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36 관리자의 자질과 덕목 ③
공무원의창#36 관리자의 자질과 덕목 ③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0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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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시대: 주민(住民)인가 주민(主民)인가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1990년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는 1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제헌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지방자치제도, 즉 군부의 쿠데타로 중단된 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를 주장했다. 그 결과가 1995년 1회 지방선거였다. 대통령이 도지사, 군수, 시장을 임명하던 것에서 주민이 직접 공직자를 선출하게 되었다. 선출직 공직자에게 주민이 가진 권한을 위임하는 지방자치의 형식(외형)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지방자치의 본뜻은 지방행정을 지역 주민의 뜻에 걸맞게 실행하라는 뜻이며, 더 크게 해석하자면 주민을 지방행정의 주체로, 주민자치의 주인으로 세우자는 것이다. 그로부터 27년. 형식적 지방자치는 자리 잡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다수의 사업은 위임받은 선출직 공직자들이 결정하며, 시장의 의중에 따라 큰 줄기가 바뀐다.

배정된 예산을 가지고 사업을 집행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역시 주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사업을 구상하고 뜻을 모아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모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동장이 일을 참 잘한다는 말에는 민원과 해묵은 숙원 사업을 매끄럽게 처리한다는 뜻도 있지만, 주민이 나서서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주는’ 일을 잘한다는 뜻도 있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일을 만들어 하게 하는 동장이야말로 최고의 정치력을 갖춘 공무원이 아닐까.

원고를 정리하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2016년 7월부터 2017년 6월까지 마포 서강동장 시절 겪었던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사업을 소개한다. 나의 사업 방식이 잘 녹아난 것들을 추렸다.

난 숨겨진 자원을 찾아내는 일을 좋아했다. 그것이 인적 자원이든 물적 자원이든. 있는 예산을 사용하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없었던 자원을 발굴해서 새로운 사업을 벌여 주민에게 돌려주는 일만큼 즐거움을 주는 일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우리 동에 숨겨진 그 무엇을 찾는 데 열중했다.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이었던 ‘패션직업훈련학교’는 동주민센터에서도 그 존재를 몰랐던 곳이다. 사실 그 기관은 세계적인 패션직업 학교였다. 방문과 조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 학교의 실체를 확인한 나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온 마을이 학교다〉 프로그램을 〈온 동네가 커뮤니티다〉라는 프로젝트로 확장했다. 패션직업학교 교수진을 주민자치위원회,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으로 참여시켰다.

2017년 2월, 눈발이 휘날리던 날에 구민과 구청장이 함께하는 동정보고회를 민간시설 최초로 이곳에서 진행했다. 이어 〈온 마을이 학교다〉 책임 교장 10명에게 임명장 수여하고 패션 드레이핑을 시연(박** 교수)하고 장학금 전달식을 진행하는 등 주민들로부터는 참신하다는 칭찬을, 직원들에겐 획기적이라는 반응을 받았다.

허울뿐인 위원회 조직을 일신하는 데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동네 유지에 대해 알 것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직함으로 채운 명함을 가진 그들은 행정조직의 각종 위원회와 직능단체 위원으로 중복 위촉되어 활동한다. 해당 위원회는 응당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난 이 조직을 일신하고 싶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을 전문성 있고 참신한 실력가로 대체해 나갔다. 개성 있고 특정 분야의 역량을 확보한 이들을 찾아 다양한 시각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지게 하고 싶었다. SFC학장, 무니토 대표, 서강도서관장, △△ 지류유통 부장, 토피어리 강사, 옆 동네 대형병원 원무부장 등을 모셨다. 동네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면 무엇이든 쏟아 놓도록 자리를 깔아 준 것이다.

시작은 걸음마 단계였지만,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민간의 10개 학교장을 중심으로 진행한 서강동 자치프로그램 〈온 동네가 학교다〉는 2017년 ‘주민자치박람회’ 우수동 및 ‘서울시 자치프로그램 발표’ 최우수동으로 뽑혔다. 함께 뿌리되 가꾸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전히 주민의 몫으로 두었다. 그들이 진정한 사업의 주인으로 서서 튼튼하게 가꿔 나가길 바랐다. 그것이 주민자치의 물꼬를 트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에 진행했던 ‘가정의 달 행사’ 역시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해 5월은 막 대선이 끝난 참이었다. 각 기관에선 죄다 선관위의 눈치를 보며 행사를 기획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르신을 모시는 순수한 행사건만 공직사회의 분위기가 그랬다.

나는 이 행사를 잘 해내고 싶었다. ‘주민센터가 나서지 못한다면 직능단체를 앞세우자. 그리고 비예산 사업으로 한번 치러 보자.’고 마음먹었다. ‘비예산 사업’이란 관의 예산이 아닌, 민간의 주체들이 직접 참여해서 일구는 사업을 뜻한다. 비예산은 관의 예산에 비해 작을 순 있어도 그 효과는 관 주도형 사업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다양한 사례를 통해 검증된 바 있다.

어르신 초청 행사라 장소 선정이 중요했는데 쉽지 않았다. 결국 와우산 자락의 광흥당 입구 마당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봄꽃이 예쁘게 피었고 어르신들이 평소 애용하는 산책길이기도 해서 무리가 없었다. 5월 19일 오후 12시, 230세 되신 회화나무 밑 마당으로 관내의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집결하기 시작했다. 창전경로당을 위시해 11개 경로당의 250여 분이 참석했다.

음식 맛은 먹는 곳의 운치와 함께 즐기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던가. 그날 연남동 연희동의 중화요리 화교 주방장 2명이 제대로 된 불맛을 선사했다. 산꽃 냄새 가득한 산자락, 웍에서 바로 전달되는 자장면의 맛을 상상해 보라. 떡에 머릿고기, 막걸리까지 더해지니 어르신들 얼굴이 바알간 홍안의 청년같이 싱그러워 보였다. 모두가 흥겨웠다.

구청장님은 입이 귀에 걸렸다. 어찌나 맛있어 하시는지 자장 두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멍석에 앉아 내빈들과 음식을 나누다 막걸리를 엎지르고도 흥겨워서 벌러덩 훌러덩 이벤트까지 선보이셨다. 집에 누워 있는 양반에게 가져다준다고 음식을 양쪽 호주머니에 맹꽁이배같이 채워 넣으신 할머니까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식장이 화려하다거나 차린 음식이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은 아니다. 온정과 정성이 참일 때 사람들은 진정한 감동을 느낀다. 서강동 직원들은 서울시 모든 동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아이디어를 내고 발품을 팔아 결국 산자락에서의 멋진 소풍을 만들어 냈다. 나나 직원들이나 느낀 것이 많았다.

바람이 불면 하얀 꽃비가 사발에 떨어져 왁자하게 웃음이 번지곤 했던 어느 봄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