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수기 / 戰場 속으로!
참전수기 / 戰場 속으로!
  • 강신종 대한민국 해군 예비역 전기부사관
  • 승인 2023.07.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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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종 대한민국 해군 예비역 전기부사관
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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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내가 승선한 한국함대 제1전단 11전대 전투함인 DE-73(충남함)은 모항인 진해기지에서 극비리에 장기항해 준비를 마쳤다. 우리들은 상부에서 나누어준 봉투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넣은 후 군번과 성명을 기입하여 제출하였다. 영문도 모른 체 불안만 채워갔으며, 내심 굳은 각오로 다짐을 하며 지긋이 어금니를 물어본다. 나는 행선지도 모른 체 1965. 2. 12. 캄캄한 밤 진해기지를 출항하여 4시간의 당직을 마치고 침실로 갔다. 불안은 꿈으로 나타나 미지로 항해하고 있었고 괴물에 놀라 소리치며 깨어보니 새벽이 밝아왔다. 의외의 고요 속에 갑판으로 나가보니 희미한 안개 속에 보이는 것이 부산외항에 묘박(anchoring)중이었다.

멀리 부산항 제3부두에 계류한 한국함대 제2전단 수송선인 LST 3척이 유류, 식품, 장비 등을 탑재하고 있었다. 하루를 지나 출항이 가까워지자 병력이 탑승하는 모습이다. 1965. 2. 14. 우리는 해군수송선 LST 3척을 호위하여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항해 이틀째가 되어 일본영해에 들어설 무렵 함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우리는 임지로 간다. 승조 장병들의 승리와 무운을 바란다”는 요지로 간단히 방송을 하였다.

우리는 하루에 약 250마일(402km)씩 항진하며 베트남으로 다가갔다. 북태평양의 일본 령 도리시마 근해를 지나 남지나(南支那)해로 들어서자 갑판엔 봄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진해의 2월 바람은 살을 에이는 추위였는데, 3~4일이 지나자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로 들어서면서 불안과 초조함이 망상이 되어 뇌리에 박혀오고 있었다. 지휘부는 이러한 심리를 파악한 듯 조석으로 함포정비와 전투태세훈련을 계속하면서 월남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좌측)탄원인이 승조했던 호위구축함 DE-73 충남함/ 소련 극동해군 소속의 로미오급 잠수함
좌측)탄원인이 승조했던 호위구축함 DE-73 충남함/ 소련 극동해군 소속의 로미오급 잠수함

우리는 10여 일의 반복되는 훈련으로 지칠 대로 지쳐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샤워장을 행할 때면 온갖 실음이 사라졌다. 간혹 취침 전 짬을 내어 갑판으로 뛰쳐나와 상쾌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깊은 호흡을 해본다. 잔잔한 밤바다를 바라보면 적막감과 함께 가슴 속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불안감은 나를 마냥 주검 앞에 두고 만다. 우리는 사는지 죽는지 알 수 없었다 적진에 뿌려진 공수부대 이상의 심정으로 항해 하고 있었다

이때 느낀 감정이 대한민국 해군 전설의 주인공 한국함대 소속 73함의 소련잠수함 추적사건이었다.

1964년의 일로서 내가 승선한 DE-73함(루데로급)은 호위구축함으로서 전기 추진식 전투함이며, 함교는 항해를 책임지며, 항행의 동력은 기관실에서 함교의 지시에 따라 조종간을 “전기사”가 잡는다. 부상시킬 당시 나는 전기 부사관으로서 7시간 동안 스롯틀(throttle)을 잡은 사건으로서 지금도 자긍심을 갖고 있다. 1964년 10월 13일 동해 해상 경계 중 소련 잠수함을 발견하였고, 우리는 영해를 침범한 소련잠수함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바다 속에서 잠행하는 잠수함을 발견하기란 사막에서 바늘구멍을 발견할 만큼 너무도 힘든 사건 이였다. 우리는 식음을 전폐 한 채 7시간 동안 조정간을 잡아 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소련과 미국 등 우방국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준 완전 전설적 사건이었다. 이 공로로 1965년 2월1일 공로표창을 받았다. 추적 7시간 만에 부상한 잠수함은 구 소련 해군극동함대 소속의 로미오급 잠수함이며, 우리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며, 전시였으면 침몰 시켰을 것이다. 이때 미 해군은 물론 세계언론이 주목하였든 바 있다. 이 때를 회상하며 우리는 극한경계심과 애국심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 VC(베트공)이 출몰할지 모르는 전선 없는 전쟁에 투입되면서, 어쩌면 다시 되돌아 올수없는 이 길이 아니기를 바라는 복잡한 상념들이 머리를 스치며 공포를 몰고 온다.

