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
  • 임동식
  • 승인 2023.07.2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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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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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때는 1940년 시월 열여드레, 이날은 늦가을이라 해도 아직은 지난여름의 따스한 기운이 남아 조금은 여름에 가까운 일기였다.

조선말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용호동과 복룡촌 사이 원둑, 지게에 이삿짐을 짊어진 장정들이 장사진으로 늘어섰으며 그사이에 얘기를 업은 순녀와 항아리를 머리에 인 인길댁도 끼어 있었다.

이날은 순녀네가 그동안 살던 복룡촌을 떠나 들 건너 도덕지로 이사를 하는 중이며 이삿짐을 진 장정들은 같은 동네 복룡촌의 청년들이었다.

둑 아래 구 원장, 들판은 가을걷이를 마쳐 휑하니 비워졌고 반대편 영산강은 물이 드는 밀물 때라 둑 절반 높이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순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저만치 그동안 살던 곳 복룡촌, 복룡촌은 양 갈래로 갈리는 야트막한 능선의 틈새에 자리한 동네로 좌우로 일, 이부 능선에 가옥이 마치 포도 열매처럼 매달리 듯 늘어져 있었으며 밀양 박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순녀네가 살던 집은 멀리서도 보이는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그동안 순녀가 낳고 자랐던 집, 발길을 멈춘 순녀는 그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순녀야! 언능 오니라! 니 동생은 벌써 저만치 간다.”

​순녀는 또래보다는 골격이 크고 강인하며 야무진 모습을 한 열두 살배기 소녀였다. 앞서가던 인길댁이 돌아서 있는 순녀를 불러 재촉한다. 순녀는 달음질로 쫓아가 뒤처진 간격을 좁혔다.

인길댁은 순녀의 엄마이며 자그마한 키에 예쁘진 않아도 박색도 아닌, 하얀 피부와 매무새가 곱상한 것이 매력인 40대 중반의 여인네였다.

말례는 여덟 살배기 순녀의 여동생이며 손에 자그마한 보퉁이를 들고 댕동거리는 걸음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이들이 신원목 앞 저수지(이 저수지는 훗날 회란 백련단지로 지역관광명소가 됨)를 돌아 도덕지에 다 이르렀다.

눈앞에 넓게 펼쳐진 들판, 이곳은 영화 농장이다. 저 멀리 지평선처럼 보이는 것은 돈도리와 용당 끝을 이은 둑이었으며 이 둑의 건설로 말미암아 날마다 들고나던 영산강의 갯물은 끊기고 이처럼 너른 들 영화 농장이 생긴 것이었다.

복룡촌 앞뜰 역시 간척하여 생긴 들로써 조선 말엽에 생긴 것이며 언저리 사람들은 이 들판을 구원장이라 했고 도덕지 앞 신원장은 영화농장이라 하였다.

약 30여 년 전, 일본 정부는 대륙진출의 야욕을 실현코자 1908년 동양척식회사를 설립, 당시 쇠퇴일로에 있던 조선 왕실에 계약을 강요하니 왕권이 실추되어 가던 조선 왕실은 일본의 강압에 항거할 뜻도 힘도 없었던 것이었을까, 결국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던 것이며 이로써 조선 왕실은 일본에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놔준 셈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영산강 유역은 곳곳에서 일본인 주도로 간척사업이 진행되었으며 호리병 모양, 즉 만 형태의 지형은 여지없이 그 목을 막아 간척지로 개발을 하였던 것이며 이 사업이 곧 동양척식회사 사업의 일환이었던것이다.

먹거리가 늘 모자라던 농민들은 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안고 간척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기실 간척사업이 완성되었을 때 상황은 농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고작 소작으로 농지를 할당 받을 수 있었던 것이 피땀이 어린 수고의 대가였던 것이었다.

한 해 농사를 지어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수탈당하고 정작 농사를 지은 농민의 몫은 미미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비단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삼천리강산 방방곡곡 어디에서 이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화농장이 조성된 동기와 시대적 배경은 대략 이러했다.

이윽고 순녀네가 집 앞에 당도했다. 인길댁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인길 양반은 한걸음 나서며

“이고 오니라고 고생했소!”

하고 말하며 인길댁이 이고 온 항아리를 받아 토방에 내려놓은 후 이어서 순녀의 등에 업힌 아기를 받아 마루에 눕혔다.

아기는 순녀의 조카로서 생후 여남은 달 정도 된 남자아이였으며 마루에 눕히자 금세 쌔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잠시 아기를 들여다보던 인길 양반은

“큰 부샄(아궁이)에 솥단지 걸었응께 숨 쪼깐 돌리고 밥을 좀 허소! 등짐 헌 사람들 식사는 해야제.”

하고 인길댁을 향해 말하자

“야~! 그 먼 나는 정제(부엌)로 갈라우.”

인길댁은 흘러내린 까만 무명치마 허리춤을 고쳐매며 부엌 쪽으로 갔고 마당과 잿간에는 복룡촌에서 온 장정들이 지고 온 짐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하다.

“순녀야! 너는 점방에 가서 탁배기(막걸리) 좀 받아오니라! 작은아부지랑 저 아제들 고단허게 했응께 술 한 잔씩 해사제. 자! 이 돈 갖고 가그라!”

인길 양반이 순녀를 불러 흰 저고리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주고는 주머니가 헐거워지는 것을 가늠해보려는 양 쓱쓱 주머니 부분을 슬어 만진다.

“야~! 근디 아부지 점빵이 어디가 있다우?”

순녀가 묻자 인길 양반은

“이 앞 신작로 따라서 건너편 농장에 가먼 첫 집이 점빵이란다.”하고 손짓으로 점빵을 일러주었다.

순녀는 동생 말녀와 반 말짜리 노란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선다. 농장마을의 첫 집, 누가 봐도 장사하는 점빵이다. 초가집의 판자문은 마치 주인이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며 열어놓은 듯 활짝 열려있었다. 순녀가 주인을 부른다.

“아짐! 탁배기 좀 주이쑈!”

안쪽 문이 열리며 얼굴이 거무스름한 중년의 여인이 나온다.

“으응! 탁배기 사러 왔냐? 주전자 인내(이리) 주라! 근디 느그들은 누집 딸이래?”

여주인이 묻자 순녀가 대답한다.

​“쩌기 도덕지 박 팽래 씨가 울 아부지고 울 오빠는 박 대전이여라우.”

​“아! 그 다리 똑 앞에 이사 오는 집 딸이구나?”

바람결에 들었을까 점빵 여주인네는 순녀네의 이사 소식을 벌써 알고 있었으며 술독에서 술을 퍼 주전자에 넘실거릴 만큼 담아 순녀에게 건네며

“어푸러지지 말고 잘 들고 가그라이!”

당부하며 주전자를 순녀에게 건네준다.

탁배기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매, 탁배기 반말이면 열너댓 근의 무게일 것이며 이는 열두 살 여아에게는 무거운 무게일 것이다. 순녀는 무거운 듯 주전자를 든 반대편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앞장을 서서 걸어간다.

“언니야! 쩌기 저 동네는 무슨 동네야?”

뒤따르던 말례가 묻는다.

​“응! 삘건(빨간) 산 밑에 쩌그는 백호동이여.”

이즈음 동리 주변의 산은 빨갈 수밖에 없었다. 땔감이 될 만한 나뭇가지나 낙엽, 마른 풀 따위는 모두 베어가고 긁어가니 산이 민둥산일 수밖에. 동생의 물음에 순녀는 다정스런 말투로 대답해준다. 또다시 말례가 반대편 들 건너 아랫녘을 갈치며

“글먼(그러면) 쩌그는 어디야?”

하고 묻는다.

“응! 거그는 돈도리여. 그라고 거그 오른편은 산두…, 쩌그 우리 동네 외약편(왼편)은 월곡이고 쩌 앞에 우리 동네 너 메(너머)가 아까 우덜이 지나온 시름목이단다.”

순녀의 설명은 장황하고도 소상했다. 두 자매가 걷는 길은 신작로라 했으며 길 가장자리에 협궤선로가 깔려있고 이 선로는 공출미를 나르는 선로이다.

이 길에서 보면 월곡의 왼쪽으로 나지막한 능선이 흐르고 이 능선의 끝자락에 도덕지가 있으며 도덕지 앞으로는 너른 들판 영화농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저 아래쪽 들판의 끄트머리 영산강 둑 너머로는 장승처럼 우뚝 선 석양빛에 물든 영암의 월출산이 희뿌옇게 시야에 들어온다.

탁배기 심부름을 마친 순녀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사를 마친 장정들이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창 식사 중이었으며 함께 식사를 하던 인길양반은 식사하다 말고 일어나 술주전자를 받아들며

​“우리 순녀랑 말례 고생했다. 아가! 술 사발 좀 가져오니라!”

새댁인 경주댁에게 소리쳤다. 경주댁은 순녀의 올케언니이다. 이윽고 인길양반은 식사하는 장정들의 뒤를 한 바퀴 돌며 저마다 탁배기를 한 잔씩 권했다.

“오늘 고상(고생) 많이 했네. 자! 목도 컬컬헐 것인디 한 잔 받소!”

“야~! 당숙! 도덕지에서 부자 되이쑈!”

탁배기를 받아마신 장정은 소맷자락으로 입을 훔치며 덕담을 곁들였다.

“그래. 고맙네. 자! 동생도 한잔허소! 자네도 고상 많이 했네.”

“아니라우. 당연히 해야제라우.”

이삿짐을 져 나르며 고생들을 했을 것이지만 모두가 그것을 내색지 않고 도리어 겸손해하며 덕담을 주고받는 여유로운 모습들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순녀네의 이사는 끝이 나고 복룡촌에서 온 장정들은 모두 돌아갔다.

어둠이 내리는 마당에서는 순녀의 동생인 태곤이 긴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목마를 탄 것처럼 마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달음질로 오가며 즐거워한다.

태곤은 다섯 살 남자아이였으며 복룡촌의 좁은 마당보다 갑절은 넓은 이곳, 새집의 마당이 넓디넓어서 좋은 모양이다.

순녀네가 살던 복룡촌 집은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꼭대기 집인 데다 마당도, 방도 다 좁아 순녀네 대식구가 살기에는 많은 불편이 따랐던 데 비해 이곳 도덕지 집은 널찍한 대궐 같았다.

동네 한복판에 자리하여 바로 집 앞이 신작로요 비록 농수로이지만 집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며 마당은 널찍해서 작은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다.

고래 등처럼 덩실한 지붕 아래 긴 마루의 중간쯤 큰방이 있고 그 머리에 광이 있었으며 광 건너가 작은방과 뒤편으로 부엌이다. 큰방의 오른편 마루 끝은 사랑방이고 그 뒤쪽이 큰 부엌이다.

큰 부엌은 큰방과 사랑방으로 문이 나 있어 부엌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 방과 저 방을 드나들 수 있게 돼 있었다. 어린 태곤이 마당을 휘젓고 다니며 즐거워하는 것은 집 안팎의 환경이 이처럼 좋아진 까닭에 있을 것이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마루에 서서 줄곧 지켜보던 인길양반,

“순녀야! 태곤이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니라!”

하고 부엌에 있는 순녀를 향해 소리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순녀는 이내 마당으로 가 더 놀고 싶어 하는 태곤을 끌다시피 하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인길양반은 적삼을 벗어 아랫목의 횃대에 걸고 순녀의 손에 끌려 방으로 들어서는 태곤을 안고 아랫목에 앉았으며 그의 옆에는 늘 복룡촌의 집에서 그랬듯이 낡은 고서가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방이 어둑해지자 인길댁은 윗목에 놓인 호롱에 불을 붙이고 이내 방은 어둠이 걷히었다.

“대전 어메! 점돌에미랑 아그들 좀 다 들어오라고 해요!”

인길댁이 식구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인길댁네 내외와 대전의 처 경주댁, 큰딸 맹심이, 맹심이는 순녀의 언니로 열여섯의 처녀이다. 그리고 순녀와 순녀의 동생 말례와 남동생 태곤에 이어 젖떼기 조카 점돌, 이렇게 여덟 식구가 모두 앉으니 방안은 좁았으며 순녀의 오라버니인 대전은 한 해 전 일본 외유를 하였기 때문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식솔을 거느린 이 댁의 가장 인길양반, 본명은 박팽래이고 나이는 쉰다섯이었다. 마른 듯 훤칠한 키에 피부는 거무스름하고 둥근 테 돋보기안경을 낀 것으로 보아 노안의 진행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우연히 한의서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한의서를 보고 독학으로 침술과 한방의학을 공부하여 중국에서 한의사 자격증을 땄다.

그 실력이 죽은 이를 살릴 만큼은 아니라도 죽을병이 든 사람을 거뜬히 살려낼 만큼은 되어 그 명성을 듣고 복룡촌 언저리는 물론 멀리 섬이나 나주, 영산포에서도 환자들이 찾아왔다. 이러한 인길양반은 방안의 식구들을 빙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이사를 하니라고 다들 수고했다. 대전 어메! 당신도 몸도 약헌디 고상(고생) 많이 했소. 그러고 점돌 에미도 고상했다.”

이렇게 차례로 호명해 가며 이날 노고에 대해 낱낱이 치하를 한 후 다시 말을 잇는다.

“인자(이제) 우리가 살던 복룡촌을 떠나 여그다 둥지를 틀었응께 복룡촌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살아야 헌다. 복룡촌보다 집도 크고 앞에 들도 좋고 지금은 비록 논 두 배미에 밭이 한 자루이제만 열심히 노력하면 전답도 더 살 수 있고 잘살 수 있다. 일본 간 느그들(너희들) 오래비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하것냐.”

