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29 종로에서 마포종점까지
공무원의창#29 종로에서 마포종점까지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7.1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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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내가 올랐던 산들은 주로 골산(骨山), 그중에서 ‘악(岳)’ 자가 들어간 산이 많았다. 산에 10번 오르면 6번은 ‘△악산’이었다. 마포에서 23년, 대저 14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렸다. 나의 공직 생활은 마치 나의 산행과 닮아 거친 암벽을 타듯 했다. 누군들 험한 일을 원했겠냐마는, 나 역시 “때려 부수는 덴 임자만 한 사람이 없어.”라며 한사코 내 등을 떠미는 보이지 않는 ‘흰 손’의 기획에 의해 노란 완장을 찼다.

노란 완장. 영화나 드라마에서 완장을 찬 비열한 공무원은 험상궂은 건달을 부려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야멸차게 때려 부수고, 아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출세해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클리셰(cliché)로 반복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완장’은 빈민의 생존권과 존엄을 짓밟는 마름의 상징으로 나온다.

그런데 내 팔에 노란 완장이라니. 때려 부수는 데 적임자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나는 그렇게 ‘벼락’을 맞았다. 단속부서 팀장 업무를 주면서 약속한 인센티브는 함흥차사. 윗사람은 내게 어떤 설명이나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나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으로 생각하는 건 얼마나 순진한가.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과정은 밀실에서 이뤄지며 헌신은 쉽게 잊힐 수 있다.

다만 난 당시에도 지금도 이 가치를 믿고 내 손길이 닿는 곳엔 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노란 완장’ 일엔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20여 년의 공직 생활을 하며 일터를 가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속 팀장으로 발령된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온통 쫓고 쫓기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고, 나를 둘러싼 사무실 벽이 어지럽게 돌았다.

발령장을 받자마자 K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웃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반장(가로정비반장)의 손에 이끌려 단속 외근 직원들이 모인 사무실로 향했다.

제3별관 중국집 ‘흑룡강성’이 있었던 자리. 5층 옥상 건물엔 조립식 샌드위치패널 콘센트 막사가 있었다. 걸상은 퇴행성 슬관절염 환자처럼 삐꺽대며 널브러져 있고, 누군가 커다란 주먹으로 “××”하며 내리쳤는지 더께 낀 우레탄 유리는 빗줄이 자글자글했다.

“새로 오신 팀장님입니다. 인사하세요.”

굵은 저음의 반장이 커다란 주먹을 피며 내 쪽을 가리켰다. 잠바를 걸친 떡대 7명의 눈총이 젖내 나는 새로운 팀장(나)을 향해 작렬했다. 나 역시 반장과 같은 톤으로 어금니 꽉 깨물며 비장한 톤으로 인사하고 돌아섰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데 반장이 뒤에서 속살거렸다.

“팀장님, 신고식 거하게 하셔야 합니다.”

아차. 조금 전 그 ‘형님’들의 입술이 씰룩였던 건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나. 그해 여름 좁아터진 사무실 안에선 단속하라는 민원과 단속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겁박이 어지럽게 얽혔고, 더위 먹은 벽은 끝없이 열기를 토해 내는 통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화산의 속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겉에서 보면 뭉실뭉실 연기만 나는 것 같지만 그 속은 시뻘건 지옥불의 괴성이 끓고 있는.

그래도 그땐 내 피가 용암처럼 뜨거웠나 보다. “기획파트에서 10여 년 근무했으니 이참에 단속부서에서 완력을 좀 키워 보지, 뭐.”라며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투쟁심을 키웠다. 하지만 이 다짐이 무력하게 고개 떨구는 데에는 달력 한 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이런 조직도 있었구나. 그나저나 술을 못하는데 큰일이군. 그날부터 주야장천 개미지옥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간직한 포장마차에 얽힌 추억이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눈발이 날릴 때 뜨끈한 어묵 국물을 두고 마주 앉아 소주를 기울였던 낭만적인 아날로그형 기억들. 노란 불빛을 내뿜으며 고단한 직장인에게 작은 안식을 주었던 포장마차 말이다.

작은 생계형 노점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부임했던 지역의 노점은 이미 그런 규모를 넘어 거대한 기업형 포장마차로 터를 잡고 있었다. 2호선 홍대입구역 5번 출구 주변과 국민은행 네거리, 신촌로터리, 마포역 인근 염리초등학교 앞에서 밤샘 술을 파는 영업을 하던 노점들.