어느덧 이 전쟁의 발단이 된 통킹 만이다. 1964. 8 .2. 통킹 만에서 미 구축함 메톡스호가 배트공의 어뢰정공격을 받자 이에 미국은 북 베트남에 선전포고와 함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 바로 이곳을 지나 메콩 델타를 돌아 들면서 사이공 강 어귀로 진입하였다. 이때 갑자기 서행신호가 긴급하게 울렸다. 깜작 놀라 갑판으로 뛰쳐나가보니 현지 베트남 도선사가 승선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전투배치 명령이 떨어졌고, 도선사의 지휘 아래 사이공 항을 향한 좁은 수로의 항해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부서를 가리지 않고 육군에서 사용되는 개인화기를 지급받고 50도나 되는 쩔쩔 끓는 철판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VC(베트공)이 쾌속 쌈판으로 어뢰 공격을 하면 저지하기 위한 감시와 기뢰의 접근에 대비하여 보이지도 않는 정글 속을 노려보며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충남함은 좁은 강폭을 좌우에 두고 꼬불꼬불한 정글을 헤치며 항진하고 있었다.

기습공격에 대비하며 사이공 부두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 때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이 바다를 통해 개선 귀항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긴장 속에 5시간 50여분의 공포를 이겨내고, 2월25일 오후 우리가 무사히 사이공 중앙부두에 기항하자 어린아이가 쓴듯한 어지러운 글씨로 “환영 대한민국 해군”아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어린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입항준비와 계류작업, 청소, 기항전환 등 바쁜 일정 다음으로 환영 행사다. 참석자로는 콴 수상, 티우 국방장관, 국군총사령관, 장관 및 장군과 테일러 미국대사 및 우방국 대사, 웨스트 모랜드 대장 등이었으며 18시30분 화환증정식 다음으로 월남연예인들의 축하잔치가 이어졌다. 부두 앞에는 한국군원조단선발대 연락사무실이 있어 군사고문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처음 와본 열대지방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군복은 땀으로 적셔지고, 이국땅은 밟아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전쟁지역이라고 하여 병장은 1불20센트, 상병인 나는 일당 1불씩 전투수당도 받았다. 모두가 동시에 상륙허가가 허용될리는 없을 테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당직자를 제외하고 계급별로 섞어서 상륙허가가 짜여졌다. 전쟁지역이라 복잡한 훈시를 듣는둥 마는 둥하고 함정에서 내리자마자 야자수 그늘로 향했다.

안내 받은 대로 사이공 시내로 들어서니, 시내 중앙 통에 헬리콥터가 떨어져 불타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이곳을 둘러싼 무장한 미군들은 맥주 캔을 들이 키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전쟁터구나” 하는 느낌이 뇌리에 찍혀온다. 중앙 통 분수대 앞에는 독재자 고딘디엠 대통령의 동상이 끌어 내려져 뒹굴고 있었다.

제1 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10명)의 파병 이후 대한민국 해군이 비둘기부대 1진을 호위하여 제일 먼저 격전지에 상륙한 것이다. 10여일 이였지만 성대한 환영도 받았고, 수도사이공에 상륙하여 전쟁의 참혹함으로 몸서리도 쳐보았으며 몇일 이지만 전쟁수당도 받아 사이공 맥주도 마셔보았다.

1965. 2. 26. 새벽 상륙 주둔지 디안에 무사히 도착 하였고, 본대인 2차2진은 탄원인이 승선한 충남함이“비둘기부대”제1진을 비밀리에 작전지역까지의 호송에 성공하자 본국에서는 본대인 2차2진을 급히 꾸리고 있었다.

국가방위력과도 맞먹는다는 미 극동함대사령부 7함대소속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도 꺼리고 우리를(충남함) 앞장세웠던 것은 우리가 호위한 제2 파병 제1진은 군사적으로는 선발대이며 척후병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미 정부가 "간 보기로" 파견한 병력인 것이다. 선발대는 장, 단기 체류 기간의 말 함이 아니고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임무가 철저하고 충실하여야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남함이 호위한 선단은 척후 선발대임으로 우리가 잘못되면 본대는 물론 파견자체가 와해 될 수도 있었던 국가적 상황으로서 비밀 유지가 필수적이었던 군사행동이었다.