여기까지 말을 하던 인길 양반은 말을 멈추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큰아들의 부재함을 한탄하는 한숨 아닐까. 잠깐이지만 방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으며 침묵을 깬 사람은 순녀의 언니인 맹심이었다.

“아부지! 목마르시면 물 좀 드릴께라우?”

하고 묻자 인길 양반은 고개를 끄덕인다. 맹심의 호리호리한 몸매는 여지없이 제 아버지요, 선한 눈빛에 갸름한 얼굴은 영락없는 제 엄마의 모습이었다.

맹심이 두 손으로 물잔을 건네자 인길양반은 한 모금 길게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점돌 에미 잘 듣거라! 점돌 애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것지만은 남자들이란 안사람 하기 나름이다. 너는 어째서 이 아그가(아이가) 일본행을 했는지 잘 알 테제? 뭣을 어떻게 하라고 다 일러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요담에 점돌 애비가 일본서 돌아오면 잘해사 쓴다!”

경주댁은 부엌문 옆에서 돌아앉아 무릎의 아이에게 젖을 빨라며 고개를 잔뜩 꺾어 숙인 체

“야(예)~! 근디 아버님 저도 잘 헐라고 허고 있어라우.”

하고 대답한다.

“잘 헌닥 허는 것이 고작 고것이냐?”

인길양반의 안색은 붉어지고 말투는 날카로워졌다. 그렇지만 젊은 경주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체 표정의 변화가 없이 대꾸한다.

“제가 타고난 것이 그런디 어찌게 허요.”

조금은 반항적인 어조였다. 어쩌면 체념적인 것인지 경주댁의 정확한 감정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불안스러운 모습으로 지금껏 듣고만 있던 인길댁이 끼어든다.

“새아가! 어르신이 말하면 ‘예.’ 하고 고개를 숙여야지 말대꾸하면 못쓴다.”

인길댁은 며느리를 새아가라고 불렀으며 시아버지에게 말대꾸하는 며느리를 꾸짖은 후 인길양반을 향해

“대전 아부지! 너머(너무) 홰(화) 내지 마시쑈! 잘 헐 테지라우. 내가 잘 타이를라우.”

“…알었소!”

그러나 인길 양반은 여전히 가시 돋친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인길 양반의 며느리에 대한 생각이 좋지 않던 중의 어느 날이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경주댁이 접시를 떨어뜨렸다. 평소 왈가닥거리는 행실의 산물이다.

​“쨍그렁”

“우메, 성님! 접시가 깨져 붓소.”

옆에 있던 순녀가 놀란 눈으로 깨진 그릇을 쳐다보며 말했다,

“쉬! 애기씨(아가씨)! 조용히 해라우! 아부지랑 엄마한테 모른닥 허고 만약 앵키면(들키면) 애기씨가 깼다고 허이쑈이!”

경주댁이 당부하자 순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깨진 접시는 경주댁이 아궁이에 쓸어 넣어 버렸다.

그러나 부엌 뒤쪽에서 한약재를 손질하던 인길양반이 부엌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니 두 사람의 비밀은 이미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해가 질 저녁나절, 인길댁은 아랫동네 공동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고 없었으며 인길 양반은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점돌 에미야 이리 좀 오니라! 순녀 어딨냐? 순녀도 이리 오니라!”

하고 인길양반이 부른다. 두 사람이 토방 머리로 와 인길양반 앞에 섰다.

“아까 점심 먹고 부엌에서 뭣이 깨지는 소리가 나던데 그것이 뭔 소리였다냐?”

“야~, 아버님! 여기 순녀 애기씨가 접시를 내부쳐서(떨어뜨려) 깨졌어라우.”

경주댁이 옆에 선 순녀를 보며 눈을 찔끔하였다. 순녀는 안절부절못한다. 인길 양반은 눈을 부릅뜨고 순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니가 깬 것이 맞냐?”

“…거시기…, 야~, 맞어라우.”

“이 녀석들이 거짓말을 허는구나. 고까짓 거 깨진 접시가 뭣이 그리 대단허다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양심이다. 참말로 순녀 니가 깬 것이 맞냐?”

이때였다. 물을 길어갔던 인길댁이 물동이를 이고 사립문을 들어서 마루 앞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마당 가운데서 우뚝 섰다. 이 모습을 본 인길 양반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헛간으로 뛰어가더니 작대기를 들고나오며

“이놈의 여편네야, 눈구멍이 없어서 저런 여식을 며느리로 데려왔냐?”

​살기 등등하여 인길댁을 후려칠 요량으로 달려들자 인길댁은 이고 있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부엌을 지나 뒤안 쪽으로 도망을 치고 인길양반은 그 뒤를 쫓아간다.

물동이가 마당 가운데 널브러지자 쏟아진 물은 보기 좋게 마당에 지도를 그렸다. 눈치 빠른 순녀가 달려가 쫓아가는 인길양반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인길양반은 혹처럼 달라붙은 순녀를 떨쳐내려 했지만 맘대로 안됐다.

“아가! 놔라! 네 이 저놈의 여편네를.”

“아부지! 이러지 마이쑈! 엄마 죽어 불면 어째게 해라우?”

인길양반은 인길댁을 쫓아 집 주위를 한 바퀴 남짓을 돌다가 혹처럼 달라붙은 순녀 때문에 포기했다. 이전에도 며느리 문제로 인길댁 내외는 여러 차례 다툰 적이 있었다. 그 다툼의 원인은 이런 것이다.

인길댁 내외의 다툼의 원인,

순녀의 오라버니인 대전은 준수한 용모에 풍채 또한 좋은 데다 능변의 재주까지 겸비하여 주변 사람 간에 인기가 좋았다. 이러한 까닭에서일까?

그는 열여섯 살에 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되던 해에 일로 면사무소에 특채로 취직을 하였던 것이며 수려한 풍모와 좋은 직장 등 신랑감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춘 그는 혼기에 이른 뭇 처녀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며 그의 나이 열여덟 혼기에 이르자 순녀네 집 앞은 매파가 줄을 이었다.

자식의 혼사만큼이나 크고 소중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인길댁은 이 매파 저 매파의 말을 들어도 쉽사리 혹하고 구미가 당기는 곳은 없었다. 어느 처자의 얘기를 들어도 자기 아들에 이르지를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느 매파의 절절한 성화에 못 이겨

“그러면 그 처녀를 한 번 보기나 할께라우.”

하고 찾아간 곳이 삼향면 맥포리 극배마을이었다. 처자의 집 대문 앞에 이르러 매파는 인길댁에게 따라 들어오라며 앞서 들어간다. 대문을 들어서자 매파는 빠른 걸음으로 마당 건너 안방 앞으로 향하고 인길댁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집안을 빙 둘러본다.

본체와 사랑체, 모두 기와지붕이었고 기와에 이끼가 낀 것으로 보아 이 집의 기나긴 연조가 엿보였으며 널찍한 마당 끄트머리 쪽으로 반들거리는 장독대가 절반쯤 보였다.

마루 중간쯤 육중하게 선 기둥에는 지난봄에 붙였음 직한 입춘대길이 마름모꼴 한지에 써 붙여져 있었다. 매파가 토방에 서서 인기척을 하자 안방 문이 열렸고 그러자 매파는 인길댁에게 손짓하며 오라고 했다.

안방에서 나온 안주인은 처자의 모친임을 단번에 짐작게 했으며 쪽머리에 비녀를 꽂은 모습이 단정하고도 아름다웠으며 이로 볼 때 처자 또한 이름다운 규수일 것임이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이고! 먼 길 오시니라고 고상 많아겠오. 이리 올라오이쑈! 우리 집 양반은 면(면사무소)에 가고 안 지겠고(안 계시고) 이 애기는 옆집 민자한테 댕기 따달라고 갔는디 아직 안 온 개비요.(오지 않았는가 봐요) 방은 더운께 여그 마루에 앉급시다!”

안주인은 방으로 들어가 방석과 부채를 가져왔다. 팔월 한가위가 지났는데도 날은 더웠다. 인길댁과 매파를 마루에 앉혀두고 안주인은 딸을 데려온다며 마당을 돌아 장독대 쪽으로 갔다.

매파와 인길댁은 마루에 나란히 앉아 무료함을 때우려는 듯 뜻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때늦은 매미 울음소리가 부채 바람에 섞여 너울대듯 들려온다.

“영산아! 영산이 거그 있냐?”

안주인이 담 너머의 이 댁 처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담 너머와 무슨 말인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각을 곤두세우고 듣고 있던 매파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큰애기가 옆집에 있는 개비요(가봐요)? 허기사(하기야) 댕기도 따고 얼굴도 단장해야제”

“큼메(글쎄) 그런갑소.”

잠시 후 안주인이 돌아왔다.

“많이 기다리셨지라우? 멀리서 오셨는디 너머나 실례요. 저기(저기) 딸내미가 오요.”

안주인과 간발의 차로 오늘의 주인공이 대문을 들어섰다.

“영산아! 언능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영산은 제 어머니의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헐레벌떡 뛰는 걸음으로 마당을 건너더니 제 방으로 훌쩍 들어갔고 벗어 놓은 신발은 토방과 마당에 각각 한 짝씩 내동댕이쳐졌다.

안주인은 제멋대로 팽개쳐진 깜장 고무 신발과 인길댁을 번갈아 쳐다보며 겸연쩍은 듯

“가이나가(가시나) 하도 부끄럼을 많이 탄께 저런다우.”

하고 행여 자식의 흠이 드러날까 둘러대는 것이다. 하지만 인길댁은 처자의 방정치 못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너무 수줍음이 많아 그러는지 설래임으로 그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안주인이 딸을 데리고 마루로 나왔다. 딸은 키가 크고 육덕이 좋아 신체가 풍만했으며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으로 걸음이 부드러워졌다. 아마도 아까의 덜렁거렸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능 인사드려라! 너를 보신다고 쩌그 멀리 복룡촌에서 여그까지 오셨단다.”

영산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인길댁 앞으로 다가갔다.

“저, 인사 올리께라우.”

영산은 양손으로 치마를 고이 펴 잡고 바닥에 앉아 상반신을 천천히 구부려 평절을 하였다.

“저 이름이 이 영산이어라우.”

“오이! 반갑네. 올해 몇 살인가?”

“야~! 스무 살 이라우.”

“우리 대전이가 열일곱에 면사무소에 나가고 일 년 지났응께 열여덟인디 두 살 우게네(위네).”

​인길댁은 영산의 큰 키와 풍만한 체형을 바라보며 맏며느릿감으로 적격인 신체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속마음이야 다 겪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왕이면 외양이 풍성해야 신체가 건강할 것이고 그래야 마음 또한 넉넉할 것이며 마음이 넉넉해야 원만한 인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 인길댁의 생각이었다.

두 살이 위면 어떻고 또 아래면 어떠랴! 선남선녀가 짝을 이뤄 잘 살면 그만이지, 나이 한두 살쯤 더 먹은들 어떻고 덜 먹은들 어떨까? 둘 다 파릇한 청춘이요 선남선녀이면 된 것이다.

인길댁은 아까 미심쩍었던 마음이 싹 가셨다. 키 꼴이나 덩치가 마음에 쏙 든 것이다.

맏며느릿감, 맏며느릿감이란 대가족을 이끌 재목이어야 한다. 이 재목이란 어떤 파란에도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켜야 하며 소소한 일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며 경솔하기보다는 때로는 바보처럼 보고도 못 본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집안을 이끌어 나아갈 속 깊고 뱃보 있는 사람이라야 할 것이며 시부모를 봉양함에는 효성이 지극하고 동생들을 거천함에는 자상해야 비로소 준수한 맏며느릿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길댁의 안목으로 영산은 그런 인물로 보였던 것이었다.

아까의 경박스러운 행동과 이마가 조금 짧고 광대가 불거진 것이 이 댁의 처자, 영산의 흠이지만 맏며느리로서 의당히 갖춰야 할 첫 번째 조건인 좋은 풍채의 형상에 비하면 그 흠은 큰 밥솥의 한 알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가씨가 맘에 쏙 들어부어요. 우리 서로 사돈 맺고 싶으요만은...”

속내를 말한 인길댁이 안주인을 쳐다봤다.

“그럼사 좋제라우. 우리 딸이 겁나게 이쁘고 허지는 않제만 맘씨는 좋아라우.”

​안주인은 딸을 놓고 선택받는 처지에 있는 것이며 일의 성사 여부는 인길댁의 결정에 달린 것으로 인길댁이 딸을 선택만 한다면야 이에 반대할 까닭이 없는 것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입이 함박만해진 안주인은 앉은걸음으로 반걸음쯤 인길댁 쪽으로 다가가며

“그러면 올 시한(겨울)에라도 대사를 치께라우?”

하고 인길댁을 바라보며 의중을 묻자 인길댁도 기왕에 할 거라면 서둘러 하자며 날짜는 정하지 않았지만 다가올 겨울에 혼례를 치르자는 것까지 약조했던 것이니 이렇게 하여 대전과 영산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인길댁은 저녁 식사 후 아직 밥상을 그대로 놓은 채 남편인 인길양반에게 선을 본 얘기를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인길 양반은 안경 너머로 인길댁을 바라보며

“어허! 두고 봐야 알 것제만 처자의 행실이 그렇다 허면 당신 너머 서두른 결정을 헌 것 같으요.”

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전 아부지! 너머 염려 마이쑈! 처녀도 처녀제만 그 사돈댁이 야물기도 하고 얌전한 것이 어매를 보면 딸을 알제라우. 그러고 처녀가 아주 듬직해서 딱 맏며느리감이랑께라우. 그렁께 너머 꺽정(걱정) 마이쑈!”

