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26 사과와 용서,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공무원의창#26 사과와 용서,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7.1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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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연예인이나 기업 총수, 정치인과 같은 유명인이 큰 잘못을 했을 때 잘못된 방식의 사과로 원래의 사건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국민께 심려를 끼쳐 드려 유감입니다.” 내지는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와 같은 형식의 사과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이란 말 속엔 실제로 잘못은 없지만, 이 사건으로 국민에게 미움을 샀으니 사과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라는 말엔 법적인 책임이나 직접적 책임 당사자가 아니지만 어쨌든 사과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반성은 대부분 법률 조력자들의 조언을 반영한 것이다. 대체로 향후 재판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사건의 실체는 발언하지 않되 여론의 뭇매는 피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사과는 사건 실체의 인정을 토대로 반성을 표명하는 것인데, 실질적으로는 재발 방지 및 피해 회복을 그 실질적 내용으로 한다. 공개적인 사과는 책임을 인정하는 자가 유사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공동체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선을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린 사람의 진정성을 파악할 수 없다.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용서를 구한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과가 그 사람의 진심인지 가식인지 어떻게 변별할 것인가.

그래서 국가와 형법제도가 탄생하기 이전의 부락 공동체에선 도둑질이나 폭행 등의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감시하거나 따돌리는 방식으로 책벌했고, 그이의 반성 정도를 오랜 세월에 맡기곤 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 사람이 변했다고 판단되면 촌락공동체의 어른들은 그자의 마을공동체로의 복귀를 윤허했다. 죄가 매우 클 경우엔 마을에서 추방했다.

우리 고향 마을에서는 멍석말이로 뭇매질을 해서 내쫓던 관습법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진심을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법원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의 기준을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등의 행동으로 가늠한다. 이 과정에서 최악의 사과가 탄생한다.

옥에 수감된 가해자가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때, 자신의 양형을 감경받을 목적으로 제출하는 반성문이다. 이 경우 반성과 위로의 서신은 피해자가 아닌 판사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다.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 음주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을 어미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보험회사 직원이며, 이로 인해 피해자나 유족은 위로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해자를 용서해 줄 권리조차 잃게 된다.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은 교도소의 면회실. 깊이 반성하고 있을 줄 알았던 그자가 자신은 이미 회개해서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할 때. 또는 이미 자신은 이미 국가가 준 벌을 받아 죗값을 치르고 있는데, 내가 왜 다시 당신에게 사죄해야 하냐고 되물었을 때 피해자는 어찌해야 할까.

사과와 용서는 본질적으로 치유의 기능을 가졌기에 위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과는 천박한 권력관계와 사회적 압력의 기능만을 반영하고 있다.

언젠가 음식점 종업원이 반찬 그릇을 퉁명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아 큰 소리가 났다. 그 고객은 종업원과 사장을 자신 앞으로 불러 “정식으로 사과하세요!”라고 거칠게 소리쳤다. 국회 상임위에선 “국민들이 보고 있습니다. 사과하세요!”라는 외침이 일상화되었다. 사과는 애초 당자자의 자발적 참회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제 사과는 요구해서 받아 내는 것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따라서 사과는 우리사회에서 ‘굴복’과 ‘승리’를 뜻하게 되었다.

나 역시 공식적인 사과를 했던 적이 있다. 행정사무의 민간위탁의 경우, 개별 업무 관련 조례뿐 아니라 ‘행정사무의 민간위탁에 관한 조례’에 따라 입법부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전임자가 이 과정을 생략하는 ‘의도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마침 의원들도 그것이 당시 2인자의 아집에 의거 그렇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의회 상임위는 후임 국장인 내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했다.

이 일에는 지혜가 필요했다. 전임자를 대신해 내가 사과할 경우 나는 인정받겠지만, 전임자의 과오를 저격하는 셈이 된다. 결국 나는 그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법률 해석상의 오류를 들어 사과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 민간위탁 사무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고자 하는 조례 취지를 존중하고자 한다고 사과했다. 제대로 군기를 잡겠다며 예산심사 시기를 벼르던 의원들은 나의 진정성을 믿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니 후임 과장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심사가 끝나고 뒤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오다가 유난히 거칠게 반대하며 공식 사과를 요구했던 K 의원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국장님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 먹었어요!”

자신을 집요함의 대마왕이라고 자칭한 분에게서 나온 반응이다. 그러나 전임자의 과오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과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데와는 달리 입법부에서의 공식적인 발언은 속기사에 의해 모두 기록이 된다.

서울시에서 근무할 때에도 사과를 요구받고 사과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공직자가 공직자에게 사과한다는 말은 주로 승복과 조아림을 의미한다. 당시 집권당 前 사무총장의 딸이었던 이○현 의원은 내 앞에서 우리 팀의 전△△ 주임에게 소리쳤다.

“서울시 역사상 6급이 감히 얻다 대고 시의원한테 대드느냐?”

이 바람에 그는 내 업무도 문제 삼았다.

나는 서울시에서 ‘중국 산둥성 제남(Jinan)시 국외교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영기획실에선 예산의 항목을 ‘제남시 국외교역전’이 아닌 유력 일간지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 지방장치 경영대전’ 예산으로 사용하고 이후 추경에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 시장의 의중이 반영된 듯했다.

자칭 중국 전문가인 이○현 의원은 예리하게 이를 포착해서 문제 제기한 것이다. 나는 ‘국외교역전’ 예산은 포괄적 성격이라 당초 예산에 반드시 ‘제남시 교역전 예산’이라고 못 박을 수 없다고 대응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현 의원은 이를 두고 K본부장이 와서 사과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새파란 과장님과 내가 가서 더 새파란 이 의원에게 사과하고 일단락되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사과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실행하거나 지시한 사업이 아님에도 큰 문제가 발생해 연대 책임을 져야 할 땐 참담하다. 조직 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는 책임이 분산되거나 전가되는 현상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땐 대나무 숲에라도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