 부품을 조립하는 세계다. 정면도, 측면도, 평면도, 3차원의 드로잉. T자, 분도기에서 드랩트 머신(Drafting Machine)으로, 트레이싱페이퍼, 드로잉 먹물 펜이 주요 도구였다.

실습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이기도 했는데 연로하셨다. 판금이 전공이라 기계설계 쪽으로는 역량이 부족하였고, 무엇보다 우린 대놓고 해답지를 보고 베꼈다. 실습은 현장에서 지도하는 선생님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우린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다. 실력 있는 옆 반 선생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실제 전문성과 같은 실력에선 기계제도 수준이었고, 자존심만은 정밀기계설계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적성이야 맞든 안 맞든 산을 옮기는 심정으로 이론과 실기에 매달렸다. 3학년 1학기 때 남들 따지 못하는 정밀설계기능사 2급(1981.4)을 땄고 2학기 때는 남들 다 따는 기계제도기능사 2급(1981.10)을 취득했다. 이때 정밀설계기능사 자격증(FIC) 부상금으로 받은 장학금 10만 원은 학교에 전액 기부하였다.

실습에서는 늘 헤맸던 어리바리한 내가 150명 중 10명에 들어갔다니. 느리게 배웠지만, 배운 것은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숨겨진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일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문제를 풀었던 인내심 때문인지 어쨌든 나도 모르게 실력이 축적되었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 나 역시 취업에 온 신경이 쏠렸다. 전통적으로 현대, 삼성, 대우라는 빅3 기업을 당시 공고생들은 선호했다. 나 역시 그룹 3사의 입사시험 원서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1981년 그해 제일 먼저 우리 학교에 노크한 기업은 삼성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조선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재계 랭킹 1위인 현대의 현대중공업, 조선 분야의 1위인 대우조선의 원서를 내심 기다렸다. 나에게 온 첫 번째 카드로 응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학교 추천 원서는 오지 않았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해는 현대중공업도 대우조선에서도 학교 추천 입사원서가 없었다고 한다.

예년보다 취업이 늦어졌기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삼성 3사(전자, 중공업, 제지)의 문고리 중 하나를 잡아야 했다. 담임 선생님은 삼성전자(수원)는 도제식으로 운용되는 기능장들의 몫이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젠장! 결국 선택지는 2개. 삼성중공업(거제)으로 갈 것이냐, 전주제지를 택할 것이냐. 해당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 고향 일로(一老, 무안군 소속)와 가까운 전주를 선택했다.

서류 전형에선 내신과 자격증 등을 심사했고, 필기시험, 적성검사에 이어 면접을 보고 입사했다. 내게 주어진 파트는 전공과는 거리가 먼 초지과(抄紙課)의 피니시 라인이던 리와인드 파트였다. 경공업 분야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회사를 오래 다니진 못했다. 입대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빨간 딱지에 이어 퍼런 딱지가 나의 청춘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딱지는 징병검사통지서고, 파란 딱지는 입대영장이다.

배속받은 곳은 육군종합행정학교였다. 성남시 장지동에 학교가 있었는데, 실제 복무는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 103학군단에서 했다. 다행히 틈틈이 책을 볼 시간이 많았다. 주요 업무는 무관후보생의 군사훈련(ROTC)과 학부생들에 대한 군사교육(MTC), 야간대학원 위탁 장교들에 대한 행정지원이었다.

퀴퀴한 시멘트 바닥에 군홧발 소리만 요란한 곳이 군대라지만, 이곳에는 대학 본부에서 지원한 내 또래의 타자수 아가씨와 야간 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동이 있었다. 이름도 장미였다. 당연히 전방 GOP 수컷들의 연병장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학군단은 예비역 포함 장교들의 집합소였고, 단장은 현역 육사 출신 대령이었다.

행정병인 나에게 예산농고 출신의 선임 하사님은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듯 “너는 나가서 ‘공(公)’자와 인연을 맺어라.”라고 예언을 곁들인 조언을 하셨다. 알게 모르게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숨 가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계열도 문과로 확 바꿨다.

기왕 서울의 복판, 그것도 대학에서 근무를 했기에 난 제대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회사 일 역시 전공 분야도 아니고 무엇보다 대졸과 고졸에 대한 처우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관리자, 그러니까 화이트컬러가 되고 싶었다. 특히 부대 내 선후배는 대부분 대학생이었고 그중 최고 학부를 다니는 이들도 꽤 되었다.