인길양반의 염려하는 마음과는 달리 인길댁은 호언장담하였던 것이며 그리고 그해 겨울, 결국 인길댁의 주장에 따라 대전과 영산의 결혼은 성사된 것이었다.

한겨울이면 가을걷이를 한 들판은 비워지고 곡간은 오곡으로 가득하니 이 오곡을 밑천으로 하여 대체로 겨울이면 대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순녀네라고 다를 바 없었다.

동짓달 스무여드렛날, 이날은 순녀네 오라버니인 대전이 장가를 드는 날이었다. 마당에는 멍석이 빼곡히 깔리고 대형 무명천막이 처졌으며 산해진미로 차려진 상은 멍석 위 곳곳에 여러 닢이 차려졌다.

바람결을 따라 술꾼들의 후각을 자극하는 잘 삭혀진 고릿한 홍어 냄새를 비롯하여 온갖 음식 냄새가 마당에 가득하고 하객들 또한 북적거리고 잔칫집답게 시끌벅적하였다.

봄이 다 갈 무렵이면 보릿고개라 굶주리고 오뉴월 뙤약볕을 이겨내며 논밭을 들락거렸던 것은 이날 이때라도 곯은 배를 채우자는 까닭 아니었던가.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을 불문하고 늘 양식이 모자라던 이 시기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먹거리의 유혹을 뿌리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동네 안에 잔칫집이 생기면 모처럼의 특별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며 대전의 결혼식 날은 바로 그런 날인 것으로 이날 순녀네 집도 예외 없이 모여든 동네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마당 가운데 병풍을 펼쳐 세워 혼례청이 마련되고 초례상에는 암수 한 쌍의 닭이 올려졌으며 그 앞으로 전안례에 쓰이는 비단 보자기에 싼 목각 기러기를 앉혔다.

기러기는 한 번 짝을 이루면 죽는 날까지 평생을 같이 산다고 하며 다산을 상징하는 새로서 신부 측 초례청에서 신랑이 목각 기러기를 신부 어머니에게 앞날을 다짐하는 의미로 전달하는 것이며 이 예가 전안례이다.

하객들은 초례상을 중심으로 마당 한 바퀴 빙 둘러섰다 집전자의 안내에 따라 신랑과 신부가 초례상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원삼 치마저고리에 족두리를 쓴 신부 영산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연두색 저고리와 홍조를 띤 볼은 대조 색이 되어 혈색은 더욱 붉게 보였다.

사모관대를 한 신랑 대전은 치장을 한 까닭에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더욱 돋보였으며 진흙으로 빚은 듯 잘생긴 얼굴에 간혹 미소를 짓노라면 이를 보는 구경꾼 중 아가씨들은 오줌을 저릴 만큼이었다.

앞쪽에 섰던 집전자가 낭랑한 소리로

“신랑·신부 맞절이 있겠습니다. 맞절은 큰절로 신랑이 일 배요. 신부가 이 배를 헙니다. 신랑 일 배!”

하고 신랑에게 지시하자 대전은 두 손을 포개어 전방에 짚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구부려 절을 했다.

신랑의 절이 마쳐지자 집전자가 다시 소리친다.

“신부 재배!”

영산이 시종의 보필을 받아 재배하였다. 신랑이 일 배, 신부가 이 배를 하는 까닭은 신랑은 양으로서 숫자 양의 첫 자리가 1이므로 일 배를 하는 것이요, 신부는 음으로서 숫자 음의 첫 자리가 2가 되므로 재배를 하는 것이다. 혼례식이 이어지던 중 구경하는 하객 중 한 사람이

“각시가 이쁘기도 허네.”

하고 집전자의 말 사이에 끼어들자 이에 응답하듯 그 옆 사람은

“이쁘기도 허고 절도 여간 얌전히 잘 허그만.”

하며 덕담 같은 잡담을 하고 있었으며 기실 신부의 절을 하는 모습은 덩치가 큰 신부와 신부의 거동을 돕는 시종의 왜소한 모습이 체격의 대조를 이뤄 정녕 절을 하는 모습 자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 인길양반은 큰방의 아랫목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며 인길양반의 동생인 헌규가 방으로 들어왔다. 헌규는 술을 마신 모습으로 양 볼이 불그스레하였다.

“거그 앉소! 왜 구경허제 들어오시는가?”

대전의 작은아버지요, 인길양반의 친동생으로서 의당히 혼례식장을 지켜봐야 할 헌규를 향해 인길 양반이 묻자

“형님이 안 뵈이시길래 방에 계시나 허고요.”

하고 헌규가 대답한다.

“거그 앉그소!”

헌규는 상 하나쯤의 간격을 두고 인길 양반 앞에 앉는다.

“식은 잘 치르고 있든가?”

“야! 잘 치르고 있어라우. 근데 성님은 왜 안 나와 보시고 여그 앉거 계시요?”

“동생! 오늘 참 즐거워야 쓸 날인디 나는 즐겁든 않네. 대전이 색시가 영판(썩) 내 맘에는 안 들어. 자네 성수(형수)가 눈이 뼜지, 어째 해필(하필) 그 많고 많은 아그(아이)들 중에 저런 아그를 골랐는가 모르겠네.”

인길양반이 편치 않은 심사를 말하자 뜻밖의 얘기를 들은 헌규는 정색을 하며

“아니 어째서라우?”

하고 물었다.

“그 아그 관상을 좀 보소! 두상은 다마네기 처럼 똥그란데다 주름살 있는 이마는 짧제(짧지) 광대는 솟고 붉으니 대전이 뒷날이 꺽정(걱정)일세.”

말을 마친 인길양반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혼례식이 진행 중인 마당 쪽 창을 바라봤다.

“성님! 성수님이 어디 보통 사람이요? 당신 며느리를, 그것도 맏며느리를 오직이 알아서 골랐을랍띠여! 새 질부가 귀엽거나 아조(아주) 이쁘던 않지만 믿음직 허니 괜찮헙디다.”

“아니여. 아무리 봐도 아니여. 한 집안이 성하고 쇠하는 것은 맏며느리한테 달렸는디 저 아그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네. 그런다고 이 마당에 깽깽거리면서 달리 어떻게도 헐 수는 없제만...”

“성님! 그래도 사람 일을 알 수는 없는 일인께 쪼깐 지켜 보십시다! 여기 댐배(담배)나 피우쑈!”

인길양반은 담배를 받아들었다. 밖은 여전히 예식이 진행 중이었으며 얘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왁자지껄하였다.

이날 대전의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졌으나 인길양반의 안목으로 본 대전의 처에 대한 첫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완고해져만 갔으며 평소 금실이 좋던 인길댁 내외는 며느리에 관한 얘기가 대두되면 얘기는 곧 다툼으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맏며느리로 영산을 선택한 인길댁은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자신을 자책하게 됐던 것이며 인길양반은 인길양반대로 영산을 며느리로 맞게 된 집안의 운명을 놓고 늘 한탄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거무스름하게 그을은 인길 양반의 얼굴빛은 윗목의 호롱불이 바람결에 너울거림에 따라 히뜩거려 보였다. 인길 양반의 눈빛은 아직도 아까의 노기 어린 눈빛이었으며 여전히 빙 둘러앉은 방안의 식구들은 인길양반의 입에서 무슨 말이 이어질지를 침묵 속에서 주시하고 있었다.

인길양반은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인자 도덕지로 이사를 왔응께 복룡촌에서 살던 모습은 다 내뿔고(내버리고) 인자(이제)부터는 마음을 새롭게 고쳐잡고 살아야 쓴다! 제일 먼저 누구든지 성실해야 된다,! 성실허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모든 덕성의 근본이 되는 것이여. 성실허덜 않고는 착허지도 못허고 친구나 이웃과 친허지도 못허며 지혜로울 수도 없는 것이여. 성실허지 못허면 늘 배곯는 생활을 면허덜 못허고 인생은 빈곤해지는 것이다. 말허자면 그런 사람은 사람이 따르덜 않고 사람이 안 따르니까 재물도 안 따르는 법이다. 그렁께 그 인생은 빈곤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래서 누구를 막론허고 성실허게 살아야 쓰고 성실허고 성실허면 하늘도 도와서 인생이 윤택해지는 것인께 이 방에 있는 우리식들은 누구라도 성실해야 쓴다! 순녀야! 알었냐?”

인길 양반은 말을 마치면서 순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태곤아! 나 물팍(무릎) 아픈께 엄마한테 가그라!”

순녀는 대답 대신 딴전을 피우며 자신의 무릎에서 장난질하던 태곤을 밀쳐냈다. 나이보다 조숙하다 해도 열두 살 순녀가 인길양반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인길양반이 굳이 어린 순녀를 불러 물은 것은 방 안의 모든 사람에게 묻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인길양반은 다시 영산과 맹심을 부른 후

“느그들은(너희들은) 내 말을 명심허기 바란다!”

하고 당부한다.

“야~아.”

영산과 맹심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대답했다. 밤이 깊어 감으로 바람은 차가워지고 뒷산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으며 순녀네의 이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듬해 서기 1941년 춘삼월의 어느 날, 순녀는 한 동네 사는 같은 또래 친구들과 도덕지 앞 영화농장의 농로를 따라 영산강둑으로 나물을 캐러 가고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갯내 배인 훈풍이 불어오고 지난해 가을걷이 후 빈 논바닥에는 밑동이 잘린 마른 벼포기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잡초들은 미풍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느 풀숲에 둥지를 틀었는지 종달이는 봄바람을 타고 높이 떠서 지저귄다. 들판을 건너서 순녀 일행이 영산강둑에 이르렀다.

“아그들아! 물이 다 썼다.”

일행을 앞서 둑에 올라선 부담이가 아직 둑을 오르는 순녀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메 숨찬 거. 정님아! 여그 쫌 앉거서 쉬자!”

순녀가 뒤에 따라온 일행들에게 말하며 털썩 주저앉자 일행들은 헐떡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나란히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영산강 둑은 들판과 강을 경계 짓는 둑으로 돈도리와 용당 끝에 이어져 있다. 간척사업으로 이 둑이 완공되자 태곳적부터 들락거렸을 물길은 막히고 대신 너른 들, 영화농장이 생긴 것이다.

본둑의 공사는 이미 수년 전에 끝난 것이지만 본둑 앞 밀물이 부딪히는 쪽의 석축을 쌓는 보강공사가 아직 진행 중으로 둑의 오른쪽 끝인 돈도리 쪽에서는 둑을 오르내리는 인부들의 히뜩거리는 모습과 암반을 발췌하는 발파장의 모습이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썰물에 물이 다 빠져나간 강바닥은 뻘밭, 민 바닥을 넓게 드러내고 있었으며 갯벌 위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게들이 먹이 활동을 하느라 바쁘게 기어 다닌다.

저 멀리 강 가운데쯤엔 촛대 모양의 우뚝 선 멍수바위 모습이 아스라이 바라보이고 남동풍이 불어와 이마를 가르니 바람결은 감미롭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언니! 기(게)가 말도 못 허게 많네. 들어가서 잡으까?”

순녀와는 일가이며 10촌 동생인 정님이는 뻘밭 위에 널브러진 게들을 바라보노라니 잡고 싶은 마음이 발동되는가 보다.

“아따 이것아! 저것들이 저렇게 있어도 잡으려고 가면 다 구멍으로 들어가 불고 한 마리도 없어야. 오늘은 나물이나 캐고 우덜 나중에 맛(맛조개)이나 잡으러 오자!”

“응! 언니, 맛을 잡으러 올 때 나도 데꼬(데리고) 와줘!”

“그래. 알았어야. 근디 양근예야! 쩌그 강 가운데 말뚝같이 서 있는 것이 뭐이데?”

​말뚝같이 서 있는 것, 그것은 강의 중심에 촛대 모양으로 우뚝 선 멍수바위를 지칭한 것이었다. 양근예는 순녀와 동갑내기로 일행 중 도덕지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터라 순녀는 양근예를 불러 물은 것이었다.

“느그들아! 쩌 바우(바위) 얘기를 모르냐? 쩌 바우 이름이 멍수바운디 어째서 멍수바운가 내가 이야기해 볼 것인께 들어봐라!”

양근예는 긴 얘기를 하려는 듯 일행 쪽으로 몸을 돌려 앉더니 헛기침으로 목청을 다듬은 후 얘기를 시작했다.

멍수바위,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 물길을 따라 돈도리에서 십오 리 가량 하구 쪽으로 가다 보면 소댕이나루가 나온다. 오래전 이 마을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과부에게는 약간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외아들이 하나 있어 단 두 식구로 살고 있었으며 아들이 모자란 탓에 마을 사람들은 그 아들을 멍수라 불렀다.

과부는 논밭은커녕 텃밭 하나 없이 찢어질 듯 가난해서 유일한 생계 수단이 갯일이었다. 날마다 강물이 써는 때를 기다려 뻘밭에서 맛을 잡는 것이 과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렇게 갯일을 하는 중 그나마 사리 때 만큼은 수지가 맞는 때이다.

촛대바위, 돈도리 앞 영산강의 가운데쯤에 촛대 모양으로 선 바위이며 썰물에 모습을 드러내고 밀물에 잠기는 높이 5~6m 정도 크기의 바위이다.

평소보다 물이 많이 써는 사리 물때가 되면 촛대바위 언저리 자갈밭이 바닥을 드러내고 그곳에 무수히 많은 석화(굴)를 딸 수 있기 때문에 사리 물때는 과부가 기다리는 때였던 것이며 수지가 좋은 때인 것이다.

어느 날 사리 물때가 되었다. 이날을 기다렸던 과부는 썰물이 시작되자 아들 멍수와 배를 타고 촛대바위로 갔다. 썰물은 아래쪽으로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으며 촛대바위 언저리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무이 조심해서 내리쑈!”

