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45 나를 담금질한 독재자들
공무원의창#45 나를 담금질한 독재자들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2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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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난 청양고추 같은 사람이 좋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홍야홍야’는 기질상 함께 일하기 어려웠다. 36간의 공직 생활 중 딱 3명을 만났다. 매사 딱 부러지고 뜨겁던 분들이다.

1990년 종로구청 하수과장이셨던 권○○. 대충 일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도로 개설 및 관리의 책임자인 토목직 과장이었기에 내 파트인 하수과징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결재를 들어가면 문제점을 귀신같이 집어냈다. 그땐 기안지를 육필로 작성해서 대면 결재하는 방식이었다.

한번은 지하 심정 모터펌프와 연결된 창신동 빌딩의 지하수 미터기에 달린 봉인이 끊어져 내 딴에는 얼렁뚱땅 다른 쪽으로 관심을 유도하며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대번에 지적했다.

“이거 기계적인 문제인지, 아님 사용자의 고의인지 밝혀내서 조치하세요!”

미터기는 요금과 직결되기에 봉인해 놓은 것이고, 기계적인 부분보다는 사용자의 귀책이 큰 사안이다. 사실 미터기 봉인 등 기계적인 결함에 대해서는 옆 팀 기전팀에 의뢰해서 처리해야 하는데, 당시 전기 담당은 우리 팀에서 협조를 요청할 때마다 어찌나 투덜거리는지. 아랫사람들 간의 불화를 언급하는 것이 마치 상급자에게 고자질하는 것 같아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던 나는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다음은 1997년 도봉구청 기획실장 이**. 과장 시절 그는 실무형 인간이라기보다 조직의 기풍을 잡아 직원들의 업무를 끌어올리는 카리스마형 리더였다. 뭐 딱히 가르쳐 준 것 하나 없어도 빈틈없는 분위기였기에, 난 스스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묻고 공부하며 내공을 차곡차곡 쌓았다.

과장님이 만든 감옥 같은 분위기에 들어가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사무실 공기는 차가웠다. 공포 분위기라서 숨이 막힌다는 이도 있었고, 실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건물 옥상에서 긴 한숨을 토하는 직원도 있었다. 몇 달 견디다 못 버틸 것 같으면 타 부서로 도망가는 직원들이 많았었으니까.

명문 K대를 나온 7급 공채 출신의 맞은편 차석 주임이 결재를 하는데 호통 소리가 들린다. 과장님이 골을 내면서 쫙쫙 그어 버린다. 가뜩이나 소심한 그가 받았을 빨간 줄은 물론이고, 급 시베리아가 된 사무실의 분위기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장기 근무로 인해 때가 되어 다른 곳으로 떠났고, 몇 년 후 그 친구, 그만뒀다는 소문이 들린다.

어느 토요일, 기획계 주임이었던 나는 계장님과 사무실에 나와서 다음 연도 주요업무계획을 짜고 있었다. 익숙한 등산복 차림으로 그가 불쑥 들어왔다. 그러더니 일필휘지로 풍수해 대책을 첨삭해 주는 게 아닌가! 과장 때와는 달리 국장님이 되시더니 예의 굳은 표정은 사라지고 서산 마애불 같은 미소까지 은은히 비치며.

다른 한 분은 서울시청 경쟁력강화본부의 도시경쟁력 총괄 담당관 및 관광마케팅 담당관 겸직 이**. 계획서를 올리면 서울시 기획조정실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분답게 시장님의 시정 철학과 한발 앞선 예지력으로 하나하나 체크해 가면서 방향을 잡아 주었다.

‘서울시 독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시도 때도 없이 호통 치는 게 흠이라면 흠. 여북하면 어떤 여직원은 하혈을 했다는 풍문이 남았다. 그러나 나는 딱 한 번, 그것도 앞 주임의 떠넘기는 일을 처리하다가 그만 혼구녕이 난 적이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분들의 고향과 나이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아마도 난 그분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닮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의 공통점은 일을 열심히, 제대로 하는 직원에게는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세 분 모두 나를 지칭해 “양주임은 됐다는 것”이다. 세 분 중 두 분은 서기관으로, 한 분은 부이사관으로 정년퇴직하셨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바로 그런 마음을 품게 하는 분들이셨다.

다만 그분들 모두 자상한 가르침과 배려심은 부족했다. 그것까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롤 모델로서는 닮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그분들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고마워요, 국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