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38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공무원의창#38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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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아주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도 행정조직과 공무원 이야기가 나오면 단골 소재처럼 나왔던 이야기가 있다.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다.”는 것. 사실 이 말은 인도의 작가이자 정치활동가인 아룬다티 로이의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입니다(We are civil servants without souls).”

그는 인도의 관료사회를 보면서 절망했다. 공무원들은 더 큰 선을 위해 일하기보다 국민을 통제와 세출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이는 공무원 개인의 선한 신념을 허락하지 않는 관료제의 특징을 잘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권이 5년마다 바뀌는 한국 사회에서 공직자가 ‘안전제일’을 추구하게 된 것은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직자가 복지부동(伏地不動)할 때 가장 이익을 보는 이들은 기존의 낡은 시스템과 인맥으로 이득을 보았던 특권층이나 토호세력이다.

공직자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이들은 공무원이 되면 초기 하급직일 때 긴장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에 젖어 어떤 자극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철판의 관료로 변질된다고 보는 듯하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내용은 그야말로 파렴치를 넘어 엽기적인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골조 안의 시멘트 사무실 안에서도 늘 치열하게 들끓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의 양심, 더 구체적으로는 공직자로서의 양심과 품위 같은 것들이다.

옛말로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주민들을 대면하는 최일선에서 지방공무원으로 있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이 세월 동안에도 길들여지지 못(!)했다. 늘 불온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에 행복감이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이런 자신에게 못 견뎌 불만이기도 했다. “됐어, 이 친구야. 고만해, 네가 뭐 대단하다고 그래, 너나 잘하세요.” 하지만 마음속은 늘 아수라장.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로서의 사명감과 속편한 관료적 처신 사이에서 다투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유능한 청년들이 공직에 들어오면 피동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뭘까?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일에는 모두 득달같이 달려들지만, 겉으로 태가 나지 않는 지루하고 고단한 일은 죄다 서로에게 넘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이 맑던 젊은이는 주민에게 효능감을 줄 수 있는 행정 서비스보다는 받지 말아야 업무와 타 부서로 떠넘길 일들을 고민하는 노회함을 먼저 배우게 된다.

책상 가운데 선을 긋고 짝꿍의 필통과 몽당연필, 노트 귀퉁이가 넘어오지 못하게 부라리던 초등학생의 치기. 그 유치하고 남루한 부서와 부서 내에서도 팀 본위주의를 먼저 익히게 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밀고 당기는 자잘한 심리전이 동반된다. 팀과 부서 간 모두 조밀한 철책을 사이에 두고 사주경계에 소홀하지 않는다.

기업과 달리 행정조직은 나라가 부도나지 않는 한 망하지 않는다. 일반 사기업이었다면 방만한 업무와 무사 안일한 임원으로 인해 직원 임금을 주지 못하거나, 부도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행정 관료조직에게 이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독일의 정치 경제학자 막스 배버(Max Weber. 1864~1920)는 현대 국가에게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은 위계적 구조에 명확한 권한과 규칙과 규정에 의해 선발되어 훈련되는 전문직 공무원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도 공무원에게 윤리적 책임감과 공익적 사명감이 없을 때, 그들은 ‘책상에 묶여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물론 정부조직을 사기업처럼 운영할 수는 없다. 행정조직의 존재 이유는 기업과 같은 주주들의 이익이나 높은 영업이익을 통한 자본의 증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업 성과나 생산성이 떨어지면 바로 인사고가에 반영하고 정기적으로 20%가량의 낮은 성과를 낸 직원을 교체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는 기업과는 다르다. 하지만 공무원이 무능하거나 복지부동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이어선 곤란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런 정부조직이 나라를 좀먹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굳이 대한제국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다.

