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40 가끔 민망해지는 그 시절의 ‘꿀꺽’에 대하여
공무원의창#40 가끔 민망해지는 그 시절의 ‘꿀꺽’에 대하여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1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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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갓 입사한 햇병아리 시절이었던 1985년. 난 석파정(石坡亭)의 눈썹이 바라다보이는 종로의 북쪽 동사무소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엔 선배 K가 있었다. 당시 선배라는 지위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권세가 있었다. 현장 실무에 대해 사전에 교육을 받고 현장에 배치되는 것이 아닌, 현장에서 선배에게 도제식으로 배워야 했다. 매뉴얼이나 클릭 한 번에 관련 양식을 모두 다운받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운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선배 마음대로, 그의 스타일대로 곁에서 일을 도우고 깨지며 배운다는 말이다. 다행히 합이 맞으면 가족보다 더 많은 정을 나누는 끈끈한 동지가 된다. 그 시절 선배의 다정한 눈빛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그래서 선배님은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는 말이 그저 허언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분, K는 유난히 키가 작고 입술이 까맸다. 하루는 그가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들릴 듯 말 듯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사정이 어려우니 돈을 꿔 달라는 말이다. 두말하지 않고 나는 그분과 대동해 1㎞ 정도 떨어진 세검정 국민은행에서 가계수표를 발행받았다. 15만 8천 원. 1985년 겨울이었으니 풋내기의 초봉보다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차일피일 미루더니 몇 달 후 5만 원만을 주고 입을 씻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주위에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선배들은 죄다 알았지만 나만 몰랐던 것일까. 직장 동료, 심지어 동네일을 보는 통반장, 지역 유지와 알고 지내던 주민들까지. 그래서 그분은 사무실에 출근하면 뒷문으로 으레 사라지는 습관이 몸에 뱄었던 것 아닐까.

이듬해에는 내가 사회복지 업무를 보게 되었다. 청와대 뒤라서 그런지 어느 날은 비서실 무슨 비서관이라는 분이 연말 민정시찰을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연말연시나 명절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과 성품이 많이 들어왔다. 마침 지역에는 대한항공 회장님 저택이 있어 민간 성품이 많았고, 특히 라면이 많이 들어왔다.

지역 영세민들에게 라면 박스를 드리는 업무를 하던 중, 사시는 것이 너무 허름한 세대가 있어 2박스를 아주머니께 더 내어 드렸다. 아주머니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배춧잎 한 장을 꺼내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바쁘기도 하였지만 뿌리치기는커녕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 순간이 휙 지나가 버렸다. 나는 왜 그 돈을 모른 척했을까. 동장과 사무장 등의 업무 분장에 대한 반발심에서였을까.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당시 우리 조직의 경조사 부조금이 통상 1만 원이었다. 그러니 지금으로 보면 5~10만 원 정도였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 공적 부조 대상인 영세민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1종은 거택보호자, 2종은 자활보호자, 3종은 의료부조자. 이분들은 노인 세대가 아니었고, 가족이 많아서 아마 2종 아니면 3종이었을 것이다. 그 순박하고 가엾은 분에게서 나온 배춧잎 한 장을 꿀꺽한 것이다. 생각하면 두고두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2005년 창전동 민원창구에서 일했던 시절. 창전동 민원창구엔 유명한 미대 교수와 장군 출신의 누구누구도 자주 온다고 터줏대감 서무직원이 귀띔을 해 주었다. 그 영예와 품위를 가지신 분 중 한 분이 증명서 발급을 위해 오셨다. 발급 수수료가 2만 원이니 비교적 비싼(?) 증명민원이었다.

증명서를 내주고 그분이 돈을 준비하는 사이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리고 다시 봤을 때, 내 앞에 있어야 할 그분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황급히 뒤따라 뛰어갔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잔고에서 돈이 비면 담당자가 채워 넣어야 했기에 나는 메모지에 그분의 이름까지 기록해 두며 그분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분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교수님이라 바빠서 깜빡했겠지. 아니면 이미 줬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돈 2만 원이 아까워 이제 다른 동사무소를 찾아가 업무를 본다면…. 그분은 설마, 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