이런 노점상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서울시는 2009년 당시 2억 원 미만의 재산을 가진 생계형 노점상에 대해선 매대를 재배치해서 도시 미관을 복원하고 영업도 보장하는 소위 ‘상생(안)’을 제안했으나 그들은 ‘재산 조회 동의’를 거부하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2억 원을 초과하는 그들의 재산이 문제였다.

행정대집행(철거)을 고지한 후에는 눈을 뜨면 현장엔 어김없이 철거에 저항하는 이들의 깃발이 나부꼈다. 떡볶이와 어묵 냄비, 국자가 허공을 갈랐고 쇠파이프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쳤다. 린치로 삼만 원짜리 감색 허리띠가 두 번이나 동강 났다. 저항하는 노점 상인은 순찰차 밑으로 들어가 눕거나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던 총각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깊은 밤이 이어졌다. 구타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영화 속 건달들의 대사는 우습게 보이는) 모리배들의 쌍욕이었다. 욕먹은 그대 오래오래 살지니. 입만 열면 “잘라 버리겠다. 찌르겠다. 가르겠다. 갈아 버리겠다.”였다. 퇴근길에 지하철을 타면 목울대를 거칠게 긁어 댔던 욕설이 귓전에서 웅웅거렸고, 그럴 때마다 난 뒷목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은 거칠고 고독한 일이다.

사람 붐비는 목 좋은 길가는 노점상과 업주 간의 전장(戰場)이었다. 민(民)에 맞선 민(民)의 봉기. 그들은 무기 없는 관군(?)을 사이에 두고 험악한 삿대질을 했고 참다못한 이들이 참호를 뛰쳐나가면 주먹질로 이어졌다. 노점 철거를 원하는 인근 점포주들은 공무원들이 뒷돈을 받고 봐주니까 저들이 제집 안방처럼 살림 차린 것 아니냐고 항의했고, 노점상들은 이 일로 자식 학교 보내고 여태 살아왔다며 거칠게 저항했다.

그들의 조직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 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었고, 어제 헤어졌던 조직들이 오늘 아침엔 하나의 깃발 아래 다시 결집했다. 나는 매일 아침 비쩍 골은 로시난테(여기서는 10년 넘은 순찰차)를 탄 채 15㎝ 볼펜을 움켜쥐고 하루 70만 원짜리 매상의 포장마차 진지로 달려갔다. 그들은 떼거지로 내 사무실(건설관리과)로 쳐들어왔고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곤 했다.

그들이 돌아가면 다음 날 아침엔 다른 진영의 무리가 사무실을 점거했다. 그리고 아침엔 전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깃발이 나부꼈고, 연대집회가 있는 날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온 빨·주·황·청·백 깃발이 거리를 뒤덮었다. 방송에서는 “홍대 신촌이 지금 야단법석”이라고 보도되었고, 매일 아침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내 업무 수첩은 까맣게 물들어 갔다.

결국 서울시의 ‘노점 디자인 거리’ 조성사업은 무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우개로 지우듯 하얗게, 하얗게. 안 되면 화이트로라도 발라 버리라는 말일까. 고삐 풀린 돌개바람은 계절이 따로 없었다. 일은 ‘페넬로페의 베 짜기’였다.

한 사회학자가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첨예한 전장은 남북이 대결하는 삼팔선도 아니고, 노사 간 계급투쟁의 장도 아니며, 국회의사당도 아니다. 생존권을 걸고 싸우는 노점과 업장 사장, 사창가 포주들과 일대를 밀어내고 재개발을 하겠다는 건축조합, 토지를 수용하려는 지자체에 맞선 원주민 간의 전장이다. 그에게 ‘같은 배를 탄다’는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에게 투쟁은 망망대해 쪽배 하나를 두고 서로를 밀어내야 사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1980년대 중반에 시작한 공직 생활. 종로에서 출발해 마포종점까지 36년을 뚜벅뚜벅 걸었다. 단속팀장으로 보낸 시절은 돌아보면 ‘불꽃’이었다. 매일 산화하고 재가 되어 집에 돌아갔던. 하지만 나는 더 단단해졌고 현장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