살벌한 성과 중심의 경쟁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자기 접시만 깨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영혼 없는 이들을 해고할 수 있는 장치는 없는 것일까? 오히려 지금의 시대정신은 “일 많이 하면 다친다.”는 보신 문화와 상습화된 직무 태만 행태에 감사의 초점을 맞춰 ‘공무담임’에서 배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공직은 법에 따라 규율되는 시민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만큼 태생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에 묶일 수밖에 없다. 공권력을 배경으로 국민의 의사와 형편을 무시하고 독선적·획일적·고압적인 공급자 위주의 행태에 대해 국민들은 ‘관료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사명감 이전에 급여를 받는 월급쟁이다. 최소한 봉급에 부끄럽지는 않아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직급이 높을수록, 월급이 많을수록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 초급관리자는 초급관리자답게, 중간관리자는 중간관리자답게. 변화를 읽지 못하고 타성에 젖다 보면 ‘초식동물의 피를 묻히고 얼려 세워 둔 이누이트의 날 선 칼날을 핥다가 결국은 혀를 베어 죽는 늑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전봇대 하나 옮기는 데 몇 달씩이 걸려서야….”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목포 대불산단 사거리의 전봇대 2개를 콕 집어 이야기했다. 선박 조립업체를 드나드는 트레일러가 사거리에서 회전할 때마다 전봇대 2개 때문에 회전반경이 나오지 않는다는 업체 관계자들의 요청을 듣고 나온 말이었다.

대통령의 말이 보도되자마자 산자부 공무원들이 목포로 달려갔고, 5년간의 지속적인 민원에 꿈쩍도 않던 지역 공무원들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전에 전신주 철거 작업을 요청했다. 전봇대 2개가 그렇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지적해야 공무원들이 움직인다.”며 개탄했다.

하지만 요란한 뉴스 뒤에 숨겨진 사실이 있다. 당시 업체들이 요청한 것은 전봇대 2개를 뽑아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전봇대 2개가 아니라 회전을 했을 때 차량을 가로막는 전신주 모두를 인도 밖으로 빼서 2m 정도의 선폭을 확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전신주 및 전선 지중화, 수송에 지장을 초래하는 가로수·가로등 이설, 교량 하중 보강, 간선도로 일부 구간 중앙분리대 조정 등 4건이었다. 하지만 관련 사업 모두 예산과 관계부처의 떠넘기기로 지중화 사업마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전봇대 2개는 현장의 요구에 무감하고 집행을 모르는 관료주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공무원은 철밥통이다. 공무원은 창의성이 없다.”

제1호 지방행정의 달인 공무원 최덕림은 『공무원 덕림씨』에서 위의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게 만들었던 문장. “일하는 자에게 가장 가혹한 비판자는 일하지 않는 자”, 이 대목에 난 밑줄을 그었다.

공무원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일을 많이 할수록 풀어야 할 과제가 많고 다양한 현장 경험이 축적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매뉴얼로 정립되어 후배들에게 이월해 줄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이것은 오직 현장에서 부딪히며 일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산지식이다. 이것은 수천 권의 독서로도 압축식 과외로도 획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후배들에게 주어야 할 것들은 바로 현장에서 퍼 올린 ‘규정집에 없는 지혜’다.

나는 지난 2008년부터 후배들에게 현장 경험을 OJT(직무교육)로 전수하고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체험이란 뼈로 기억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앞으로는 각 부문에서 공평보다는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그래서 ‘이기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지더라도 또한 즐거운’ 더불어 함께하는 우리가 되기를,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공직자이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될 순 없다. 사람 그 누구도 숨 쉬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공무원에겐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가 너무나 뚜렷하다.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나치 독일의 전범재판을 방청하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지켜보며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수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처형하고 고문했던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집에선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이웃들에겐 친절한 주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했던 말들은 유사했다. “나는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통의 명령을 받은 책임자는 행정명령을 내려보내고, 과학자는 독가스를 개발하고 수용자의 관리자들은 유대인을 선별하고, 병사들은 이들을 발가벗겨 가스실로 밀어 넣었다.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을 전시(戰時) 공직자의 사명, ‘상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그들은 지켰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지칭하며, 어제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 어떤 연쇄 고리를 따라 사회적 참사로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깨어 있지 않아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위계조직 내의 조직문화는 개인의 각성과 저항의식을 무력화하기에 때로 위험하다.

회사원과 공직자는 모두 월급 받고 일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공공선을 위한 사명감의 여부다. 특히 코로나 19와 같이 큰 재앙이 닥칠 때 공무를 담임한 공직자는 자신이 아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선의 맨 앞줄에 서야 한다.

사명감 이전에 적어도 봉급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에서 나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위해 새털 같은 공시생 청춘들이 노량진에서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부하고 있지 않은가. 청렴의 시작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딴생각할 겨를 없이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식을 갖고 순직한다는 마음가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