제대 후 전주의 회사로 갔다. 당연히 내가 복귀(귀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던 인사과장님은 나를 반겼다. 하지만 난 서울의 태평로에 있는 삼성그룹 본사로 발령을 요청했고 밀당은 사흘간 이어졌다. 본사로 알아보더니 발령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난 과감히 퇴사했다. 그리고 수원에 있는 국립 세무대에 호기롭게 도전, 면접까지 보았으나 거기까지였다. 우선 직장을 구해야 했다.

지금 뒤돌아봐도 공과 계열은 내게는 맞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공항 건설, 리비아 대수로 개발 등 중동 SOC붐의 막차를 타고 있었다. 그랬기에 난 당연히 먼저 취직해서 돈을 벌고, 이후에 진학하는 것이 연차별 목표였다. 내 안에서 무시로 꿈틀거리는 활화산은 당분간 멈출 이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 정말 열심히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없다. 어느 정도 지혜가 쌓인 후 복기해 보니 공부 요령을 좀 더 달리했었더라면 우공이산의 무모함은 많이 거세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정도만 남았다.

입시 준비를 하며 그저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노모와 함께 둘째 형님 댁에서 더부살이를 하니 더욱 면목이 없었다. 곧바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침 종로에 박문각이라는 공무원 고시학원이 있었고, 그곳이 내 길토래비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주 드나들었다. 사명감이니 국가관이니 이런 거창한 슬로건보다는 호구지책을 위한 방편이었다.

먼저 총무처 행정직에 응시하였으나 심혈을 기울인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시험 날 물먹은 솜이 돼 돌아와 풀어보니 최소 60점을 넘어서 다른 과목의 점수가 아까웠다. 특히 전통적으로 강한 국어는 문제가 쏙쏙 들어왔기에 시험을 보면서 ‘높은 점수로 합격하겠구나!’ 하며 김칫국만 실컷 들이켰다.

곧이어 치른 서울시 지방공무원시험을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그때까지도 난 ‘서울’이 지방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전 관선시대,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었으니 다른 누구도 그리 생각했을 것. 총리실 산하라는 것은 더더구나.

이후 방송대 법학과(1992), 국문과(2007)에 등록하여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직장에서 경험한 ‘관광학’을 공부해 보고 싶어 뒤늦게 등록하여 과거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다. 3년 동안 익힌 시·구 관광행정 정책을 학문과 융합하기 위해 현재 5학기째 열공 중이다. 평생 학생.

최근엔 명절을 앞두고 어른들이 조카나 아랫사람에게 묻지 말아야 할 것을 신문에서 소개한다. ‘넌 언제 결혼할 거냐?’며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건 이미 익숙하다. 그중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대목은 조카들에게 “넌 꿈이 뭐니?”라고 묻는 것이란다.

20세기는 영웅의 시대였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쌀집 점원이 재벌이 되기도 했다. 빈민가에서 뛰어난 스포츠 스타가 탄생했으며, 흑인 대통령을 키워 낸 시대이기도 하다. 삶의 목적이 ‘숨 쉬는 것’이 아닌 것처럼, 꿈과 목표가 없는 인생은 살아도 죽은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물었고, 대답 중 빠지지 않았던 것은 대통령과 선생님, 과학자 같은 것이었다.

돌아보면 그것은 꿈이 아닌 직업이었다. 꿈에는 사회와 세상을 향한 가치가 투영되어 있지만 직업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직업은 생계를 위해서도, 좋아서도,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청소년들은 그 꿈 말고도 ‘좋아하는 것이 뭐니?’라는 질문도 부담스럽단다. 실제 좋아하는 것이 게임밖에 없거나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 고민하는 아이들도 많으니까.

기존의 범주화된 영역, 그러니까 노래나 춤, 그림이나 로켓, 차, 강아지 등에 특별한 애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어른들은 실망할 수 있다. 어른은 좋아하는 것도 직업으로 연결 짓기 마련이다. 가령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커서 수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거나, 스케치를 좋아하는 아이는 웹툰 작가로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배우 신구 선생에게 라디오 진행자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외길을 걸으실 수 있으셨어요?”

신구 선생의 대답은 간단했다.

“연기 외에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었거든. 배가 고파도 연기만 했으니까 나중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더라고….”

실제로 세상의 많은 일은 이렇게 이뤄진다. 나 역시 꿈이니 좋아하는 것이니 하는 고민이 천상(天上)의 것이라면, 현실의 직업은 월세와 쌀, 그리고 아이들 학비를 내어 주는 지상(地上)의 것이었다.

나의 공직 생활은 그렇게 구성되었다. 다만 내가 가진 소박한 가치라면 세금 받아먹는 공복으로, 최소한 월급값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본연의 노릇이라면 응당히 몸을 들이밀어 땀 흘리는 하루. 그것이 저녁 밥상 위에 올라온 고등어의 눈을 보며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