“오냐! 물이 더 쓰면 쩌참처럼(저 번 처럼)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헌께 언능 가거라! 글고 해름에 들물 맞춰서 오니라!”

“야! 갔다가 올게라우.”

멍수 엄마는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촛대바위에 내리고 멍수는 물이 다 써버릴세라 다급히 배를 몰아 소댕이마을로 돌아갔다.

이날 때마침 소댕이마을에 잔칫집이 있었다. 멍수가 잔칫집에 이르자 평소 멍수를 가여히 여기던 동네 아낙들은 먹음직스런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린 후 술까지 한 병 곁들여 마당 한 켠에 놓아 주자 그렇지 않아도 시장했던 멍수는 술과 음식을 배부르게 먹어치우고는 잔칫집의 일손도 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갯일 나간 엄마를 생각한 멍수는 포구로 나가 뱃전에 앉았다. 고삐를 매어 놓은 배는 파도 따라 한들한들 흔들거리고 잠시 눕겠노라고 배에 누운 멍수는 술기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촛대바위 석화를 따는 멍수 엄마는 그동안 딴 석화로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멍수를 기다렸다. 강물은 쏴쏴 드센 기세로 들어오고 촛대바위 언저리는 조금씩 물에 잠겨갔다.

그러나 이미 나타나야 할 배는 보이지 않고 요동치는 물결 위로 갈매기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다닌다.

밀물은 점점 드세지고 표정이 굳어진 명수 엄마는 무섭게 밀려드는 밀물에 밀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으로 바구니를 옮긴다. 소댕이 나루를 바라보며 명수 엄마는

“멍수야~! 멍수야~!”

목이 터져라 외쳐대지만 배는 보이지 않았다. 물은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물속에 잠겨 흐릿하게 보이던 석화 바구니는 물살에 쓸려 가버렸지만 다급해진 마음에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멍수 엄마는 촛대바위를 뒤로 붙잡고 서서 멍수를 부르고 또 부르지만 애절한 울부짖음 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온데간데없을 뿐이다. 마치 구르듯 회돌이 치며 무섭게 들어오는 밀물 앞에 가녀린 여인네는 체념 어린 울부짖음 외에 속수무책이었다.

물은 가슴까지 차오르고 안간힘으로 촛대바위를 붙들고 있던 멍수 엄마는 끝내 물속으로 빨려들 듯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과부는 죽었다.

그 시간, 파도 따라 흔들리는 배에서 잠을 자던 멍수가 잠에서 깨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아뿔사! 물은 이미 나루터까지 벙벙히 차올랐고 멀리 촛대바위는 밀물에 잠긴 뒤였다.

“어무이~! 어무이~!”

사태를 짐작한 멍수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음 범벅이 된 절규는 잘게 부서지는 파도 위로 사라져 갈 뿐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고 멍수는 울고 또 울다가 지쳐 엄마가 휩쓸려갔을 촛대바위를 바라보지만, 촛대바위는 자취를 감추고 만수가 다된 강물 위로 쓸쓸히 어둠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멍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갯가로 나와 촛대바위를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제 어머니를 부르고 그러다 쓰러지기를 거듭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멍수의 울부짖음은 계속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엄마를 외쳐대던 멍수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서러운 삶을 맺게 되었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엾은 멍수의 주검을 양지 녘에 묻어주고 이후로 촛대바위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멍수바위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양근예는 멀리 보이는 멍수바위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자신이 한 이야기임에도 슬픈 사연에 젖은 듯 눈망울이 젖어 있었다.

“아그들아! 언능(빨리) 나물 캐자! 해가 중천을 지났어야.”

순녀의 독려에 침울했던 분위가 걷히고 이야기를 듣느라 저만치 흘러버린 시간에 놀란 듯 저마다 나물 바구니를 챙겨 나물을 뜯기 시작했다.

나물 뜯기에 여념이 없는 시각, 널따랗게 등허리를 내놓았던 뻘밭 저 아래로부터 물이 들기 시작했다. 밀물이 시작된 것이다. 멀리 보이는 멍수바위는 이미 허리춤까지 물이 차올라 키가 반 토막으로 줄어 있었으며 희뿌연 수면에서는 햇살이 부서지며 반짝거렸다.

아직 밀물이 들지 않은 둑 밑의 갯벌 위에는 게들이 제 구멍을 파내느라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새끼손가락만한 짱뚱어들은 먹이활동을 하느라 뻘 위를 팔짝거리며 뛰어다닌다. 가끔 작은 분수처럼 물줄기가 솟는 것은 맛조개가 물을 내뿜는 모습이다.

영산강의 갯벌, 영산강의 발원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가마골 용소에서 시작된다. 용소를 출발한 자그마한 실개천은 한반도의 서남쪽으로 흐르며 좌로는 무등산 줄기와 우로는 서해 쪽의 구릉과 같은 작은 산줄기들의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내리며 여러 차례의 지천을 만날 때마다 강 너비가 넓어진다.

이렇게 영산강은 담양의 용소로부터 흘러내리며 강 유역에 나주평야와 크고 작은 많은 들판을 만들고 하구인 목포 앞을 지나 서남해로 흘러드는데 그 길이는 약 150여km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듯 내륙 깊은 곳에서 발원한 영산강이 하구로 흐르며 수만 년 동안 내륙 쪽, 미립자의 진흙을 하구 쪽으로 실어와 갯벌이 조성된 것인데 영화농장 앞 갯벌도 그중의 한 곳으로 갯벌이 가장 잘 발달 되고 너비도 넓다.

상류의 진흙 입자들은 강물 따라 강 하구까지 흘러내리다 밀물을 만나면 다시 밀물 따라 역류하고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강바닥에 가라앉아 퇴적된 것이 영산강 하구의 갯벌인 것이다.

유수의 내력이 이러하니 어느 흘러간 옛 유행가의 가사처럼 영산강을 흐르는 물은 푸르지를 않고 늘 횟가루를 풀어놓은 듯 구정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흐르는 강물의 구조가 이러하니 흙가루의 입자가 얼마나 고울 것이며 수만 년을 흘러내렸을 것이니 갯벌의 층이 두터워 어패류가 서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갯벌의 깊이는 대략 성인이 들어가면 보통은 허벅지 정도는 들어간다. 이 뻘밭에서 잡히는 대갱이는 가을, 겨울이라야 제맛인데 된장에 고추장을 조금 풀어 토막을 썬 대갱이를 넣고 국을 끓이면 그 맛이 일품이다. 그야말로 단백질의 보고인 것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운저리, 운저리는 더위가 가시고 찬바람이 나기 전이 가장 맛이 좋은 때이다. 퍼덕거리는 운저리를 도마 위에 놓고 칼로 지느러미를 쳐낸 다음 등을 갈라 배 안의 것을 다 긁어낸 후 보통 두세 토막을 내어 농익은 열무김치에 싸 먹어도 좋고 매운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운저리와 싸 먹어도 되는데 조금 큰 놈들은 대가리를 칼 뒤통수로 쪼아서 뼈를 부드럽게 으깬 다음 된장 고추에 싸 먹노라면 그 맛이 회 중에는 으뜸이라고 할까 어쨌든 막걸리를 좋아하는 애주가들에게는 둘도 없는 안줏거리가 된다.

이곳 뻘밭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맛조개이다. 여느 갯벌에서 잡히는 맛조개보다 껍질 색깔이 하얗고 농도 100%의 뻘밭에서 잡히기에 삶아서 까먹어도 돌이 씹히지 않으며 국물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술 마신 뒷날 아침에 맛조개를 끓여 이 국물을 마시면 속이 편안해지는데, 문제는 이 국물을 마시면 좋은 안줏거리가 되기 때문에 또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갈게, 갈게의 다 자란 성체 크기는 밤톨만큼이다. 색깔은 짙은 회색이며 보호색으로 뻘 색깔과 같다. 갓 잡은 싱싱한 놈의 뚜껑을 따고 몸체를 두 토막 내어 막걸리 식초와 양념에 버무려 회무침을 하면 파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잡은 갈게는 별 양념 없이 무 깍두기와 소금에 절였다가 겨울에 밥반찬으로 먹으면 약간은 골골한 맛이지만, 이 또한 별미다.

이처럼 영산강의 갯벌에서 잡히는 어패류는 그 맛이 모두가 독특하면서도 찰졌다

해가 뉘엿거리는 시각, 순녀는 나물 캐러 갔던 일행과 헤어지고 자신의 집 마당에 들어섰다. 토방에 놓인 낯선 까만 신발을 보고 누군가 한약을 지러 왔는가 보다 생각하며 나물 바구니를 마루에 놓고 부엌 쪽으로 간다.

부엌에는 밥을 짓느라 인길댁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태곤이 부지깽이를 들고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서는 순녀에게 인길댁이 묻는다.

“워따워따(아이고머니나 정도) 뭣 헌다고 인지(이제)까지 있다 오냐? 노물(나물)은 많이 캤냐?”

“야. 쑥하고 곤바물노물인디 물레(마루)다 놨어라우.”

“고상했다. 갖고 와서 따듬어라! 시름목 응만이 아제 오셔갖고 아부지랑 바둑 둔께 노물 따듬어서 된장국이나 끓여야 쓰겄다.”

순녀가 마루에 두었던 나물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아랫동네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던 경주댁이 물동이를 이고 순녀 뒤를 이어 들어온다.

물동이를 인 경주댁은 가득 찬 물동이 무게로 끙끙거린다. 공동우물은 순녀네 집에서 2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덩치가 좋은 경주댁이라 해도 끙끙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순녀가 경주댁을 거들어 물동이를 내려 주고 경주댁은 움츠러든 어깨를 뒤로 제치고 휴~ 하며 긴 날숨을 내쉬었다.

“오메! 애기씨 쑥을 많이 뜯어 갖고 왔네. 내가 따듬어서 삶을랑께 애기씨는 점돌이 좀 델꼬(데리고) 오이쑈!”

점돌이는 이제 아장걸음을 걷는 순녀의 조카, 그 조카를 데려오란 것이다.

“그래라! 아까 해름에 말례가 업고 나갔응께 언능 가서 델꼬 와라!”

하고 인길댁이 말하자 순녀는 부엌을 나섰다.

이윽고 밥상이 차려지고 새댁, 경주댁이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는 아직도 바둑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돌부처처럼 앉아있다.

“이 사람아! 대마가 잡혔응께 독(돌)을 띵기소!”

인길양반은 들고 있던 바둑알을 돌 통에 놓으며 고개 너머 신원목 응만을 바라보았다. 응만은 인길양반보다 손아래였으며 바둑에서 지게 된 핑계를

“글씨! 성님! 흰 독(돌) 고놈 한나 땜세 대마가 다 잽혀 불었소.”

하고 둘러댔다.

“인자(이제)부터는 두 점 깔고 접바둑을 둬사 쓰겄네.”

“아따! 성님! 고 흰 독 하나 갖고 줏어 묵기로 어쩌다 이겼음서 그러시요! 아무짝에도(아무래도) 두 점 접바둑은 무리제라우.”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 흰 돌 한 점으로든 검은 돌 한 점으로든 진 것은 진 것이다. 응만이 아쉬운 듯 승부를 인정하며 돌을 바둑판 위에 던진 후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인길양반이

“그리 앉그소! 때가 돼얐응께 밥은 드시고 가사제(가야지)!”

하고 일어서려는 응만을 제지했다.

인길댁도

“아따! 차린 것은 없어도 한 끼 때우시고 가이쑈!”

하고 인길양반의 말을 거들었다.

끼니때 밥상머리로 손님을 붙드는 순녀네의 밥상머리 인심은 여느 집 못지않았다. 응만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밥상머리에 앉았다.

저녁상은 늘 그랬듯 두 닢의 상이 놓여졌다.

안쪽은 여인네들 상이요 앞문 쪽에는 인길양반을 비롯하여 손님들이나 태곤이 점상을 한다.

식솔은 돌배기 점돌부터 인길 양반까지 3대에 걸쳐 대식구이며 거기에 늘 면사무소에서 찾아오는 손님, 아파서 찾아오는 환자, 그도 아니면 바둑을 두자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빈번하여 그들 또한 식솔의 일부가 되니 순녀네 식솔은 늘 넘쳐나는 대식솔이었다.

밥상은 산해진미에는 못 미치지만 오지, 빈촌의 여느 집 밥상보다는 찬거리가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지에서 인길양반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돈보다 현지의 산물들을 가져오는 까닭에 순녀네 밥상은 늘 여느 부잣집 밥상에 못지않은 것이다.

식사 중 응만이 물었다.

“성님은 언제 한의원 자격을 따겠습디여?”

“여나무 해 전에 만주에서 땃제. 나는 딴 처방보다 침술을 많이 공부했고 한의들의 처방순서가 일, 침이요 이, 부황에 삼, 약이 아니던가? 웬만하면 병부와 병인을 따져 그 맥을 찾아내고 침으로 맥을 뚫어 주면 부황보다도 약보다도 제일 빠르고 쉽게 병을 다스릴 수 있제.”

“그런다우? 허기사 나도 얘기는 들었소만 갈산 병술 씨도 성님 침으로 돌아간 입을 잡아놨담서요?”

“틀어진 얼굴 잡는 것이사 어렵지 않제. 고것이 구안와사인디 틀어지기 시작할 적에는 침 몇 방이면 잽혀 불제. 근디 틀어지고 시일이 오래되면 그만치 치료도 오래 걸리고 어렵제.”

인길양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응만이 화제를 돌렸다.

“시방 우리 동네 이장을 정 수원씨가 보는데 올 가실(가을)부터 성님이 맡어서 허면 어쩌겄소? 복룡리 이장을 성님이 잘 봤다고 허드만. 여그 이장도 성님이 한 번 맡어 보이쑈!”

