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32 땅속 워킹 다이어트
시정 인문학광장#32 땅속 워킹 다이어트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8.24 08:50
  • 댓글 0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이재영

[시정일보] “어? 언제 이리 나왔지?” 사회생활에 바쁜 남자가 환갑이 가까워지면 체중이 조금씩 늘다가 갑자기 배가 불룩 나오게 된다. 원래 몸집이 있는 사람은 덜하겠지만, 팔다리가 여윈 사람이 배가 나오면 영 볼품없는 몸매에 신경이 쓰여 안 하든 운동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남성이라면 지인들과 골프장을 돌면서 삶의 희열을 느끼며 건강관리도 하겠지만,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람은 부풀어 오른 배를 내려다보고, 깊은 한숨만 짓게 된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신도시 개발 구역의 땅 밑에는 ‘지하 공동구’라는 시설이 있다. 도시의 미관, 도로 구조의 보전과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하여 구축한 터널이다. 전력선은 지상의 전봇대 대신 지하 공동구의 ‘전력구’를 지나 중간중간 분기점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건물에 연결된다.

전화, 인터넷 등 각종 통신케이블도 지하 공동구의 ‘통신구’를 통해 필요 지점까지 전달된다. 그 외 수돗물을 공급하는 ‘상수구’와 중앙집중식 난방장치의 스팀을 공급하는 ‘에너지구’도 지하 공동구에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전력구, 통신구, 상수구, 에너지구 등은 중요한 국가 기간시설이다. 그 지하 공동구 설치와 유지관리를 각 지역의 ‘시설관리공단’에서 전담하여 수행한다. 그렇게 중요한 시설이다 보니, 지하 공동구 관리사무소의 방재실에 인원이 24시간 교대로 배치되어 근무한다.

그들은 터널 내부의 주요 위치를 비추는 비디오 화면과 관련 장비의 모니터를 감시하고 언제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 통상 각 공동구의 길이가 수 킬로미터가 넘는데, 점검을 위해 들어가는 인원은 방재실 인원과 무전기로 통화해야 한다.

그런데 지하에서는 전파의 감쇠가 심하므로 터널 내부로 수십 미터만 들어가도 무전기 교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하 공동구 내부에 별도의 무전기 중계설비를 설치하여 공동구 터널 끝 지점에서도 방재실과 통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영세기업체를 운영하면서 바로 그 무전기 중계설비를 제조하고 설치공사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특허등록을 획득한 ‘동일 주파수 동시 양방향 증폭기’를 사용하여 동축케이블의 손실을 보상하고, 지하 공동구의 일정 거리마다 손가락 크기의 안테나를 설치하여, 지하와 지상의 무전기 교신을 양방향으로 동시에 중계하는 장비이다.

모 신도시의 지하 공동구 건축공사가 진행 중일 때 있었던 일이다. 지하 터널이 완공된 뒤에 중계설비를 설치하는 게 원칙이지만, 지하터널 공사 중에도 방재실과 지하 구간의 무전기 통화가 되면 무척 편리하므로, 시설관리공단에서 중계설비의 설치를 앞당겨 요구했다.

그런데, 설치공사가 끝난 며칠 후 아침 일찍, 공동구 관리사무소로부터 지하 무전이 안된다는 연락이 왔다. 직원 두 명을 급히 파견했는데, 종일 연락이 없어 초조하게 기다렸다. 땅속 공동구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이 되질 않는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선임자로부터 보고 전화가 왔다. “큰 터널 변경 공사가 있어서 누가 우리 케이블을 몇 군데 잘라놨습니다. 다시 연결했는데, 발진이 생기고 통화가 안 됩니다. 어느 구간의 어느 증폭기 문제인지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통화가 며칠이라도 안 되면 난리를 칠 텐데 어떡하지? 스펙트럼 애널라이저 파형을 보고도 판단이 어렵나?”

“예.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보셔야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일 아침에 거기서 만나자.” 이렇게 해서 중계설비를 개발한 엔지니어인 나도 직접 지하 공동구 현장에 나가게 되었다.

명색이 사장이긴 해도 작은 영세업체이고, 중계설비를 설치할 초기에 현장에 나가서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인사도 나눴고 며칠간은 터널 전 구간을 둘러봤던 터라, 거기에 가면 우리 직원 한 명 추가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셋이서 무거운 계측기와 짐 가방을 나눠 들고, 지하수가 흘러내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수 킬로미터 길이의 터널 내부를,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어느 공동구 구간에 문제가 있는지 살폈다. 의심나는 선로증폭기가 있으면, 높은 케이블 트레이(선반) 위에 올라가 동축케이블 커넥터를 끌러 계측기에 물려서 확인시험을 했다.

오전 작업 4시간, 점심에 식사 겸 휴식 한 시간, 다시 오후 작업 4시간. 중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쉬지 않고 계속 강행군이었다. 사흘 만에 겨우 문제를 해결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왔더니, “어머, 당신 배가 쑥 들어갔는데요?” 하며 아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체중도 달아봤더니 무려 3kg이나 빠졌다. 스크린 골프장에라도 가서 불어난 뱃살을 빼볼까 했는데, 그보다는 오히려 공사 일정이 빡빡한 현장에 나가서 직원들의 무거운 짐이라도 들고 따라다니는 편이 훨씬 낫겠다 싶어 피식 웃었다. 지하 공동구에서 일하면 좋은 점도 있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