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44 타율 0.036이지만
공무원의창#44 타율 0.036이지만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2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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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공무원의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세상을 바꾼 사례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911 비상전화 시스템’의 고안이다. 1960년대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의 젊은 신참, 로버트 갤러거는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경찰, 소방 또는 구급차 서비스를 받기 위해 서로 다른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야 했던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다. 1초가 다급한 상황에서 당황한 신고자가 전화를 여러 번 거는 동안 피해가 더 커지고 기관들도 혼란에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는 위치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기억하고 사용할 수 있는 3자리 비상 전화번호를 생각해 냈다. 최초의 911시스템이 탄생한 계기다. 911로 전화를 걸면 ‘비상관제실’은 신고자의 상황을 파악해서 소방차만 보낼지, 경찰과 구급요원도 함께 보낼지, 아니면 경찰특공대를 보낼지를 판단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에서 채택하고 있는 그린벨트 정책은 1935년 도시 계획 공무원인 패트릭 애버크롬비가 고안해 낸 것이다. 발상은 단순했다. 폭발하는 도시의 범람을 억제하고 자연과 주변 경관, 시 외곽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고속도로의 램프 구간 도로의 도색을 달리해서 운전자의 혼란을 줄이는 아이디어 역시 한국도로공사의 윤석덕 차장이 창안했다. 그는 사고다발구간이었던 안산분기점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를 계기로 생각을 거듭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도로 위에 초록색 또는 주황색 도색이 도로교통법 위반이라 전문가들이 모두 반대했다는 것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한국도로공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의 고집으로 ‘시범사업’이란 이름으로 도색이 실행되었고, 해당 구간의 교통사고는 50%나 줄었다.

이렇듯 공공행정과 관련해 공무원이 창의적인 의견이나 정책제안을 하는 것을 ‘공무원 제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중 채택된 것은 ‘창안’으로 분류된다. 창안은 해당 부처 또는 지자체에서 시행되거나 모범으로 전파된다.

공무원 제안을 처음 한 때가 1994년 종로구청 시민봉사실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 구호미 전달 방법 개선’을 시작으로 2022년 퇴임 때까지 165건을 제안하였고, 그중 국민신문고(중앙제안) 18건, 소속기관을 포함한 지방 제안이 147건이다. 채택된 창안은 지방 제안 147건 중 6건이다. 은상 1, 동상 1, 우수상 1, 장려상 1, 노력상 2건이 전부다.

그러니까 타율로 분류하자면 0.0363636인 셈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 타율은 2021년 4월 LG트윈스가 두산베어스와의 3연전에서 매 경기 1점밖에 못 내고 부진했던 타율과 일치하고, 같은 달 미국 메이저리그 피츠버그가 최악의 부진을 겪을 때의 타율과도 일치한다.

이 공무원 제안이 내 본업이었다면, 벤치 신세였거나 빛의 속도로 방출되었을 것이다. 물론 창안으로 채택되기 위해선 오랜 시간 현장 실사를 하고 자료 조사를 병행해 실행부서에서 떠먹기 좋게 다듬어야 한다. 되도록 숙성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제안을 완결적으로 만들기도 쉽지 않지만, 상당수의 제안이 주관부서의 검토 과정에서 제외된다. 너무 박하고 보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통 공무원 제안이 접수되면 그 제안을 실행할 담당 부서의 검토 의견을 받아 1차 예비심사를 거쳐 본 심사에서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데, 많은 부분이 주관부서의 검토 의견 과정에서 제외된다. 물론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얼토당토않은 제안, 아래에서 열거한 제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많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검토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공무원 제안에 대한 대통령령을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공무원제안”이란 국가공무원(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자기 또는 다른 공무원의 업무와 관련하여 소관 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제출하는 창의적인 의견이나 고안으로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가. 다른 사람이 취득한 특허권·실용신안권·디자인권 또는 저작권에 속하는 것 또는 「국가공무원 등 직무발명의 처분·관리 및 보상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보상이 확정된 것