우리는 항해 중에도 항상 초 긴장상태로 전투태세를 유지하면서 공습 훈련, 사격훈련, 퇴함훈련, 잠수함 추적 훈련, 해상보급훈련, 환자 충남함 이송 등 강도 높은 호송 임무를 수행하였고, 1965. 2. 25. ~ 2. 27.일까지 사이공 항에 정박 중에도 함께 동승한 우리의 UDT(수중폭파대)가 밤 낯으로 잠수하여 수색하고 올라오면 전투함인 충남함의"소너" (SONAR)를 가동시켜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위 감시 지원을 함으로서 병력 및 물자의 선, 하역의 군사작전을 완료시켰던 것이다.

3월1일(월) 오늘은 현문철수와 동시에 출항준비 및 총원전투배치명령과 함께 귀국 항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1차로 LST-816(화산함)이 2차로 LST-809(비봉함)이 3차로 LST-808(덕봉함)이 중앙부두를 출항하여 저녁 무렵 통킹 만으로 나와 대양을 헤치며 본격적 귀국 항해가 시작되었다.

출국 때 항해와는 달리 긴장감은 덜했으나 저속의 수송선을 호의 해야 하는 관계로 공산국가들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신중한 항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대공방어훈련, 잠수함 추적훈련, 함포정비와 전투태세훈련을 계속하며 귀항을 독촉하고 있었다. 간혹 미국태평양사령부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했을 미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곤 하였다.

1965. 2. 25.동아일보
1965. 2. 25.동아일보

한편, 귀국상황을 앞에 두고 밀어두었던 2차2진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1965. 3. 10. 제2진 본대 1,283여명은 인천항에서 미7함대 AP공격용수송선에 승선하여 7함대 항공모함과 동 탑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1965. 3. 16.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제2진 본대는 인천으로부터 월남상륙까지 대대적으로 홍보 보도한 반면, 목숨을 걸고 실제적 파월의 선봉에 섰던 우리 함대는 쏙 빼놓고 보도 통제까지 당해왔던 것이 사실상의 전사(戰史)였음이 당시 동아일보 1965. 2. 25.자가 말해줍니다. 신문은 우리를 파월 2차 수송함대로 보지 않고,“해군특수수송전대”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1965. 2. 25.자 동아일보기사

이렇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왔다고 국가에서도 천대받고, 기록에서도 사라져버린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가 호송한 이 부대의 주둔지는 수도 사이공 부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둔 17일 뒤인 4월2일 베트공의 공격을 받아 4월23일 경비병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1개 보병대대(360명)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이들 부대는 비전투부대의 성격이지만 당시 베트남에는 전선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실상 전투부대와 같은 임무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진해사령부로 귀항한 뒤인 1965년 9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호송한 비둘기부대 제1진 모두는 1965년 3월 15일부로 전투참가부대로 소급 적용되어 월남지역 파월전투참가 부대[별표 2]에 파월참전유공자로 등록되었으나, 우리는 “주월한국군” 소속이 아니고 대한민국 “한국함대” 소속이어서 참전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것이 공정과 정의인가 묻고 싶다.

파월전투참가 부대[별표 2]에 포함된 부대는 우리가 호송한 비둘기부대 제1진 127공병대대, 건설지원단본부 및 본부 근무 대(해,공,해병포함), 육군 제101 경비대대, 육군 제127야전공병대대, 육군 제301 수송자동차중대 및 우리 후진으로 가담한 해군수송함 LST-812 한 척 뿐이다.

그렇게 국가에 충성했고, 그렇게 배워왔으며, 조국의 발전과 민족 앞에 조건 없이 순종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길이며 신조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형평성의 문제이고, 명예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와는 달리 근간의 뉴스를 보면

1940년 일제시대에 옹진출신 이종호(17세)가 국세조사 입 광고판에 연필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것을 손혜원의 부친 손용우(19세)가 동조한 사건이었고, 그는 조선공산당 공산청년연맹 서울지부가입을 한자였다. 그러한 자 임에도 불구하고 좌파정부 문재인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결정하였다. 암흑과도 같은 편가르기와 자기들끼리만 이익을 공유한 좌파정권이 물러가고 공정, 상식, 정의가 숨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말 그대로 공정하게 심의하여 주기 바란다.