“글씨! 동네 일이람사(일이라면) 나도 허고 싶네만 딴 분들 의사도 있을 것이고 시방 정 수원씨가 잘 허는디….”

하고 인길양반은 딱 자른 대답은 안 했으나 이날 밥상머리 두 사람 간의 논의가 바탕이 되어 이해 가을부터 인길양반은 산정리 이장을 맡게 되었다. 그 해당 부락은 산제이, 방뫼, 동뫼, 월곡, 신원목, 도덕지, 여섯 개 마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서 응만이

“아따! 아짐! 쑥국이 구수허니 좋네요.”

하고 만찬 후사를 말하자 인길댁은 순녀를 가르치며 쑥국의 내력을 말해 준다.

“그래라우? 맛이 괜찮허시오? 아적(아침) 나절에 저 우리 순녀가 들 아래 강가에 뚝에서 뜯어 왔다우.”

“순녀야! 쑥국에다 밥 잘 묵었다.”

응만이 순녀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순녀가 대답한다.

“아니여라우. 쑥은 제가 뜯어 왔제만 우리 성님이 국을 잘 끓여서 맛있응께 우리 성님한테 고맙닥 허이쑈!”

“허허허! 순녀가 올해 몇 살인디 저렇게 야물게 대답을 헌다우?”

“올해 열세 살이라네. 자식 자랑, 처 자랑을 허면 팔불출이락 허데만 우리 순녀가 뭣이든 허기만 허면 야물게 해 불제.”

하고 인길양반이 순녀를 쳐다보며 딸 자랑을 했다.

“아따! 순녀가 내중에는(나중에는) 한 인물 허겄다.”

응만이 추켜세우자 순녀는 양 볼을 붉히며 수줍어한다.

“경주떡(댁)! 오늘 저녁 잘 얻어묵었소. 인자 나는 실례헐라우.”

응만이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인길양반은 마루에 서서 마당을 건너는 응만의 뒤에 대고

“담에 바둑 둘라먼 두 점은 깔아야 쓰겄네.”

하고 농담조의 인사를 하자 응만은 뒤를 돌아보며 대꾸 없이 코웃음을 지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둑을 두는 재미로 순녀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은 응만 말고도 광암의 임 태현과 도덕지의 박 석규 외 몇 명이 더 있었으며 이렇게 순녀네 봄날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1942년도 시월 하순의 늦은 가을,

논 가운데 순녀네 식구들은 가을걷이를 하고 있다.

순녀를 비롯하여 인길댁과 경주댁 그리고 순녀의 언니인 맹심이, 순녀네 식구들 중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네 사람이다.

순녀의 아버지는 들에 나가 일 좀 해본답시고 농구를 손에 잡을라치면 시작도 전에 집에 손님이 왔다며 데리러 오기가 일쑤였다. 면사무소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든가 아니면 아픈 환자가 찾아오든가 그도 아니면 동네의 일로 주민들이 찾아오는 등 인길양반을 찾는 이들이 많기에 아예 들판에서 일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며 노동력이 왕성할 대전은 일본에 외유 중이요, 말례, 태곤, 점돌, 이 세 사람은 아직 어린 관계로 노동력을 가진 사람이란 오직 네여인들 뿐이었다.

이들 네 식구는 영화농장 복판쯤에 있는 논에서 논바닥에 늘어져 있는 나락 뭍을 낱가리로 쌓고 있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정오를 넘기며 백호동 쪽에서 서풍이 불어온다.

해마다 이맘때면 편서풍이 많이 부는데 이 바람은 하루 중에도 점심때를 지나 해 질 녘에 드세지므로 사람들은 이 바람을 햇구녘 바람이라 부른다.

나락 뭍을 옮기던 인길댁은 힘에 겨운 듯 양손으로 뒤 허리를 짚고 어깨를 펴며 ‘휴우~’ 숨을 길게 내쉰다.

이 모습을 보고 나락 뭍을 들고 옆을 지나던 맹심이

“어메! 쪼깐 앉거서 쉬었다 하이쑈! 힘드실 텐디….”

하고 인길댁에게 말한다.

“오냐! 괜찮허다. 느그들이 힘들제 나는 괜찮허다. 그나저나 어지께 우박을 맞고 나락이 많이 떨어져 불었다. 철렁거리면 나락이 다 떨어진께 쌀쌀(살살) 들어 날려라!”

​손대가 없어 가을걷이가 늦어진 데다 어제 우박이 쏟아진 까닭에 나락 뭍을 들적거릴 때마다 이삭은 우수수 쏟아진다.

경주댁과 순녀는 경주라도 하는 양 나락 뭍을 이고 들고 앞다퉈 옮긴다. 인길댁이 순녀를 불러 말한다.

“순녀야! 하이나(행여나) 뺑끼(페인트) 칠 헌 놈은 절대 갖고 오면 못 쓴다이!”

“야! 어메 알았어라우.”

공출미,

영화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마을은 들판의 아래쪽 마을인 돈도리를 시작으로 하여 산두, 농장, 백호동, 방뫼, 월곡, 도덕지, 신원목, 회산, 양도, 두래미 이상의 부락인데 가을에 벼농사가 끝나면 농사를 지은 농민들로부터 들판의 개척자인 일본인이 일정량의 공출미를 거둬 갔다.

공출미를 관리하는 담당자는 일본인 ‘소나다’라는 사람이며 그의 하수인으로 농장의 집사인 일본인 ‘히도미’라는 젊은 사람이 있고 공출미를 직접 거둬들이는 일은 히도미가 하였다.

일본식 목조건물로 지어진 소나다의 사옥 옆에는 검은 칠을 한 양철지붕의 정미소가 있고 공출미는 이 정미소에서 도정을 하여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이었다.

벼 베기가 끝나면 벤 벼를 뭍으로 묶어 논바닥에 줄지어 늘어놓고 소나다의 관리하에 네 뭍 건너 하나씩 하얀 페인트를 묻히는데 이렇게 페인트가 묻은 벼가 이른바 공출미가 되는 것이며 네 뭍 건너 하나에 페인트를 묻히니 공출미는 지은 농사의 2할인 셈이 된다.

인길댁이 순녀에게 뺑끼 운운한 것은 행여나 공출미에 손대지 말라고 단속하는 것이었다.

해가 백호동 뒤 서산에 뉘엿거릴 즈음이 다 되어 나락 뭍을 옮기는 일을 모두 끝내고 순녀네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머리에는 제각기 자신의 양껏 머리에 나락 뭍을 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동네에는 집집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평온을 상징이라도 하듯 초가지붕 위로 곧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녀네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당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으며 들에서 먼저 온 경주댁은 이미 밥상을 차려 놓고 식구들이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부이는(아버지) 오셨냐?”

인길댁이 부엌에 대고 경주댁에게 묻는다.

“당아(아직) 안 와겠어라우.”

면사무소에 일 보러 간 인길양반은 아직 귀가 전이었다.

“어메! 언능 밥 묵어!”

마루에서 제 누나를 따라 놀고 있던 태곤이 인길댁을 보자 밥 먹기를 재촉한다. 한창 성장기에 이른 아이로서 끼니에 이리 배가 고플 것은 당연한 것이다.

“태곤아! 쬐끔만 기다려라! 어메가 물 한 동우(동이) 여 올 것인께 쪼깐 있다가 묵자!”

인길댁은 물 긷는 시간을 빌어 집안의 어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싶은 것이었다.

빈 물동이를 들고 나서는 인길댁에게서 순녀가 물동이를 낚아채듯 하며

“어메! 힘드신디 방으로 들어가이쑈! 물은 내가 여 올랑께.”

하고는 물동이를 들고 아래 우물로 갔다.

순녀가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올 즈음 때마침 면사무소에 나갔던 인길양반과 집 앞에서 마주쳤다.

하얀 무명 두루마기의 늘어진 옷고름이 늘씬한 키와 잘 어울리고 중절모에 둥근 테 안경이 중후한 멋을 도드라지게 하는 인길양반, 저녁 바람에 늘어진 옷고름이 하늘거리는 모습은 마치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처럼 유려한 모습이다.

그는 면사무소에 나갈 때나 먼 길 외출 시에는 늘 이 복장을 하였으며 순녀는 그런 아버지가 누구보다 멋지고 존경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아부지! 잘 다녀와겠오?”

“오냐! 무겁겄다. 언능 가자!”

​인길양반은 순녀가 이고 있는 물동이를 염려하며 순녀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순녀가 이고 온 물을 부엌 구석에 놓인 물항아리에 붓고 방으로 들어섰다.

저녁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 닢이 놓였다.

인길양반이 두루마기를 벗어 횃대에 걸은 후 밥상머리에 앉자 이를 기다렸던 식구들이 다 같이 상 주변으로 둘러앉는다.

안쪽 상은 여인네들의 상이요, 바깥쪽 상은 인길양반과 태곤이 겸상을 하고 세 살배기 점돌은 인길양반의 무릎에 앉았다.

태곤의 나이 일곱 살,

한창 성장기의 아이이니 얼마나 많은 영양소가 필요할 터, 한 그릇의 밥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는 아쉬운 듯 숟갈을 놓지 못하고 입맛을 다신다.

인길양반은 그런 태곤의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점돌의 입에 연신 밥을 먹여 준다.

이를 아는 순녀가 먹던 밥그릇에서 크게 한 술을 덜더니 태곤의 밥그릇에 덜어주자 태곤은 배시시 웃더니 이번에도 뚝딱 해치운다.

순녀는 동생의 이런 모습이 안타까운 듯 바라보다 인길양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아부지! 작년에 본께 쩌기 우갯쪽(위쪽) 육답에 보리농사를 허든디 우리 논에도 보리를 갈면 좋겄어라우.”

열네 살 어린 나이지만 모자라는 식량 탓에 애달파 하는 엄마를 보고 궁여지책의 생각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인길양반은 딸의 생각을 기특히 여겼던 것일까 허허하고 웃더니

“우리 순녀가 기특허게도 그런 생각을 허는구나. 글씨 찌럭찌럭한 뻘 바닥에 보리가 잘 될지 모르겄제만 그런다고 꼭 안되란 법이사(법이야) 있겄냐.”

하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에 이어

“우리 여덟 식구 곡식으로 한 배미 농사 열 석(섬)하고 구장료 쪼깐씩 받는 것에다가 아픈 환자들이 치료비로 가져오는 양석이(양식) 전부인디 대체 양석이 모자란께 순녀 말대로 올 가실걷이가 끝나고 논이 비면 논에 보리를 갈아봐야 쓰것다.”

한 배미(8백 평) 벼농사를 지으면 대략 열 섬 정도의 수확을 할 수 있었고 순녀네 전답은 밭 한자리와 논 너 마지기가 고작이었으므로 일 년 농사로 얻어지는 양곡은 벼 열 섬과 약간의 밭작물 그리고 가가호호마다 거둬들이는 약간의 구장료가 전부였다.

구장료는 벼농사 끝에 벼가 한 말이요, 보리 철에는 보리가 한 말이지만 수확을 적게 한 농가는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구장료가 양식에 크게 보탬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모자라는 양식의 현실을 해결할 방법이 호구지책으로 뻘등 논이지만 그곳에 보리를 갈아보자는 순녀의 발상에 인길양반은 식량난을 해결할 묘책이라며 호응하는 것이었으며 지금껏 듣고 있던 인길댁이 끼어들었다.

“논바닥이 찌럭찌럭(질퍽질퍽)헌디 보리농사가 될께라우? 육답이라면 몰라도….”

“아, 글씨! 되든가 안 되든가 해 봐사제. 아무리 뻘땅이라고 곤탕(헛일 또는 빈 것)이야 치것소?”

​이렇게 하여 순녀의 의견을 받아들인 인길양반의 결정대로 논에 보리를 심기로 하였다.

며칠 후 낟가리를 다 드러낸 순녀네 빈 논을 길선이라는 총각이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순녀는 점심 식사가 담긴 광주리를 논 어귀에 내려놓으며

“길선 오라베(오라버니)! 언능 와서 점심 잡솨요!”

하고 소리 질렀다.

쟁기질을 하던 길선이 소고삐를 쟁기 허리에 묶어 놓고는 순녀가 있는 논 어귀로 다가왔다.

길선은 스물너댓 살의 총각으로 키가 크고 장작개비처럼 깡마른 체형에 눈은 귀에 달아매듯 찢어지고 입꼬리는 처져 험상스러운 얼굴을 한 순녀네 이웃 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생김새와 달리 마음결은 고왔다.

인길양반은 농사일이나 집안의 허드렛일이 생기면 늘 길선에게 도움을 청했고 인길양반의 요청에 길선은 하던 일을 멈추고라도 주저하지 않을 만큼 순녀네 일을 돕는 데는 적극적이었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인길양반의 요청에 따라 길선이 쟁기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터벅걸음으로 다가 온 길선이 광주리 옆 논둑에 털썩 주저앉으며 순녀에게 말한다.

“순녀야! 밥 이고 온다고 고생했다.

근디 인길아제가 논을 갈아 달락 해서 갈기는 간다만 여그다 보리를 갈면 되기나 허겄냐?”

“아따, 오라베! 여그라고 안 되란 법이 있간디요!? 여그 탁베기 한 잔 드시고 논이나 잘 갈아 주이쑈!”

​순녀가 막걸리를 잔에 따라 길선에게 건네자 목이 말랐던지 길선은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셨다.

때마침 작년까지 산정리 구장을 맡았던 중화동 양반, 정 수원이 낚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논길을 따라 마을로 가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영산강에서 운저리(망둥어) 낚시를 하고 오는 중인 것이다.

