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42 청탁에 대한 현명한 대응
공무원의창#42 청탁에 대한 현명한 대응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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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이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걸음마다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청탁. 특히 동장을 두 번 하면서 알게 된 지역 유지들의 청탁은 늘 우회 없는 직진이었다. 개중에는 간단한 것도 있지만 십중팔구는 안 되는 것도 많았다. 그중 가장 민감한 건 당연히 인사 청탁이다. 인사권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바로 그것. 청탁하는 자들은 인사권자에게 안 통할 것 같으면 중간관리자에게도 한다.

사실 청탁은 ‘부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행 ‘청탁 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하는 부정 청탁은 불법적 청탁을 의미한다. 일종의 대가를 받거나 받을 목적으로, 공정성을 훼손하며 들어주거나 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불법적 청탁이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인사권에 개입하거나 부당한 편익을 봐주는 대가성의 경우 ‘알선수재(뢰)죄’가 적용될 수도 있다.

이렇듯 청탁의 범주는 방대하고 모든 청탁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인사권자나 인사추천기관에 어떤 직원의 강점을 알리고 추천하는 행위나 민원의 신속한 처리와 같은 것은 나쁜 청탁이 아니다. 인사에 대한 평가나 추천을 통해 나는 직원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고, 다양한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을 배우기도 한다. 적성이 전혀 맞지 않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직원이라면, 특히 오랫동안 기피 부서에서 헌신한 직원이라면 응당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의 부탁 중에는 일반적인 경로가 아닌, 사람을 통해 부탁을 해 오는 경우가 있다. 왜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지 않을까. 당연히 안 되는 것이니 청탁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미 담당 부서에서 안 된다고 답변을 한 것들이다. 그리고 직원들이 널려 있는데, 굳이 동 최고결정권자인 내게 부탁을 할까. 이런 것이야말로 답이 뻔하다.

문제는 대응하는 방식이다. 젊었을 때 나의 대응 방식은 “가까이 오면 발포합니다.”식이었다. 청탁하는 자를 경멸하기도 했으니까. 어떤 지자체장은 인내심 있게 인사 청탁을 들어주고, 막상 인사 시즌에 자신이 청탁받은 이를 모두 누락시키는 ‘패기(?)’를 통해 교훈을 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청탁을 다 들은 뒤 사무실 벽의 CCTV를 가리키며 “모두 녹음되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 수사 의뢰할까요?”라고 말해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중 없이 모든 청탁을 이리 대처할 순 없는 노릇이다. 거절에도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나는 청탁이 들어오면 우선 듣는다. 들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하지만 부탁을 하시는 분도 즉흥적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고민 고민 하다가 ‘아, 이 사람이면?’ 하고 결심했을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게, 너무 과민하게 반응까지야. 그렇게 인내를 갖고 경청을 한다. 그리고 물어본다.

“혹시 담당 부서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 말씀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 번 더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오랜 경험상 지방행정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직 담당이나 팀장을 넘어설 수야 없다. 그리고 말로만이 아니라, 최소한 절차 정도는 알아본다. 해 보지 않은 업무라도 흐름을 알면 줄기가 보인다. 안 되는 것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왜 안 되는지를 알아야 그분의 청탁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 되는 이유를 직접 언급을 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이 중요하다. 부서의 담당자도 보호해야 하고, 부탁한 분의 심정도 헤아려야 하므로 스터디가 필요하다.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개중에는 해 줄 수 있는 것도 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부탁한 분이 기분 나쁘지 않게 대응해야 한다. 딴에는 안면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부탁한 것인데, 앞서 담당자가 얘기한 그대로 법과 원칙이 뚝뚝 떨어지는 말을 되풀이한다면, 관료적인 느낌 때문에 정나미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상급자의 몫이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했다는 느낌이 오도록 한다. 왜 그분들이라고 모르겠는가? 금방 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을. 단, 규정이 애매모호할 때는 내부 논의를 거쳐서 해 주는 쪽으로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 경험칙이다.

한번은 내가 과장으로 있었던 업무를 현직 팀장에게 알아봤다가 단서 규정까지 숙지하지 않은 내용을 인용해 사과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내가 내용을 잘못 안 것에 대한 사과이지, 그것 때문에 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른 다시 바로잡아 주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안 된다. 그럴수록 번개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되는 것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그 정도도 자신 없으면 처음부터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럴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내가 그 팀장님의 말씀을 너무 믿었었나? 나라도 한 번 더 관련 규정을 들여다볼걸…. 그래서 침해(익)적 행정행위는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이 꼭지는 글보다는 말로 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대목이다.

요즘 세상에 되는 것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다!

이와는 달리 내가 동장할 때 알게 된 지역의 리더이며, 봉사활동에 헌신하던 부부의 도움 요청. 생업인 달걀 도・소매상에 대한 식약처의 햇섭(HACCP) 인증을 받으려고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도와드렸더니, 평생의 은인이라고. 이거는 뭔가?

역지사지, 머리보다는 가슴. 권한과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이 진정 공인의 보람 아닐까. 2019년 10월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