월남전의 참전은 우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1970년 대 들어서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국군현대화와 경제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독일로 간 광부나 간호사들 역시 혼과 육을 바쳐 국가재건에 밑 걸음이 되어 씨앗을 틔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가재건과 경제발전을 위하여 할 일이 너무도 많아진 것이다. 일할 사람들이 부족한 시대를 도래시킨 것이다. 타 군은 2~3일간 문서 연락병인 전령도 참전으로 인정받는 다는데, 최초로 전장의 길을 튼 대한민국 전투함대는 왜 참전유공자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1973년 12월 입대해 7주차 훈련중인 159기 수병들 충무(현재의 통영시)에 있능 이순신 장군사당 충렬사를 참배하고 귀대 중 해군장병 158명 사망사건
1973년 12월 입대해 7주차 훈련중인 159기 수병들 충무(현재의 통영시)에 있능 이순신 장군사당 충렬사를 참배하고 귀대 중 해군장병 158명 사망사건/1974. 2. 23. 한국일보

나는 1967년1월27일 해군에서 만기제대 한 후 충격적인 보도를 접하였다.

1973년 12월 입대해 7주차 훈련 중인 해군159기 수병102명과 해경훈련생 50명 그리고 기간요원 6명 등 158명은 1974. 2. 22.정신교육훈련 중 성지순례지인 충무(현재의 통영시)에 있는 이순신 장군사당 충렬사를 참배하고 귀대 중 해군장병 사망 사건으로서 “세월호”와 똑 같은 선박 사고인데, 세월호는 학생들이 학창시절을 기념하기 위한 여행이였고, 해군159기 훈련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젊음을 바치려 한 젊은 삶이였다. 그들의 보상의 크기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때 법으로 덤벼들면서 쾌락을 즐기려고 벌거벗고 놀러 가던 젊음은 보상해야 한다면 누가 조국을 위하여 희생할 것인가? 이태원을 차치하고라도 보훈부는 민간학생 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있는 해군 후배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국가보훈 의식증가는 사회갈등 요인 감소와 경제성장 증가로 이어진다. 박민식(맨 앞) 국가보훈처장과 국방부 의장대 장병들이 지난 8월11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합동묘소에서 수유리 광복군 선열 17위의 영현을 봉송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 의식증가는 사회갈등 요인 감소와 경제성장 증가로 이어진다. 박민식(맨 앞) 국가보훈처장과 국방부 의장대 장병들이 지난 8월11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합동묘소에서 수유리 광복군 선열 17위의 영현을 봉송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국가 보훈의 경제적 가치  2022. 10. 05.일자 문화일보기사

참전유공자에 관한 법률 제1조

이 법은 국가에 공헌하고 헌신한 참전유공자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와 지원을 함으로써 참전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훈부와 군 당국은 가능하면 이 법에 따른 참전유공자의 지정을 가능한 확장해석 해야 함에도 그동안 역행해왔다. 그 이유에 대하여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그 이유가 정부예산 때문이라면, 더욱이 이해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노병들을 모두 참전유공자로 인정해준다 해도 전차 1대 값 및 그 유지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정으로 인하여 얻는 군 사기진작 및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는 전차 몇 대의 군사력과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얼마 전 국가보훈처와 서울행정학회가 공동으로 연구 분석한 결과, 우리 국민의 보훈의식 지수가 1%만 올라가도 사회갈등 요인이 줄어들어 약20조7100억 원의 경제성장 증대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미루어볼 때 해군은 국제신사라는 명예와 같이 절대로 때 법에 의존하지 않는 평범하고도 자존심강한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다.

보훈부는 사실과 진실을 하나라도 더 발굴하고 넓혀 애국정신을 함양시켜야 하는 임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즉시 하지 않고 잘못된 정치인이나 신문, 잡지의 보도를 인용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월남패망을 예고했다는 리영희 선생의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는 공산주의자 문재인 시대에서 배척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명예를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현 정부에 드리는 탄원인 동시에 호소문이다.

1967년1월27일 해군에서 만기제대 한 후 1975년 4월 30일 월남 자유민주주의 정권은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에 패망했다. 이에 앞서 1973년 3월 23일 월남에 주둔했던 주월사령부가 월남에서 철수했다.

파리협정 체결이 있은 1973년 3월 23일, 주월사령부의 철수로 모든 군사 활동은 중지되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우리 교포와 대사관 공관원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귀국수송부대의 최종수습 역시 해군의“십자성 작전”이었다.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현 정부에 드리는 호소이며, 망가진 해군의 진정한 애국심과 공로가 이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