“성님! 이리 와 탁베기 한 잔 허고 가이쑈! 뭣 잡었소? 운지리?”

​길선이 수원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이. 운지리 몇 마리 잡었네. 크~으! 아따 시장허던 참인디 시원~허네.”

수원은 막걸리를 시원스레 들이킨다.

그 사이 길선이 낚시 바구니에서 굵은 손가락만 한 망둥어를 꺼내더니 엄지손톱을 이용하여 볼록한 망둥어 배를 가르고 쥐어짠다.

창자가 삐져나와 배가 홀쭉해진 망둥어를 무김치로 감더니 막걸리를 한잔 들이키고는 손에 들었던 망둥어를 입에 넣고 불거진 볼을 오물거리며

“탁베기 안주로는 운지리만한 것은 없제. 자! 성님도 한잔 더 드이쑈! 구덕에서 운지리 한 마리 꺼내 갖고 말이여라우.”

하며 막걸리 잔을 수원에게 건넨다.

수원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 나는 술이나 한잔 더 마시고 운지리는 집에 가서 묵을라네. 근디 뭣 헌다고 시방 쟁기질을 허는가?”

절반쯤 갈아진 너 마지기 논을 바라보며 수원이 물었다.

쟁기질을 하는 이유를 길선이 설명하자 수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뭔 소리를 허는가? 쟁기질도 허기 힘든 요런 뻘국 논바닥에 보리가 되기나 허겄는가? 쟁기질 허다 서 있는 쩌 소 잔(좀) 보소!”

하고 논 가운데를 가리켰다.

쟁기질을 하다 말고 논 가운데 서 있는 누렁소는 발목까지 발이 논바닥에 박힌 채 여물을 씹으며 가끔 ‘움머 움머’ 울고 서 있다.

과연 이런 뻘논에 보리농사가 될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녀의 마음에도 과연 보리농사가 될지, 괜스레 헛고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절반의 의아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창 성장기에 있어서 식욕이 왕성한 동생들과 조카들의 먹거리 그리고 식량난을 걱정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봐야 되는 것 아닐까?

이것이 순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 사람의 올바른 자세란 가장 잘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비록 수렁에 가까운 뻘논이지만 보리농사를 하여 대단한 수확을 바랄까마는 그래도 겨우내 논을 놀리느니 보리 종자를 뿌려보는 것이 식량난에 시달리는 농민들로서의 마땅한 자세라 해야겠다.

수원은 낚시 바구니를 메고 자리를 일어서며

“보지란히(부지런히) 갈아보시게!”

하고 비웃는 듯한 말을 남기고 갔다.

“오라베! 나도 갈랑께 고생허시고 오이쑈!”

순녀도 가고 길선은 다시 쟁기질을 시작하였다.

​“이랴 이랴! 이노무 소야! 언능 갈아불어야 너도 쉬고 나도 집으로 가 발 씻고 쉴 거 아니냐. 이려!”

길선의 소 부리는 소리가 들 건너 인의산까지 메아리친다.

이날 쟁기질이 마쳐지고 사흘 뒤, 순녀네 네 아낙들은 보리 파종에 한창이다.

네 아낙들은 옆으로 나란히 하여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곡괭이질을 해댄다.

순녀는 나이보다 실거웠다.

논 머리에서 넷이 출발하여 절반쯤에 이르면 순녀는 딴 사람보다 열 보는 앞서 있었고 논의 끄트머리쯤에 이르면 스무 보는 앞서 있었다. 순녀가 이러한 반면, 맹심은 자매지간이지만 순녀와는 달리 태생이 신약하여 버들가지처럼 호리한 몸매에 일하는 모습 또한 박력이 없이 흐느적거리는 모습이다.

앞서가던 순녀가 잠시 괭이질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언니! 어째 그렇게 늦어!? 언능언능 나 따라와!”

하고 맹심을 향해 재촉하자

“니는 길력이(기운이) 신께(세니까) 그러제. 나는 길력도 없고 이쁘게 찍니라고 늦어.”

하고 어설픈 핑계를 댄다.

쟁기질 두 이랑을 합해 곡괭이질로 넓은 한 이랑을 만드는 것이며 이 너비는 보리 파종에 알맞은 이랑 너비인 것이다.

아직 덜 마른 흙덩이는 곡괭이 날로 자르듯이 짜개고 잘 마른 덩이는 곡괭이 뒤통수로 망치질하듯 두들겨 부순다.

이렇게 한 배미 괭이질을 다 해갈 무렵, 인길댁은 망태에 담긴 보리 씨앗을 소쿠리에 옮겨 담아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여전히 곡괭이질을 한다.

인길댁은 하얀 무명 치맛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파종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해가 서산에 가까워지며 햇구녘 바람은 점점 드세지고 땅거미가 늘어지기 전에 일을 마칠 요량으로 인길댁은 손길을 부지런하게 놀리며 보리 씨앗을 바닥에 뿌려 나간다.

괭이질이 다 마쳐지자 경주댁은 저녁을 짓는다며 집으로 가고 맹심과 순녀는 파종 중인 인길댁에게로 다가갔다. 순녀가 인길댁에게 말한다.

“엄마! 뻣치신디(힘드신데) 송쿠리(소쿠리) 인내(이리) 주고 성님이랑 집으로 가이쑈! 우덜이 마저 삐릴(뿌릴) 텐께.”

“오냐! 인자 얼마 안 남었응께 같이 삐레불고 가자!”

인길댁은 한사코 같이 일을 마치자며 소쿠리를 넘겨주지 않는다. 순녀와 맹심은 소쿠리 대신 양재기에 씨앗을 나눠 담아 파종한다. 그러던 중, 파종하던 인길댁이 웩 하고 헛구역질을 하더니 소쿠리를 팽개치고 쭈그리고 주저앉는다.

이를 본 순녀가 깜짝 놀라며 양재기를 팽개치고 다가갔다.

“어무이! 어째 그라요? 영쳤소(체했소)?”

“아니 아니다. 암껏도 아니다.”

인길댁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아픈 부모를 보고 가만있을 자식들이 있을까.

“어메! 속이 안 좋으시먼 언능 집으로 가이쑈!”

맹심이 인길댁에게서 소쿠리를 빼앗다시피 하여 인길댁은 배시시 일어나 집으로 갔고 두 사람은 뿌리던 씨앗을 마저 다 뿌리고 집으로 향한다.

순녀를 앞세우고 뒤따르던 맹심이 말한다.

“순녀야! 어메가 아픈 것이 아픈 게 아니여.”

“그라먼 에욕질(구역질) 헌 것이 아픈 것이 아니면 뭣이랑가?”

“글씨! 어무가 며칠 전에도 부샄(아궁이) 앞에 앉거서 에욕질을 해서 내가 물어본께 임신을 허셨닥 허드랑께.”

순녀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며 묻는다.

“그라먼 어무이 뱃속에 우리 동생이 있다고?”

“그런당께.”

이즈음 인길댁은 포태 중이었고 다음 해 6월에 잉태하게 되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인길댁은 며느리인 경주댁과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댁은 이 댁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 꿈에 부풀었던 신혼생활이래야 고작 며칠에 불과 한 것인데 그나마 그 며칠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점돌이다.

그리고 아이가 채 세이레를 넘기지도 않은 어느 날, 어떤 이유 때문인지 대전이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 버리고 그 이후 경주댁은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오며 불편한 심사 중에 인길댁이 포태를 하게 된 것이며 그러니 경주댁의 마음 안에 은근한 시기심이 생길 만도 하지 않겠는가?

이런 며느리의 속내를 알고 있는 인길댁은 나름의 미안한 생각을 가지면서도 포태를 하고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잉태를 하는 날까지 고부간의 갈등은 지속되었던 것이었다.

임신을 한 엄마의 현실이 이러한 까닭에 사실을 알게 된 순녀의 마음 안에는 기쁨과 놀라움 등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던 것이며 어쩌면 약간은 쑥스러운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논둑길을 걷던 순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묻는다.

“언니! 그러면 점돌이가 어무이 뱃속 애기한테 뭣이라고 불러야 돼?”

“그것이사 삼촌이라고 불러사제 동생이라고 불르면 쓰겄냐? 근디 그것보담도(보다도) 성님 땜세(때문에) 속상허다.”

맹심이 푸념하듯 말하자 순녀가 묻는다.

“뭣 땜세?”

“글씨! 쩌번에 어무이가 애욕질을(구역질) 헌께 성님이 불을 때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땅(부지깽이)으로 정제 바닥을 톡톡 때림서 입을 삐쭉삐쭉 내밀드랑께.”

“어무가 애욕질 헌 것이 어쨌다고 그래?”

“그것도 모르냐? 오빠가 안 계신께 그러제.”

두 자매는 동구에 이르도록 인길댁의 임신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어떤 집을 막론하고 아이를 많이 낳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성장기에 홍역이나 장티푸스, 천연두 등의 질병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누구를 막론하고 행여나 아이가 성장하다 잘 못 될 것에 대비하여 줄달아 낳고 보자는 심산들이었으며 인길댁네도 예사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무려 여섯 번째 아이를 포태 중에 있는 것이었다.

두 자매는 줄곧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며 집 앞에 이르렀다.

순녀와 맹심이 들에서 돌아와 마당에 들어설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마루 너머 부엌에서는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녁상을 준비하며 나누는 인길댁과 그 며느리인 경주댁의 이야기 소리일 것이다.

논보리 파종을 끝낸 그 뒷날은 씨앗이 흙의 틈으로 흘러내리게 함과 동시에 굵은 흙덩이를 잘게 부숴 뿌리가 내리기 알맞게 하는 작업인 고무래질을 하였고, 또 그 이튿날은 보리 파종의 마지막 작업인 재 뿌리기를 하는데 재는 어린 보리싹에 영양 공급원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겨우내 보온과 토양의 산화를 막아주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순녀네 갯벌 논의 보리 파종의 모든 것이 마쳐진 것이었다.

1943년 2월 21일 정월 대보름을 지났는데도 날씨는 아직 겨울 날씨였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가득하여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성싶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아직 이른 시간, 마당에서 벅구(개 이름)와 놀던 태곤이 소리친다.

“어메! 눈이 와, 눈. 벅구! 벅구! 이리 와!”

잿빛 하늘은 무량한 흰 눈을 쏟아 내리고 있었으며 벅구를 쫓아다니며 마당에서 놀던 태곤은 신이 난 모양이다.

광에서 길쌈을 하는 인길댁을 돕던 순녀는 눈이 온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돌리던 물레를 잠시 멈추고는 마루로 나와 하늘과 마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잿빛 하늘에는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리는 눈송이로 가득하고 마당에는 은빛 세상이 펼쳐졌다.

“태곤아! 눈 맞지 말고 이리 들어와!”

순녀는 태곤이를 부르며 이를 핑계로 하여 잠시 쉬기도 할 겸, 창공에 휘날리는 눈을 구경하고 서 있었으며 태곤은 누나의 부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벅구를 쫓아 다닌다.

잠시 내리던 함박눈은 실눈으로 바뀌면서 온통 시야를 가리어 허공인지 눈인지 알 수 없을 만큼이었다.

순녀가 태곤이를 데리고 광으로 들어서며

“어무이! 눈이 겁나게 많이 와.”

하고 문밖의 상황을 말하자 씨실 사이로 북을 옮겨 끼던 인길댁은 혼잣말로 두런거린다.

“체! 어지께 정월 보름인디 뭔 눈이 저렇게 많이 온다냐.”

순녀가 물레를 돌리려던 손길을 멈추고 인길댁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오메! 어쩔라고 논에 보리를 갈아논께 해필(하필) 눈이 저렇게 많이 쏟아져부네. 싹이 다 얼어불겄네.”

순녀의 푸념 섞인 이 말에 바디질을 하며 듣고 있던 맹심이 어른스럽게 한마디 한다.

​“눈이 저렇게 와야 쌀농사가 잘 되는 벱이여. 그라고 눈이 오면 보리싹에 강추위도 막어 주고 촉촉해져서 싹이 잘 큰당께.”

“언니가 뭣을 알기나 알아?”

“그럼 알제. 아부지도 그러시고 어메한테도 들었어. 그렁께 눈이 퐁퐁 많이 쏟아져야 돼.”

이때 말례가 큰방 쪽 문을 열고

“어메! 상 차렸어.”

하고 소리치자 세 모녀는 하던 길쌈질을 멈추고 점심상이 차려진 큰방으로 들어섰다.

어제가 정월 대보름인지라 그래도 밥상은 갖가지 찬거리로 그득했다.

병어와 죽상어찜, 갖은 나물에 김까지 차려져 평소의 그것보다 월등하여 무엇이라도 맛난 반찬들이다.

늘 그러하듯 태곤은 자신의 밥을 다 먹어치운 뒤, 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핀다.

게다가 얼마 전 젖을 뗀 점돌까지 가세하여 숟가락으로 빈 그릇을 긁적거린다.

​“점돌아! 여깃다. 자! 많이 먹고 얼릉얼릉 크거라!”

인길댁은 아직 식욕을 만족시키지 못한 점돌을 불러 자신이 먹던 밥그릇에서 크게 한 숟갈을 떠 아장걸음 점돌의 밥그릇에 담아 준다.

평소 여느 때의 이런 상황이면 두 아이는 밥그릇을 놓고 간혹 다투기도 한다.

태곤은 아직 철부지인 까닭이요, 점돌은 아직 이성이 없는 생존의 본능만이 왕성한 유아인 까닭이니 이 아이들의 다툼을 두고 누가 탓하랴!

어느 시기, 어느 곳에라도 배곯고 굶주린 사람이 전무할 수야 있겠는가.

