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 #25 비닭이
시정 인문학광장 #25 비닭이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8.0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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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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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나는 시화공단이 있는 인구 40만 명 정도의 S 시에 살고 있는데, 20여 년 전에 조성된 계획도시라서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곧게 뻗은 도로에 의해 반듯하게 구분되어 있고, 도로변의 화단도 작은 공원 수준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우리 동네 주변의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을 가르는 왕복 8차선, 3백 미터 정도의 도로에는 아래위 끝부분에 횡단보도가 있고, 도로 중간쯤에 휠체어도 건널 수 있는 육교가 놓여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육교 아래 정류소 근처 공터에는 항상 비둘기 백여 마리가 수시로 날아와 길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먹던 과자나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기도 하고, 일부러 모이를 가져와 흩뿌려 주기도 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1년쯤 전에 그 공터에 그물을 덮어씌워 말뚝을 박고, “비둘기는 해로운 짐승이니 더는 먹이를 주지 맙시다”라는 팻말이 세워졌다. 더운 여름철에 비둘기 분뇨에 의한 역겨운 냄새에 질린 일부 주민들의 항의에 따른 시청 해당 부서의 어쩔 수 없는 조처로 생각되었다.

평소 비둘기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던 나는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약간의 반감을 느꼈지만, 비둘기가 이미 2009년에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지나쳤다. 그 결과 그 많던 비둘기가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지금은 겨우 십여 마리만 습관처럼 날아와 땅바닥을 쪼는 모습이 가끔 눈에 뜨일 정도이다.

멋있게 생기고 이름도 고운 비둘기를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어에서는 ‘비닭’이라고 불렀다는데, 닭이 아니라는 의미의 비닭(非닭)에서 나왔다고 한다. 혹은 날아다니는 비닭(飛닭)을 의미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빛이 나는 닭’을 의미한 ‘빛닭’이 어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비둘기는 비닭, 비닭이, 비달기, 비다라기, 비두로기, 비다리 따위로 널리 쓰여왔다.

고려 때 고려가요인 ‘유구곡’에서 ‘비두로기’로 불렸고, 조선 시대 1527년에 쓰인 ‘훈몽자회’에서 ‘비두리’로, 1576년 ‘신증유합’에서는 ‘비둘기’로 불렸다고 한다. 시인 이육사의 시 ‘소공원’에는 “한낮 햇발이 백공작 꼬리 우에 함북 퍼지고, 그 너머 비닭이 보리밭에 두고 온 사랑이 그립다고 근심스레 코고 울며”라는 구절이 나오고, ‘편백’이라는 시에는 “비닭이 같은 사랑을 한 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엽슨 빡쥐여! 고독한 유령이여”라는 구절도 보인다.

또 1930년대에 쓰인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 시 제12호’에서는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이 손바닥만 한 한 조각 하늘 저편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전이다”라고 읊고 있다.

이처럼 시(詩)에서 비둘기는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날짐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실이 좋은 비둘기는 평생 일부일처로 살아가지만 홀로 되면 아주 천천히 새로운 짝을 받아들인다. 암컷은 간신히 알을 지탱하는 부서지기 쉬운 둥지에 2개의 광택 있는 흰색 알을 낳으며 일반적으로 암컷은 밤에, 수컷은 낮에 알을 품는다. 14~19일간 알을 품지만, 어미는 둥지에서 12~18일간 더 새끼를 돌본다.

어미는 새끼에게 모이주머니 내층에서 나오는 비둘기유(pigeon’s milk)를 먹이는데, 이것은 프로락틴 호르몬에 의해 촉진되어 생성된다. 새끼는 어미의 목 안으로 부리를 쑤셔 넣어 비둘기유를 먹는다. 기록상 5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길들여 기른 비둘기는 현재 약 300여 종에 이르며 우리가 흔히 보는 도시의 비둘기는 바위비둘기의 아종인 ‘집비둘기’이다.

서양 사람들은 희고 작은 돌연변이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생각하여 ‘평화의 비둘기(dove of peace)’라고 부르는데, 실은 이 하얀 비둘기의 공식 명칭은 ‘흰 집비둘기(white domestic pigeon)’이다. 일반적으로 몸집이 작은 종류인 멧비둘기, 바위비둘기, 염주비둘기를 더브(dove)라고 부르고, 몸집이 큰 종류인 양비둘기(hill pigeon), 흑비둘기, 녹색비둘기, 여행비둘기는 피전(pigeon)이라고 부르는데 양자를 구별할 기준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집비둘기의 조상인 양비둘기, 흑비둘기, 염주비둘기 및 멧비둘기 등 4종의 텃새가 살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크고 작은 각종 행사에 비둘기가 동원된 데 이어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때 각각 3,000마리를 방사하면서부터 뛰어난 번식력과 적응력을 지닌 도시의 비둘기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래에 들어서 비둘기의 산성 강한 배설물이 차량과 건물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부식시킨다는 민원이 늘어나게 되었고, 깃털 속에 진균류가 자라고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을 사람에게 옮긴다는 주장도 제기되자, 결국 환경부는 2009년에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일부 지자체에서는 감염병 예방 및 시민 생활권 피해를 줄이기 위해 포획, 알과 둥지 제거, 부화 억제제 살포 등 비둘기 퇴치 작업을 시행하기도 했다.