나. 접수하려는 기관이 이미 채택했던 제안과 내용이 동일한 것

다. 접수하려는 기관이 이미 시행 중인 사항이거나 기본 구상이 이와 유사한 것

라. 일반 통념상 적용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것

마. 단순한 주의환기・진정(陳情)ㆍ비판 또는 건의이거나 불만의 표시에 불과한 것

바. 특정 개인・단체・기업 등의 수익사업과 그 홍보에 관한 것

사. 국가 사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것,

그리고 「공무원 제안 규정」 제13조에는 채택되지 아니한 공무원제안에 대한 재심사의 규정을 두고 있다. ‘국민 제안 규정’이나 지자체의 ‘제안 조례’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도 내가 제일 아깝게 생각하는 제안은, 2001년 4월에 당시 건설교통부에 제안한 ‘도로 표지판 설치 및 게시 방법 개선’이다. 당시엔 채택되지 않았는데,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제안이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었다. 제안의 핵심은 현재의 편지식 도로표지판을 현수식으로 바꾸어 구조물의 무게를 감량해 비용 절감과 안전을 도모하고 표지판의 뒷면에 현 지점을 나타낼 수 있는 문구를 넣어 도로표지판 본래의 기능인 도로이용자의 편익 증진 등을 기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을 만들기 위해 기계직에게 자문까지 받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시설비용 절감을 위해 지주・받침대 등의 경량화(개당 949㎏ → 개당 691㎏) 방안을 모색했고, 표지판의 공기저항 최소화 등을 통해 구조물의 안전사고 예방과 내구성 등의 산출을 위해 자문까지 받았다.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내 제안은 표준이 되었다.

〘당시 제안 내용〙

현황(現況) 및 문제점

〇 도로표지판: 도로표지판은 원활한 도로교통과 도로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 할 목적으로 방향표지, 노선표지, 이정표지, 버스전용차로 등의 내용을 표식·설치하는 데 날로 복잡해져 가는 교통 여건, 특히 변화가 심한 서울시내의 교통체계는 운전자뿐 아니라 보행자에게도 행선지(현지점)를 찾고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많고 또 표지판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기둥 3개) 풍수해 등으로 인한 사고 개연성이 높음.

개선방안(改善方案)

〇 현행 편지식 도로표지판 뒷면은 지주 3개(세로1, 가로2), 보강재(판넬 8, 세로받침대 4, 연결밴드 8개 등 다수) 등의 어지러운 형상을 흉하게 드러낸 채 방치돼 있는데 표지판 뒷면은 반대 차선 방향이래서 방향, 노선 등의 표기는 사고 우려 등으로 사실상 어렵고(사거리 등 교차로에는 일부 설치돼 있음) 교차로 이외 지역은 현수식을 채택, 표지판 뒷면에 현 위치 표시를 하여 보행자나 운전자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함은 물론 도시 미관 증진과 시설비용 절감, 지주·받침대 등의 경량화, 표지판의 공기저항 최소화 등을 통해 구조물의 안전사고 예방과 내구성을 기대할 수 있음.

〇 설치 및 비용 등 분석: 첨부

〇 시행 시기: 예산 등을 고려 신규 설치 및 정비 시부터 적용

- 전국적 공통사항이니 우선 서울시에서 실시 후 효과가 있을 시, 전국 확대

〇 도로표지판 설치비용 및 하중분석 등 비교(2001.1.1.기준)

- 비용 절감액: 서울시 기준 19억 58,630,560원(6,224개×314,690원)

- 시설 무게 감소: 개당 258㎏

그런데 나보다 적은 제안으로도 청와대에까지 다녀오고 ‘행정의 달인’이라 평가받는 분이 바로 내 팀원이었다. 그분의 대표적인 창안이 ‘고궁에 유모차 비치’, ‘장애인주차구획선에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장애인 표식 도안’이다. 실행기관에서 안을 받는 데 거부감이 없고 실행에 어렵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분께 박수를 보낸다. 결국 양보다는 질이다. 다작이 능사는 아니다.

나 역시 그분처럼 자랑할 수 있는 제안이 있다. 2011년 4월 11일 서울시 ‘천만상상 오아시스’에 제안한 ‘왼손잡이를 위한 배려’가 그것이다.

하루는 서초동 소재 서울특별시 전산교육장(현 데이터센터)에서 전산교육을 받으면서 보니, PC가 모두 오른손잡이들을 위해 장치되어 있었다. 난 오른손잡이다. 내가 그저 오른손잡이의 삶을 살았다면 별문제 인식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을 오른쪽으로 살았으니, 그 짐을 왼쪽에도 나눠 지자’는 의미에서 한 5년간 최소한 마우스만은 왼손으로 사용한 지 5년 정도 될 때였다. 그날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제안했다. ‘전산교육장에 적어도 몇 대는 왼손잡이를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마우스를 인위적으로 왼쪽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옮길 수 없는 구조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곧바로 채택, 문화상품권 10만 원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