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5]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5]
  • 임동식
  • 승인 2023.08.18 08:45
  • 댓글 0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임동식
임동식

[시정일보] 1944년 4월 어느 날 아침, 흰 적삼에 핫바지를 입은 아홉 살 태곤은 책보를 등에 메고 사립문 옆 배나무 아래서 울상이 되어 서 있다. 태곤의 나이 아홉 살이 된 이해 초에 백호동에 있는 일로남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이 학교는 백호동 마을 뒤쪽에 있었으며 그 뒤로는 나무가 없어 뻘건 속살을 드러낸 공동산이 있었다. 입학생들 대부분은 태곤보다 서너 살씩은 더 먹어 만학을 하는 아이들로서 이곳이 워낙 오지의 농경지이기 때문에 학문이 농사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학부모들의 인식이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웠던 점이 만학의 원인인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태곤은 상머슴처럼 덩치가 큰 아이들과 동기생이 되어 입학을 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날은 학교에 가야 할 시간임에도 사립문 옆에 울상을 짓고 서 있는 것이다. 이를 본 인길댁이 회초리를 들고 쫓아 나왔다.

"이 박살 맞을 놈이 놈(남) 애기들은 다 학교에 가는디 너는 어쩐다고 거룽에(문전에) 서서 떼장이냐?"

인길댁은 화가 몹시 나 회초리질을 해댈 요량으로 태곤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태곤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어메! 우리 학교는 똥통 학교여. 그렁께 일로북 국민학교(이후 일로중앙 국민학교로 개칭함)로 보내 주랑께!"

"놈 애기들은 잘만 가는디, 옆집 윤제도 잘 가고 근디 너는 뭣이 어쩐다고 이렇코 통을 파! 언능 안 갈래?"

"그래도 나는 똥통 학교는 안가."

"씨벌 놈이 새끼! 이리 온나(오너라)!"

인길댁은 태곤의 어깨를 틀어잡고 엉덩이와 등짝에 회초리질을 '퍽퍽' 해댄다. 이 모습을 보고 순녀가 달려와 회초리를 잡으며

"어메! 이러지 말어라우! 우리 동생 죽어불겄네."

이렇게 회초리를 낚아채며 인길댁과 태곤 사이에 끼어들었다. 회초리 몇 대에 죽기야 하랴만 순녀의 눈에는 그의 동생 태곤이 작은 타격에도 꺾여지고 말 어린 떡잎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회초리 인내(이리) 줘! 이놈 새끼 학교에 안 가면 패 죽여 불랑께."

"어메! 내가 학교에 델다(데려다) 주 것인께 어무이는 들어가이쑈!"

그렇다. 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리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맞는 사람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순녀는 인길댁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집으로 들어가게 한 후 태곤을 데리고 학교로 갔다. 그러나 끝내 태곤은 백호동에 있던 일로남국민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1946년 1월 16일 농장에 있던(당시 창고형 건물로 일제강점기 공출미 창고 3동과 부속 건물 2동) 일로남 국민학교를 광암리로 이전하여(이전 당시는 개인 사가를 빌려 교사로 사용함) 규모를 늘리고 교사를 신설하여 비로소 학교다운 학교로 면모를 갖추어 개교를 하게 되었던 것이며 1956년 7월 21일 광암국민학교로 개칭했다가 이듬해, 1957년 7월 21일 일로동국민학교로 다시 개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로동 국민학교의 교가는 이즈음에 지어졌으며 교가의 가사는 이렇다.

​무궁화 핀 삼천리에 역사 반만년 / 백두산 정기 받은 매봉산 아래 / 호남선의 철도를 앞에 안고서 / 영산강 푸른 물을 바라보는 곳 / 빛나는 배움터다 일로동교

서사적으로 표현한 지역의 특성과 학구열을 북돋아 주는 내용의 가사이다. 태곤은 열한 살이던 1946년도에 일로동국민학교 제4회 입학생으로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럼 순녀의 학력 관계는 어떻게 되었던 것이었을까? 순녀는 상신기리 한학동마을에 있던(당시 일로북 국민학교의 분교 정도로서 공인 된 학교가 아니고 3학년까지 있었음) 학교에 아홉 살에 입학을 하였던 것이며 같은 입학생이라도 나이가 일정치를 않아 심한 경우는 장가를 든 학생도 있었다고 하니 웃지 못할 일이요 격변기의 한 일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기는 일제의 우리 민족혼 말살을 목적으로 우리 국민을 황국신민화한다는 명목하에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고 학교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우리글인 언문을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시대가 이러하였으니 순녀가 배웠던 국어는 일본 문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익히고 산수 역시 일본어로 암송했던 것이었다. 순녀는 같은 교실, 같은 책상 앞에 앉아 같은 선생님에게 배워도 다른 교우인 오빠, 언니들보다 이해가 늦고 더뎌 이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3학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순녀 학력의 전부이다.

하기는 여자가 공부를 하여 무엇하냐는 것이 당시 부모들의 정서였고, 그래서 여자아이는 학교에 입학을 시키지 않는 것이 대다수인 가운데에 문맹은 면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