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33 문제가 있다면 뒤져야지요
공무원의창#33 문제가 있다면 뒤져야지요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7.2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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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거절의 미학

[시정일보]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1980년대 중반부터 공직에 있었으니, 나도 그 축의 말석 정도엔 끼는 사람이다. 이제는 공직자의 청렴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며 꼭 공직자가 아니더라도 사회 모든 영역에서 청렴은 중요한 신뢰자본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당시엔 청렴이라는 말이 공직자에겐 꽤나 무거운 단어였다. 권력형 비리에서 시작해 세관의 인허가에도 비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직자의 청렴을 국민들은 신뢰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듣거나 경험한 이야기도 꽤 많다.

사경제의 영역은 시장의 기능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그쳐야 한다. 인허가권한을 가졌다고 해서 일일이 간섭하고 규제하려 들면 2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은 반발이고 그다음 문제는 뒷거래다. 전자가 현재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과거의 흔한 모습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단속에 저항하는 이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법규의 적용은 공평무사해야 한다.

주인 없는 산에 유독 볼이 붉은 진달래가 있다고 해서 한 그루만 몰래 뽑아 집에서 기르면, 열에 여덟 개는 시나브로 시들다 죽는다. 그저 관념적 이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나 어렸을 대 종종 있었던 경험이다. 야생의 환경을 존중해야 한다.

2009년 추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서는데 A 대표가 까만 투피스를 걸치고 날 만나러 왔다. 그녀는 국민권익위원회 수범 사례로 선정된 경기도 G 시의 ‘노점 디자인거리 사업’에서 디자인 매대를 설계한 디자인 업체의 대표였다. 그녀는 지역 이미지를 반영하고 노점상들이 요구한 디자인을 설계에 반영하는 중이었다. 나와는 사무실에서 몇 차례 회의를 하고 그녀가 설명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녀는 명절도 다가왔으니 그간 업무 협의 과정에서 얻어먹은 밥값이라도 보답하겠다며 식당으로 졸졸 따라온다. 식당에서 그녀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사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시계를 선물하고 싶으니 전달 방법을 알려 달라며 몇 번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거절했지만 그녀는 나를 무슨 ‘갑’ 정도로 생각한 듯하다. 그녀가 내민 판도라의 상자 같은 봉지의 내용물이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정색하며 거절했지만, 그녀는 집요했다. 이러다간 괜한 오해를 받을 것 같아 꽝, 못을 박았다.

“계속 이러시면 감사부서 클린신고센터에 신고하고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못내 서운한 표정이었고, 나는 거절하기도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소통과 협상의 능력을 키우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잘 다룰수록 삶은 더욱 쉬워진다.”

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고 불필요한 오해의 싹을 남겨 두지 않는 지혜. 그것이 바로 ‘거절의 미학’이 아닐까.

이듬해 3월 초 관할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과 2명의 건장한 수사관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노점상 특화거리 조성과 관련하여 디자인 규격화 매대 제작·구입’에 대한 투서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난 그들의 말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철저히 파헤쳐서 조치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얼굴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큰 건 하나 놓쳤다는 표정이었다. 이후 다시 만난 디자인 업체 대표에게 그날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내게 선견지명이 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경지명이 아니다. 그저 정직하게 업무하면 늘 당당할 수 있는 법이다. 승자의 여유랄까. 난 그녀에게 그리 놀랄 건 없다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공직자에게 청렴이란 무슨 고상한 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 날이었다.

=꼴랑 인삼주 한 병인데요

모처럼 단잠을 자던 일요일 아침이었다. 머리맡 협탁 위의 휴대폰이 잔망스럽게 울었다. 벽시계는 9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빡빡한 일정에 밤늦은 귀가가 많았고 때론 공휴일에도 단속 근무를 하다 보니, 주말 아침잠은 내게 너무나 소중했다. 일요일 아침만은 정말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침대와 합체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모르는 전화번호다. 받을까 말까 갈등하다 혹시 내가 알아야 할 급한 일인가 싶어 받는다.

“○○ 팀장님 댁이죠?”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어, ○○터미널 쪽에서 노점상 하는 사람인디유, 비쩍 마르고 키 큰 사람이유. 시골 댕겨 옴서 챙겨 온 인삼 한 병 갖다 드리고 싶은데 팀장님 댁 주소를 몰라서유. 지금 찾아가려고 하니 좀 알려 주세유.”

“고맙습니다,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겨우 전화를 끊고 자리에 누웠으나 다시 벨이 울린다.

“무슨 뇌물도 아니고 꼴랑 인삼주 한 병인데유.”

“백 번을 얘기해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그는 서울시의 ‘노점디자인 특화거리 조성사업’ 대상에서 초기에 누락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노점이 노점상 전수조사 과정에서 누락되었다며 구청으로 뛰어왔다. 현장 확인과 주변 점포주들의 증언, 단속 직원들의 얘기를 종합해 그들 부부는 뒤늦게 특화거리사업에 합류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해당 노점은 통행에 불편을 주지 않는 곳에 있었다. 품목도 잠깐 파는 생선이라서 대상자로 분류했던 것인데, 그게 무척이나 고마웠나 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그분들 마음도 참 곱지.’라며 기분 좋게 잠들려는 순간 드는 생각 하나.

‘그런데, 내가 명함을 준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내 연락처를 구했지? 어디서 샌 거지?’

다음 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당직실에 비치된 비상연락망에 혹여 외부인이 전화번호를 문의하면 절대 알려 주지 말라는 표식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