도덕지는 비록 논이 많은 들 가운데 있는 동네이긴 하지만 먹을 식량이 모자라는 것은 예외가 아닌 것이었다.

그나마 순녀네는 딴 집에 비해 조금은 나은 편이었으니 딴 농가들의 양식 사정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점심을 모두 마친 후 아침나절에 하던 길쌈은 이어지고 저녁나절 밥 짓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이날 길쌈이 다 마쳐졌다.

순녀와 맹심은 광에 남아 베틀 언저리를 정리하고 인길댁은 불룩해진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광을 나서고 있었으며 문밖에는 아직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 사나흘 후, 순녀는 여동생인 말례를 데리고 지난가을에 보리를 갈았던 뻘등 논으로 가고 있었다.

보리의 성장 과정이 궁금했던 것이다.

기온이 아직 차가워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은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처음 내릴 때와는 달리 다져져서 단단해졌으며 이러한 눈은 온통 대지를 다 덮어 들판은 물론 멀리 보이는 마을이나 산의 능선 등 모두가 은빛 세상이 되어 있었다.

​“꺼우 꺼욱! 꺼꺼우 꺼욱!”

머리 위 창공에 가득한 수많은 기러기들,

창공뿐만이 아니고 이 논 저 논에 기러기들은 가득 앉아있었으며 순녀와 말례가 다가가면 논바닥을 헤집던 기러기들이 목을 길게 세우고 경계하다 더 가까이 가면 일시에 푸드덕거리며 비상한다.

너덧 마리가 횡으로 열을 지어 나는 기러기 무리가 있는가 하면 아치형 사선을 끄트머리가 산자락에 닿으리만치 길게 늘어뜨린 무리도 있고 또 어떤 무리들은 v자 형, 편대를 이룬 무리도 있다.

이렇게 들판은 수많은 기러기 무리로 가득하다. 이 기러기들은 무엇을 먹자고 들판에 지천으로 깔려있을까.

기러기의 먹이는 지난가을 추수 때 바닥에 떨어진 볍씨나 마른 풀씨, 풀뿌리 따위인 것이다.

수많은 기러기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먹이일 텐데도 기러기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비로소 월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 의욕이 애절한 반면 주어진 환경은 척박하기만 한 것이 영화농장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도덕지 사람들이나 기러기가 똑같은 입장인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순리일까.

기러기들이 먹이를 찾아 북녘을 떠나 영화농장을 찾아왔듯이 도덕지 사람들 또 한, 철에 따라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야 하는 것이었다.

순녀가 말례에게 기러기들이 가득한 논을 손가락으로 가르친다. 기러기들은 꼬리를 하늘로 한 채 주둥이로는 눈 속을 헤집으며 먹이 찾기에 분주하다.

“말례야! 기우(기러기) 떼가 겁나게 많지? 저 눈 우게다 싸 논 똥 좀 봐라!”

“응! 저것들은 뭣을 먹을라고 저렇게 많이 있어?”

“그것이사 오리밥(얕은 물에서 자라는 수생식물)도 먹을 테고 나락도 먹을테고…. 보리도 뜯어 묵나 모르겄다. 언능 우리 논으로 가보자!”

순녀네 논에도 눈은 가득 쌓여 있었고 눈 위에는 기러기 분변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순녀는 논바닥의 눈을 조심스레 파헤치더니 화색이 만면하여

“말례야! 이것 봐라! 놈(남)들이 뻘논에 보리를 간다고 비웃었는디 보리싹이 잘만 돋았다.”

하며 말례를 쳐다본다. 말례도 눈이 휘둥그래지며 묻는다.

“이 싹이 보리여? 많이 돋았네.”

“그럼 보리제. 가실(가을)에 보리를 뿌렸응께 보리제. 나락이 났겄냐?”

뻘논에 보리 자라는 모습이 의심스러운지 순녀는 몇 군데를 더 파헤쳐 본다.

차디찬 눈 속의 동토이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리는 생명력이 넘치는 새파란 모습으로 봄을 꿈꾸고 있는 것이었다.

순녀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례야! 언능 집에 가서 아부지랑 어메한테 말해 드리자!”

하고 말례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눈 속의 보리싹을 보고 마음 안에 넘치는 희열을 감출 길 없는 순녀는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머리 위로는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사선으로 열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니 아마도 인의산 너머 자방포 뜰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윽고 순녀와 말례가 집 앞에 이르자 누렁이 벅구가 꼬리를 흔들며 마중을 나온다.

순녀는 벅구를 제치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아부지! 아부지!”

하고 부르자 봉창문이 열리고 인길양반이 내다봤다.

돋보기안경을 낀 것으로 보아 책을 보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춘디(추운데) 어디를 갔다 오냐?”

“아부지! 내 말 좀 들어 보이쑈! 글씨 들판에 가본께 기우 떼가 말도 못 하게 겁나게도 많해부요.”

“그것이사 들판에 갈 것도 없이 여그서도 저렇게 날라댕기는 기우 떼가 많이 보이쟎냐!”

인길양반이 들판을 손짓으로 가르치며 말하자 순녀가 숨을 고르고 상기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아부지! 말허자면 그 기우 떼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논에 보리가 싹이 났드랑께라우. 그것을 볼라고 말례 덱꼬(데리고) 논에 들렀어라우.”

“어디 갔는가 했디만(했더니만) 논을 둘러보고 왔는갑구나! 보리가 싹이 났닥 허니 참 잘 되얐다.”

​그때 부엌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인길댁이 궁금해하며 토방으로 나왔다. 순녀는 마음에서 넘쳐나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나타내고 싶은 듯 손발짓을 섞어가며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야~아, 눈을 파 제쳐 본께 보리가 요만큼씩 자랐는디 색깔이 새파란 것이 겁나게도 이쁘드랑께요.”

듣고 있던 인길댁이 기쁜 얼굴로 미소지으며 말한다.

“워따워따, 싹이 그라게 났닥 허니 우리 순녀 말 듣고 보리를 잘 갈었는갑다. 그나저나 춘께 언능 방으로들 들어오니라!”

인길양반은

“그렁께 말이세.”

라며 인길댁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날 순녀의 눈밭, 보리논 소식으로 순녀네 식구들은 모두가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5월이 되었다. 영화 농장 앞 영산강물은 쓰고 나기가 하루에 두 번씩 거듭된다.

아마도 목포 앞이나 그 아래 어디선가 커다란 수문을 열었다 닫기 때문에 물이 들락거리는 것 아닐까.

유소년기, 적어도 사고가 있는 아이라면 한 번쯤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해 봤음직 할 상상이다.

그러나 기실은 지구의 자전과 달의 인력에 의한 천문현상으로 물이 드는 시각은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있는 쪽과 그 반대편이 물이 드는 때인 것이다.

영산강에 강물이 들고나는 것은 지구가 생긴 이래 태곳적부터 시작되었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지속되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5월 어느 날 영산강에 밀물이 든다.

강 아랫녘으로부터 뻘바탕을 집어삼킬 듯 봄바람을 따라 스멀스멀 밀려온다.

밀물이 맛조개랑 짱뚱어는 물론 뻘밭까지 다 삼키고 지루한 듯 하품을 할 즈음이면 찰랑거리던 파도는 잠들고 밀물이 몰고 온 바람은 영화농장 들판에서 산들거린다.

이 바람이 해풍이며 영화농장에서 자라는 곡식들은 이 해풍과 햇살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아카시아 향 그윽하게 퍼지고 노란 감꽃이 떨어질 즈음 훈풍이 불어오는 들녘 여기저기에서는 모심을 준비를 하느라 쟁기질이 한창이다.

순녀네 보리논은 어찌 되었을까.

너 마지기 보리논에 봄볕 가득 머금은 해풍이 불어와 누렇게 익은 보리가 물결치듯 일렁거린다.

아무래도 뻘땅이어선지 보리의 키는 고작 두 뼘 남짓으로 작았지만 키에 비해 이삭은 튼실했다.

순녀네 식구들은 모두 나서서 논보리를 벤다.

인길댁은 만삭에 이른 데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집에 머물고 그 나머지 식구들인 순녀와 맹심 그리고 경주댁과 인길양반, 넷이서 보리를 베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논일을 하자고 인길양반이 나설 리 없지만 뻘논의 보리농사를 신기하게 여겼던 것인지 이날은 식구들과 합세하여 보리를 베는 것이었다.

‘싸악 싸악! 싸삭 싸악!’ 젊은 나이의 순녀와 맹심은 다리를 곧게 세우고 허리를 구부려 보리의 밑동에 낫질을 해 대는데 그 모습이 힘차고 숙달된 모습이다.

‘싹 싹 싹!’ 그런가 하면 체격이 풍성한 경주댁과 나이 들어 노구인 인길양반은 쪼그려 앉은걸음으로 벨 보리를 쫓아가며 낫질을 하는데 그 능률이 순녀와 맹심의 절반에 못 미쳤다.

5월의 햇살은 따사롭다. 이 따사로운 햇살과 해풍을 쐬고 들판은 연둣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며 칠팔 월의 작열하는 햇살 아래서 비로소 신록이 짙어진다.

따사로운 햇살 때문일까 낫질에 힘을 쏟은 탓일까 인길양반은 벌겋게 달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휴~우! 인자 몸이 예전 같덜 않구나. 근디 맹심아! 저기 내려오는 사람이 느그 작은아부지 아니냐?”

“야~, 작은아부지네요.”

“저 사람이 어쩐 일로 내려오는 것일꼬. 걸음걸이가 펄럭펄럭 거리는 것이 또 술 한 잔 했그만.”

​가까이 이른 순녀네 작은아버지는 손에는 낫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으로 봐 인길양반의 말처럼 그는 어디선가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성님! 보리가 제법 잘 되얐소이. 아적나잘(아침나절)에는 월곡 앞 육답 논을 갈아 놓고 성님네 보리를 빈(벤)닥 해서 손 쪼깐 너 드릴라고 왔소.”

“고단헐 텐디 쉬제 왔는가?”

“탁배기 한 잔 했디만 괜찮허요.

그나저나 올해는 우리 논에도 보리를 갈아야 쓰겄네요.

뻘논이라 이렇게 잘 될지는 생각도 못 했는디….”

“그래야것네. 모자란 식량을 쬐깐이라도 보탤라먼 빈 논 없이 다 갈아야지.”

‘싸사삭 싸사사삭!’ 힘 좋고 덩치 큰 순녀 작은아버지의 보리 베는 솜씨는 인길양반과 경주댁은 물론이요, 맹심이, 순녀도 따라갈 수 없이 날렵했다.

하기야 머슴으로 치면 상머슴에 이를 덩치에 젊음이 넘치는 나인데 이깟 보리 베기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순녀의 작은아버지가 손을 넣어 준 까닭에 보리 베기는 일찍 끝이 났다.

보리 베기가 끝나고 이틀 후 보릿단을 집으로 저 나르는 일은 동네 청년들인 만복, 무현, 쌍본과 순녀의 사촌오빠인 동봉이 맡아서 해 주었다.

순녀의 오라버니인 대전이 일본으로 외유 중이고 인길양반이 의원과 구장 일을 보는 까닭에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면 이들 청년들이 솔선으로 도와주었던 것이며 이것이 도덕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요, 사람 냄새 물씬 풍기고 온정이 넘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논에서 집으로 옮겨 놓은 보릿단은 마당 한쪽 가득하여 큰 벼늘이었다.

인길양반은 이마의 땀을 훔치는 네 장정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한다.

​“허허! 자네들 덕택에 내가 편하네. 늘 이렇게 도와준께 참 고맙기는 허네만 내 어찌 감사 인사를 다 헐지 모르겄네.”

“아제! 당최 그런 말씀 마이쑈! 아제가 동네를 위해서 허시는 일에 비허면 우리가 헌 일은 간에 기별도 안가제라우.”

인길양반의 감사 인사에 네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겸양의 답례를 한다.

​“아니네. 자네들이 손대 없는 집을 도와준다는 그 맘에 어떻게 나를 비허겄는가? 그것은 그렇고 방으로들 듬세! 찬은 없어도 저녁은 묵어사제.”

인길양반은 청년들의 등을 두드리며 방으로 들게 한다. 방으로 들며 넉살 좋은 무현이 말한다.

“야~아! 아제네 반찬이 맛있응께 저녁이나 얻어 묵을라우.

근디 아제! 보리타작은 어떻게 허실라우? 힘든께 홀태로 허지 마시고 시르묵(신원목) 후근이한테 부탁해서 탈곡기로 해부이쑈!”

“글씨! 그래야 쓸랑갑네. 저 많은 놈을 어떻게 홀태질, 도리깨질로 다 허겄는가. 어서 들어가세!”

​밥상을 받은 청년들은 허기졌는지 게눈감추듯 한 그릇씩을 다 먹어치우고 막걸리까지 곁들여 대접을 받은 후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무현의 말대로 신원목 후근에게 부탁을 하여 탈곡기로 타작을 하였으며 수확한 보리 알곡은 일곱 섬에 이르렀다.

같은 한 가마니라도 보리는 나락보다 무겁다.

성인 둘이 달라붙어야 겨우 보리 한 석을 움쭉거리고 세 사람이어야 가볍게 들 수 있다. 인길양반과 그의 동생 헌규 그리고 조카인 동봉이 합세하여 마당에서 곡간으로 보리 일곱 석 모두를 옮겨 석 섬 씩 두 줄에 그 옆으로 한 석을 쌓아 놓으니 모두 일곱 섬이었다.

곡간에 채워진 보리가마니를 바라보며 흡족해진 마음으로 인길양반이 말한다.

“봐라! 논 한 배미 반년 농사의 수확이 이만큼인데 이만큼이면 우리식구가 반년을 묵을 양식이다.

