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39 탈락자들의 명제
공무원의창#39 탈락자들의 명제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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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제가 왜 안 됐죠?”

먼지 쌓인 물음표를 되찾은 기분이다. 얼마 만인가, 아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질문. “제가 왜 떨어졌습니까?”라는 질문. 그날은 우산 쓰기에도 안 쓰기에도 애매한 날씨였다. 경의선 지상부 숲길 공원. 구민걷기대회 행사장에서 만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인인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보슬비가 송골송골 맺힌 비닐 옷을 입은 채 다가와 물었다. 짐작이 갔다. 그의 말에는 당연히 낙찰될 것으로 믿었던 경쟁입찰에서 떨어졌을 때의 당혹감이 묻어났다. 조금 더 나아가 마치 무슨 흑막이 있는 것 아니냐는 표정이다.

“당선자에게만 통보가 갔을 겁니다.”

이럴 때가 참 곤혹스럽다. 심사위원장이라서 누구보다 분위기를 다 아는 나로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답할 수 없는 처지다.

구의 대표적인 축제의 총감독 선정을 위한 심사위원회가 있었다. 감독 섭외지만, 감독은 프로그램과 출연진 섭외 등의 모든 권한을 얻기에 일종의 턴키방식 입찰이었다. 2명의 후보가 응찰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그는 지역 토박이에, 유력 지상파 방송국의 PD 출신답게 언론사를 십분 활용한 홍보와 네트워크, 그리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경쟁 후보는 기존의 수탁자인 유경험자였다. 몇 번 행사를 맡았기에 디테일에 강했다. 무엇보다 심사위원들의 눈높이에 맞게 자분자분 설명하면서 눈길을 골고루 주며 공감을 얻어 내려 했다.

결과는 기존 에이전트의 승리. 심사위원은 교수, 축제전문가, 문화예술계 인사 등 7명이었다. 개별 채점이라 당락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상 발표자의 태도, 나이 등이 변수로 작용하는 듯하였다. 태도와 나이, 즉 콘텐츠 이외의 부분도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할 땐 영향을 준다. 그러니 떨어진 분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분 역시 각종 행사를 기획·연출하며 ‘장인’이라고 나름 자부하셨을 것인데.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승진심사, 정부표창 심사 등에서 나이가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어린놈이 감히 얻다 대고.” 7~10년 이상 형님들과 경쟁을 하였으니 오죽했을까? 단지 그 이유라면 그래도 감내할 만했다. 젊음의 무기는 패기. 그러나 겸손하지 못하다는 게 위원들의 공통적인 감점 요인인 듯했다. 태도가 독이 되었다.

나는 되레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알게 모르게 축제 전문가들끼리 밀어 주고 끌어 주는 듯한 분위기도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구에서 위촉한 심사위원단이 채점으로 결정한 이상 승복할 수밖에. 모르긴 해도 인적 네트워크가 영향을 미치긴 했을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의 정시나 공무원 1차 시험과 같이 채점 기준이 명확하면 탈락자들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자신이 틀린 문제도 금방 확인할 수 있고, 어떤 약점을 보강해야 다음에 합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답답한 건 이런 정량적 평가기준이 아니라 면접과 같은 정성적 평가에서 떨어졌을 때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떨어지면 경쟁 후보들의 면면이나 작품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디자인 심사나 건축물 공모전의 경우 선정된 작품이 나중에 공개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승복하거나 내심 불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디션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떨어졌던 배역의 맡은 이의 뮤지컬 공연을 보고 본인의 실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며 그 출연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는 연기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끝내 영문을 모를 때 탈락자들의 찜찜함은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공기업 면접에서 탈락했을 때.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계약서 도장만 찍으면 되는데, 다른 업체가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 클라이언트의 요청으로 3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응찰했는데, 뒤늦게 경쟁입찰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공사 친(짜놓 은) 판에 들어간 것이라는 알았을 때.

이성 관계에서도 영문을 모르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첫 소개팅 자리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즐겁게 웃으며 호감을 보냈던 그녀가 두 번째 만남을 거절했을 때. 늘 해맑던 그녀가 어느 날 아무런 설명도 없이 “헤어지자.” 하고 연락을 끊었을 때 ‘탈락자’들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된다.

언젠가 공개경쟁입찰에서 ‘탈락 보상금(Rejection fee)’ 도입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많은 업체가 응찰해서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고르는 것이 최선이지만, 응찰하는 업체 입장에선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많은 역량을 소모해야 한다. 그래서 중소규모 광고업체에선 규모가 큰 경쟁입찰에서 연속으로 떨어지면 회사가 휘청거린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적어도 입찰 준비에 소요되었던 시간과 돈의 일부라도 보상하자는 취지가 바로 탈락 보상금 제도다.

탈락 보상금도 좋지만, 탈락자들 대부분은 돈이 아닌,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된 송강호. 그는 특별히 봉준호 감독과 작업을 많이 했다. 봉 감독의 초기 작품 중 예산이 비교적 적게 투입된 영화에도 송강호는 출연하곤 했다. 그 이유를 송강호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무명 시절 가장 답답했던 것이 오디션을 보고 계속 떨어지는데, 그 이유를 전혀 몰라 답답했다고 한다. 이유를 알면 무엇을 고쳐서 보강해야 할지가 분명한데, 이유를 모르니까 그저 자신의 연기 전체를 비하하게 되었다는. 그 시절 단 한 사람만이 오디션 탈락 이유를 상세하게 문자로 전해 주며 예의를 다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시 봉준호 조감독이었다고.

탈락, 그 자체가 자극이 되는 경우는 없다. 성장하려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이유일 것이다. 물론 난 심사위원장이고 채점표를 수합 발표하는 역할만이 주어졌기에 그에게 더 이상의 조언은 해 주지 못했다. 다만 14회를 치른 그 축제를 지역민인 그가 잘 모른다고 하니, 축제에 직접 참가해서 꼼꼼히 분석하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년에 다시 도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탈락의 이유를 조건과 심사 구조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