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32 말(語)이 얼음이 되어 깨지는 순간
공무원의창#32 말(語)이 얼음이 되어 깨지는 순간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7.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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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이었다. 평소 전혀 교류가 없던 한 지역신문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취조를 하듯 연달아 물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갔다 오셨죠?”

“개막식이 아니라 어제 봅슬레이 갔다 왔습니다.”

“몇 명이 같이 갔습니까?”

“100명입니다.”

대충 직감이 왔다. 왜 직원들이 그를 사이비 기자라고 불렀는지. 그는 무례한 갑질로 직원들 사이에선 ‘완장질’로 유명한 자였다. 그는 마치 몇 년 밀린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캐물었다.

“도대체 선발 기준이 뭐죠?”

“장애인체육회, 복지부서, 동주민센터에서 추천한 장애인, 수발을 들어야 하는 어르신, 기초수급자 등입니다. 평소 나들이 기회가 없는 어렵고 소외된 분들을 우선했습니다.”

당시 나는 동계올림픽 지자체 담당 과장이었다. 구에선 대규모 국제행사 관람 경험이 없는 취약계층을 선별했다. 티켓 구매뿐 아니라 인원을 서울에서 강원도를 오가며 모시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다. 관람은 올림픽 개막식에서 패럴림픽 경기까지 40여 일간 총 8회였다. 늦깎이 **주부 학생, 수화통역센터 인원과 다문화가족·응모 구민, 거동 불능인 휠체어 장애인분 등 총 1,500명이 이 혜택을 보았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 장애인, 수급자 등의 손발이 되어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인솔하는 일은 요양보호 경험이 없는 직원들에겐 무척 생소하고 고된 일이었다. 평창의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아 가며 식사 장소를 정하느라 뛰어다녔고, 이미 동이 난 휠체어 리프트 차량을 구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녹초가 된 직원들의 눈가엔 노곤함이 잔뜩 배어 있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직원들의 상기된 볼을 보면 작은 긍지 같은 것들이 작은 보조개나 입가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한 번의 외출도 엄두 내지 못하셨던 분들은 직원들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맙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그럼 소외되지 않은 분들은 주민이 아닙니까? 장애인이나 못사는 게 뭐 자랑입니까?”

기자의 이 뻔하고도 차가운 질문을 받고 나서야 난 그의 의도를 확인한다. 1,500명 분량의 올림픽 투어 좌석 중 일부는 응당 높은 분이나 기자님(!)들과 같이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께 돌아갔어야 했다는. 순간 칼바람 속을 뛰어가던 직원들의 뒷모습과 경기장에서 휠체어에 앉아 양팔을 들고 박수를 치던 분들의 표정이 스쳐 갔다. 수화기를 타고 나온 그의 서늘한 언어들이 바닥에서 얼음으로 구르는 것이 보였다. 부아가 치밀어 내 목소리도 일순 차가워졌다.

“그것은 우리 구의 기준으로 정하는 거죠.”

“말 그 따위로밖에 못 해요?”

“뭐요? 그 따위라니요!”

내가 소리를 꽥 지르자, 그는 부구청장에게 바로 민원을 제기했다. 마침 그때 진행되고 있던 동정보고회장에 가서 깽판을 치겠다느니 감사원 감사청구를 하겠다느니 과장이 맘대로 정한 자의적 선별이라느니 하며 장애인을 선별한 올림픽 참관을 문제 삼았다. 결국 위에선 내게 해명 자료를 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던 2008년 겨울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