잡식성이라 굳이 벌레나 열매 따위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공원 등지에서 인간이 먹다 버린 고열량 음식 찌꺼기를 먹는 도심의 비둘기는 닭처럼 걸어 다니느라 허벅지가 굵어져서 ‘닭둘기’라 불리며 비웃음을 받기도 한다.

멋진 몸매로 창공을 가르던 유순한 날짐승을 닭이 아닌 ‘비닭이’라고 부르며 평화의 상징이라고까지 칭송하더니, 이제는 걸어 다니는 ‘닭둘기’로 만들어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씨를 말리려 하고 있다. 사람들이 비둘기를 즐겨 길렀던 데는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신을 전달하는 통신용이고, 둘째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관상용이며, 셋째는 맛있는 고기를 얻기 위한 사육용이다.

최고 시속 112km를 자랑하며 이 속력으로 10시간 이상을 날아 1,000km 밖까지 갈 수도 있고, 제집을 찾아오는 귀소본능이 탁월한 비둘기는 편지를 전달하는 전서구(傳書鳩)로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군사용으로 쓰였다.

예전에 대만에서는 최고의 전서구를 가리는 대회가 열렸는데, 2009년에 1등을 한 비둘기의 몸값은 2억 원이었고 그 알의 가격도 무려 5백만 원이었으며, 2019년에는 몸값이 16억 원 정도 되는 비둘기도 나왔다고 한다.

한동안 외출이 뜸했던 나는 며칠 전 오후 3시쯤에 상업지역에 볼일이 있어 도로변의 간이 공원을 지나갔는데, 저만치 나무숲 위로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봤더니, 너른 공터에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서서 비둘기 모이를 뿌려주고 있는데, 벌써 와서 모이를 쪼는 비둘기까지 합하면 백여 마리는 되어 보였다.

차양 모자를 눌러쓰고 일부러 시선을 피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차림새로 봐서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수더분한 부인으로 여겨졌다. 몰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사람처럼 타인의 접촉을 꺼리는 눈치라서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지나쳐 갔다.

볼일을 마치고 한 시간쯤 뒤에 돌아오면서 그 자리를 유심히 살펴봤는데, 비둘기 십여 마리만 모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시멘트 벽돌을 깔아 만든 바닥은 배설물 하나 없이 깨끗했고, 한여름인데도 상상했던 그 어떤 불쾌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자기도 본 적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그곳에서 그렇게 얼른 모이를 뿌리고 서둘러 간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 얘기로는 그녀가 파지를 줍는 아줌마인데, 전에도 저쪽 육교 밑에서 모이를 줬고, 금지된 후에 이곳으로 옮겨서 매일 점심때가 지난 그 시간대에 왔다 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비둘기들이 그 시간만 되면 알아서들 몰려오는 모양이다.

비둘기가 덩치는 크지만, 시끄럽게 울어대는 십자매나 잉꼬, 카나리아보다 나으니, 앵무새처럼 새장에 넣어 집안에서 애완동물로 키우면 어떨까? 아니면 비둘기 샤부샤부 같은 맛있는 요리를 개발하고 시골에서 꿩 대신 비둘기를 대량 사육하여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독재자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는 채식주의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새끼 비둘기구이에는 사족을 못 썼다고 한다. 1930년대 독일 함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속을 혀와 간, 피스타치오(견과류 일종)로 가득 채워 구운 어린 비둘기 요리를 자주 먹었다는 영국 요리사의 증언이 있다.

요즘 홍콩에서 광둥요리로 유명한 ‘올드 베일리(Old Bailey)’라는 레스토랑의 시그니처(대표 요리)는 비둘기 훈제구이이다. 접시 위에 씌워놓은 불투명한 새장을 열면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배를 갈라 엎어 바비큐 통닭처럼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겉은 바삭하고 살코기는 부드러운 큼직한 비둘기가 맛난 모습을 드러낸다.

비둘기는 물이 있으면 하루에 서너 번씩 목욕을 즐기는 깨끗한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과 비둘기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멋진 사회를 만드는 것도 우리 인간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