그러고 저쪽에 쌓아 논 보릿대는 모자라는 땔감으로 쓰고…. 근디 우리는 해 보지도 않고 뻘땅에 보리가 안 된다고만 했으니 어리석은 것 아니겄는가? 거그다 겨울에 짓는 보리농사에 히도미상은 관심도 없으니 공출도 않을 것이고….”

듣고 있던 동봉이 제 아버지인 헌규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부지! 올 가실에는 우리 월곡 앞 논에도 보리를 갈아사 쓰겄네요.”

“글씨! 그래야 쓰겄다.”

헌규네 부자가 돌아가고 곡간 앞에서 인길양반이 식구들을 부르자 경주댁과 맹심 그리고 순녀가 곡간 앞에 섰다.

인길양반은 곡간의 보리가마니를 가리키며

“봐라! 시안(겨울)에 노는 우리 논 너 마지기에 반년 농사를 지은께 이런 곡식이 생겼다. 이놈이면(보리 일곱 석) 우리 식구들이 반년은 묵을 양식인디 이 얼마나 큰 소득이냐? 그런디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뻘논에 보리농사가 되랴 생각하고 시안 내내 저 귀한 땅들을 놀리는디 올 가실부터는 들판이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새로운 경험이나 소득이 우리 순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순녀는 어려운 가사에 큰 보탬이 된 일을 헌 것이다.”

하고 말하자 식구들은 모두 순녀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던 것이며 순녀는 아버지의 치사에 마음 가득 넘치는 즐거운 마음을

“어무이랑 성님, 언니들이 힘을 합쳐서 그러제 저는 별로 헌것도 없어라우,”

하고 식구들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었다.

인길양반은 가족들, 특히 자녀들에 대하여는 훈계와 칭찬을 분명히 하여 올바른 인생관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며 순녀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 하였던 것이다.

1943년 6월, 6월이면 영화농장 들판 여기저기에서 모내기가 한창이다.

이 동네나 저 동네나 영화농장 언저리 마을은 벼농사 외에는 특산물이 별로 없으므로 일 년 소득을 다 해봐야 논에서 나는 벼가 전부이며 한 해 벼농사를 지은 것으로 자녀들의 학비 마련이나 의복 이외 여타의 필수품을 마련해야 하므로 모내기 철이 되면 죽기 살기로 앞을 다퉈 가며 모내기에 열중하는 것이다.

순녀네 논에도 여느 논과 다름없이 모내기가 한창이다.

예년의 모내기 논 같으면 물이 벙벙하여 모심는 사람들의 종아리에 찼던 물이 이 해는 바닥에 질척거릴 만큼이었다.

봄 가뭄이 심하여 저수지의 물로 겨우 모내기를 할 만큼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어쨌건 제때 모내기는 하고 봐야 앞으로 다가올 우기, 6, 7, 8월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모를 심는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남정네와 아낙들로 도덕지와 신원목 사람들이며 이들은 품앗이로 모내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들이 모내기를 할 때면 순녀네 식구들 중 누군가 품을 갚으면 되는 것이다.

순녀와 맹심은 논의 이쪽과 저쪽에서 못줄을 잡는다.

“여~어!”

순녀가 논둑에 박힌 못줄 막대를 뽑을 준비를 하며 크게 소리친다. 이쪽에 심는 사람은 다 심었다는 신호인 것이다. 이번에는 맹심이

“자~아!”

하고 소리친다.

이쪽도 다 심었으니 못줄을 떼 옮기자는 신호인 것이다.

순녀는 날렵하게 못줄 막대를 옮겨 질러 놓고 논바닥에서 모를 집어 논둑 쪽으로부터 안쪽으로 심어가는데 안쪽에서 심어 오는 사람과 맞닥뜨리면 심던 모를 제쳐 두고 잽싸게 못줄을 잡는 것이다.

수줍을 나이, 열네 살 새내기 처녀치고 치맛자락과 소매 깃에 흙탕이 묻는 것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일에 집중하는 억척스러운 모습이다.

이러한 순녀를 보고 바로 앞에서 모를 심던 길수가 묻는다.

​“너는 언제 배웠길래 모를 그렇게 잘 심냐? 나이도 어린디 말이여.”

길수는 순녀와 한집안으로 6촌 오라버니였으며 본래 순녀네처럼 복룡촌에 살다가 작년에 도덕지로 이사를 왔던 것이었다.

순녀네가 도덕지로 이사를 한 후로 길수네 말고도 복룡촌에서 도덕지로 이사를 온 세대는 예닐곱 세대로 모두가 순녀네와는 일가나 친척지간이었으며 이들이 이사를 오게 됨으로 도덕지의 세대 수는 약 30여 세대에 이르게 됐다.

순녀가 길수의 물음에 대답한다.

“멋 헌다고 이런 것까지 다 배운다우? 배우고 자시고 헐 거 없이 보면 헐 줄 알아사제.”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다.

그 말을 들은 길수는 심통스런 모습으로 왼손에 쥔 모를 오른손으로 몇 줄기씩 갈라 그것을 논바닥에 쿡쿡 찔러 심으며

​“니 말이 맞긴 맞다. 요로코 요로코(이렇게 이렇게) 숭구먼(심으면) 되야 분디 멋 헌다고 배운다냐! 니 말이 맞긴 맞어.”

하고 자신의 말에 맞춰 가며 모를 심는다.

“그렁께 오라베(오라버니) 언능 모나 숭구랑께. 쩌쪽 편에는 다 숭궈 가는구만.”

“알었당께.”

길수는 더는 말없이 못줄에 맞춰 가며 모심기에 열중하였다.

모심기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심세 심어. 모를 심어. 이 논에다 모를 심어.”

“여~여으 여러 사~앙사 디여.”

“이 배미 모를 언제 심나 반달만큼 남았네.”

“여~여으 여러 사~앙사 디여.”

“이 배미 심고 저 배미로 가~아세!”

이 노래는 모내기 노래이다.

윗마을 사는 두일이가 선창을 하니 여럿이 후렴을 이어 부른다. 두일이는 동네의 몇몇 또래 청년들과 소리꾼이 되겠다고 육자배기를 배우는 청년 중 한 사람이며 그러니 무리를 이끌어 선창을 할 만한 사람인 것이다.

목을 짜내듯 바람소리처럼 천둥소리처럼 끊길 듯 이어지는 두일의 선창은 구성진 노랫소리가 되어 들판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후렴 소리 또한 그 꼬리를 물고 파도처럼 퍼져 나간다.

모내기 노래는 삶의 고달픔이나 모심기의 고단함을 노래로 뱉어 버리고자 함일 것이며 다 같이 삶이 고달프고 들녘의 일은 힘에 겨울 것이니 이들이 부르는 모내기 노래는 도덕지 영화농장 사람들의 애한을 달래주는 노래인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길수 오라베! 못줄 좀 잡아 주이쑈!”

순녀가 쥐고 있던 못줄 막대를 논둑에 질러 놓은 채 논둑길을 뛰어간다.

못밥 광주리를 인 경주댁과 인길댁에 이어 말례가 좁은 논둑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고 순녀가 뛰어간 것이다.

앞장서 오던 경주댁이 순녀에게 길을 내주며 인길댁의 광주리를 받아 주라는 시늉을 했다.

광주리를 인 인길댁의 배는 밤하늘의 누런 반달처럼 불룩하였고 검은 무명치마는 마치 병풍처럼 벙벙했다.

만삭이 되어 산달이 멀지 않은 까닭인 것이다.

“어무이! 인내(이리 내게) 주이쑈!”

“아니다. 내부치깜송께(떨어뜨릴 수 있으니) 기냥 가자!”

“글지말고 인내 주이쑈! 몸알라(몸도) 무거우신디.”

인길댁은 이고 오던 광주리를 순녀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말례가 들고 오던 반 말짜리 주전자를 받아 들었다.

누런 양은 주전자는 막걸리 주전자이다.

논 어귀에 광주리가 내려지고 인길댁과 경주댁은 못밥을 차린다.

순녀가 양손을 입에 대고 모심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 지른다.

​“언능들 오이쑈! 밥 차렸응께 언능들 오이쑈!”

​순녀가 부르지 않아도 못 일을 하는 사람들은 허기진 상태(시쳇말로 배꼽시계)로도 점심 못밥 시간에 이르렀음을 이미 아는 것이지만 목청을 돋워 부르는 순녀의 외치는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양 들고 있던 모들을 논바닥에 던져 놓고 못밥이 차려지는 논 어귀로 모여들었다.

못밥은 논둑에 차려졌다.

고봉으로 담긴 하얀 쌀밥은 김이 모락거리고 손바닥 크기로 잘라 무 위에 얹은 갈치조림, 말린 무청에 묵은 된장을 풀은 시래깃국 등 가진 반찬들이 논두렁에 차려지고 일꾼들은 못밥을 먹기 위해 논두렁 양쪽으로 순서 없이 늘어앉았다.

“종필아! 종필아! 언능 이리 오니라! 어메랑 밥 묵자!”

종필을 부른 사람은 금동굴댁이며 순녀의 먼 올케언니 뻘이 되는 여인네였다.

그리고 종필이는 일곱 살배기 금동굴댁네 아들이다.

금동굴댁은 순녀네 모내기를 하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서며 못밥을 얻어 먹일 요량으로 아들인 종필을 데리고 왔던 것이며 이 종필이가 손녀의 동생인 태곤이와 저만치 수로에 피어나는 부들꽃을 뽑으며 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노는 데 정신이 팔린 듯 대꾸가 없자 이번에는 맹심이 아이들을 부른다.

“태곤아! 종필이랑 언능 와! 언능 와서 밥 묵어라!”

맹심이 부르자 아이들은 들고 있던 부들꽃을 팽개치고 달려왔다. 늘 먹거리가 모자라던 탓에 아이들은 갓 피어나는 부들꽃을 따서 먹기도 했던 것이었다.

​“종필아! 느그들 부들꽃 따 묵다가 개통(농수로)에 빠지면 못 써! 부들꽃 많이 묵으면 얼굴 붓응께 묵지 마라! 언능 쩌리 어메 옆으로 가서 밥 묵어라!”

​종필과 태곤은 신이 나서 엄마들 앞으로 뛰어갔으며 맹심은 아이들 앞에도 각기 밥그릇을 놓아주었다.

못밥,

못밥은 모내기 중에 먹는 밥이다.

농민들에게 쌀이 소중하니만큼 모내기는 일 년 농사일 중 제일 큰 농삿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모내기 날을 받으면 아낙들은 일로나 목포의 시장으로 나가 어물이나 고기 등의 반찬거리를 모내기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곤궁한 촌락에서의 못밥은 별식이나 다름없을 것이며 더구나 고단한 일 중에 먹는 밥일 것이니 그 맛을 에둘러 표현할 필요가 없다.

못밥의 내력이 이러하니 도덕지 사람들은 자식들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자식이 있는 부모들은 모내기 길을 나서며 으레히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서는 것이었으며 이 때 만큼이라도 자식들에게 배불리 얻어 먹일 요량인 것이다.

그것도 못밥을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데려왔다고 하여 미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음식을 담는 손길에는 인심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못밥을 먹는 일꾼들을 지켜보던 인길댁이 갈치조림이 담긴 솥을 들고 소리친다.

“여그 갈치가 몇 토막 더 있응께 더 잡술라면 말허이쑈!”

“당숙모! 여그 한 토막만 더 주이쑈!”

“응! 그러소! 여그 두 토막 줄랑께 종필이도 한 토막 더 먹이소!”

곡광에서 인심이 난다고 했다.

음식이 떨어져 못밥 광주리가 다 비워졌다면 모를까 음식이 있는 한은 반찬을 퍼 주는 인길댁과 경주댁의 손길은 풍성하고도 풍성했던 것이다.

못밥 점심이 끝나고 모내기는 이어졌으며 해거름이 아직 이른 시간 모내기는 끝이 났다. 모내기를 마친 일꾼들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좁은 논둑길을 열 지어 걸어가고 못줄을 챙겨 든 순녀와 맹심은 그 뒤를 따른다.

돈도리 쪽 영산강 둑 너머로부터 불어오는 갯내음 섞인 산들바람에 논둑을 걷는 일꾼들의 꼬질꼬질한 옷자락들이 펄럭거린다.

길수가 뒤에 따라오는 순녀를 돌아보며

​“오메 시원헌 거. 순녀야! 모를 다 심었다고 이렇게 시원헌 바람이 불어온갑다.”

하고 상쾌한 표정으로 말하자 순녀가 혼잣말처럼

​“모를 다 심자 요렇게 선들바람이 부는 것을 본께 올 가실에 풍년이 들어 나락이 잘 될랑갑네. 나락 농사가 잘 되아야 우리 언니 시집도 가제.”

하고 언니인 맹심의 시집 얘기까지 들먹인다.

말수가 적은 맹심은 자신의 시집 얘기에 순녀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를 뿐 말이 없었다.

길수가 논바닥을 가르치며 말한다.

​“모를 이렇게 이쁘게 씨줄 맞추고 날줄 맞춰서 잘 숭겄응께 인자 비만 오면 되제. 그래사 우리 맹심이 동상 시집도 갈 것이고…. 허기사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고 했응께 인자 나락이 잘되고 안 되고는 하늘이 알아서 할 테제.”

그렇다.

논을 갈거나 모를 심고 김을 매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논에 햇살을 내리거나 비를 뿌리고 바람이 불게 하는 것은 하늘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제 논에 모를 다 심어놨으니 하늘이 할 수 있는 일, 햇살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여기에 적당히 비만 내려 준다면 도덕지 사람들의 바람인 풍성한 가을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