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21 악(岳) 악(岳) 찾다 악악하는
공무원의창#21 악(岳) 악(岳) 찾다 악악하는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6.2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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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1984년 무렵이었다. 형님 집은 아마도 성북2동 만해 한용운의 아담한 사저 심우장(尋牛莊)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을 것이다. 낙산 이화동의 명물, 타일로 꽃을 피운 60개 꽃 계단을 올라 8부 능선쯤에 올라야 나온다.

그 시절 난 매일 아침 하얀 물통에 약수를 받아 왔다. 경로는 이화장과 대학로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뒤 백악산 약수터. 난 매일 200개의 계단을 오르내렸다. 생활의 긴장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몸을 다듬었다. 젊은 시절의 단련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달리고 걷고 오르는 육체적 활동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1990년 봄부터 3년 남짓 매주 일요일 산을 탔다. 주5일제가 전체 정부부처에 실행된 것이 2005년이었으니, 당시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해야 하는 반공일이었다. 내가 오른 산 이름 열에 아홉은 악(岳)이 들어갔다. 삼악, 운악, 관악, 치악, 월악, 설악, 백악, 황악, 모악, 감악, 악휘봉 등.

심지어 구례 화엄사에서 진주 중산리까지 회사 산악회 동료 넷이서 1박 2일로 종주하기도 했다. 이 코스는 대표적인 지리산 종주구간으로 총거리가 47㎞다. 14시간 이상 흔들림 없이 걸어야 하기에 훈련된 산악인이 아니고선 2박 3일이 일반적인 일정이다.

형 셋과 막내인 나, 이렇게 넷은 회사에서도 알아주는 One팀이었다. 회사 산악회의 앞자리에 우리 4인방의 깃발을 꽂고자 하는 마음에 무리해서라도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막내인 나는 돌쇠의 체력을 보여 주기 위해 배낭의 부피도 남달랐고, 입맛이 좋을 때니 당연히 힘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젊은 날의 치기 같은 것이다. 그땐 잘 몰랐다. 슬관절은 사용할수록 닳고 특히 내리막길이나 내려오는 계단에서 급속도로 소모된다는 것을.

당시 산행일지는 찾을 수 없고, 다만 그다음으로 열심히 걸었던 지리산 산행 일정의 기록은 남았다. 1992년 5월 3일(일)~5월 5일(어린이날)까지 2박 3일간 4명이 지리산을 걸었다. 102.98㎞, 만보계로 81,098보.

#첫날(5.3)

서울역(전날 23:50 통일호, 입석) → 남원역(05:06 도착, 해장국) → 남원역(06:24 택시로 이동) → 용담리 → 육모정(六茅亭) → 주천 → 정령치 → 노고단주차장(07:10 도착) → 산행 시작. 노고단(08:25, 1507m) → 돼지평전(09:38) → 임걸령(09:55, 1320m) → 노루목(10:30) → 삼도봉(1499m) → 백사골정상(12:35) → 토끼봉(1534m) → 총각샘 → 명선봉(1586m) → 연하천산장(15:30, 1박)

#둘째 날(5.4)

연하천산장(08:10) → 형제봉(09:10) → 벽소령(10:05) → 덕평봉(1522m) → 세석평전(1560m) → 선비샘(11:15), 13:55출발 → 칠선봉(14:45, 1558m) → 영신봉(16:10, 1652m) → 다시 세석산장(16:50, 1박)

#셋째 날(5.5)

세석산장(05:45) → 촛대봉(1703m) → 삼신봉(1289m) → 연하봉(1730m) → 장터목산장(07:15, 1653m) → 소지봉(09:05, (1499m) → 참샘 → 백무동 민박촌(13:00) → 산행 마감 → 인월(마천) → 남원 → 전주 → 이리 → 군산 → 다시 이리(23:59) → 서울(03:20)

그 시절 난 능선의 밤하늘 아래로 달빛을 받으며 흐르던 운해를 보며 감격했고, 근육이 지녔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때 찾아오는 엔도르핀의 행복감을 오롯이 즐겼다. 일요일이 가까워지면 배낭 속에 장비를 욱여넣으며 정념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악산(岳山)을 탔던 혈기는 관절과 인대를 조금씩 망가뜨렸다. 체계적인 관리로 무릎과 근육을 보호하지 않았기에 이제는 깊은 산을 가면 내려올 길이 아득한 것이다. 그야말로 악악거리며 악산을 찾던 관절은 이제 내리막 한 걸음마다 악악대며 비명을 질러 댄다.

푸르렀던 시절의 만용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시절 매주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며 고통 이후에 찾아오는 성취감에서 행복을 얻었던 기억은 지금도 단단한 생활력의 토대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하늘이 청명하고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으면 지금도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