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창#46 때론 잡스(Jobs)처럼
공무원의창#46 때론 잡스(Jobs)처럼
  • 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 승인 2023.08.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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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열 전 서울 마포구 국장
양승열
양승열

[시정일보] 30억 규모의 서울시 공모사업이었다. 2022년 구청의 지역경제과는 서울시청에서 진행할 ‘골목상권 로컬브랜드 육성사업 공모전’ 프레젠테이션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사업을 준비하던 L팀장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국장님, 도와줘요!” 하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오전에 서울시 담당부서에서 현장 실사를 나왔는데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의 대상 지역은 아직 지역상인회가 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을 현장의 요구로 채워 줄 인터뷰이(상인)을 찾고 있었고 내게 발표 대본을 좀 봐 달라고 요청했다. 이름표는 합정과 몽마르뜨(순교자의 언덕)의 ‘합마르뜨’.

먼저 상인회를 대표할 사람을 지명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마침 최근에 취임한 문화원장님이 생각났다. 그는 해당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바로 연락하고 만나 승낙을 받았다. 조각거리를 중심으로 6개월 정도 무료로 작품을 전시하되 구에선 운반비만 부담하는 안까지 논의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공모전 심사위원들을 설득하는 문제였다.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공모전은 상대평가로, 경쟁식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조언했다.

“결론은 상인들이 원하고 시민들이 원하는 수요공급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녀(L팀장)는 심사위원들이 좋아할 요리를 하고 싶어 했으나 그들의 입맛을 모르니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온다며, 자칫 이도 저도 아닌 요리가 될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물론 경쟁자들도 그럴 테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게임인가?

나는 경험칙이라는 양념을 꺼내 버무려 보기로 하였다. 고루 스며드는 것 못지않게 딱, 이거다 할 그 무엇이 있는가? 이른바 시그니처! 일회성이니 은은한 맛보다는 입만을 확 사로잡는 자극이 필요했다.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이때사 말고 온갖 잡다한 일들이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나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그리 머리빡 터질 일은 아니다. 늘 생각했던 대로 메모를 하고 새새틈틈 양념을 전달했다.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였으므로 내가 말하고 그녀가 받아 적는 식이 아무래도 효과적이었다. 두 번 합을 맞췄는데도 그녀는 두통이 사라진다며 다시 의욕이 넘치는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강은 이랬다.

“구교와 신교의 만남, 동양과 서양의 만남, 전통과 현대의 만남, 가톨릭의 성지, 셔우드 홀 일가, 언더우드 일가, 베델, 아펜젤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고 했던 호머 B. 헐버트, 이거 하나만으로도 이곳을 찾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하루 짬을 내서 꼭 한번 오십시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을 설레게 했던 강변낙조, 고즈넉한 여백의 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건 ‘합마르뜨’ 지역은 한강 양화진 변에 위치한 절두산순교성지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품은 합정동이다. 동네 이름도 조개우물. 장소의 역사성을 살린 버전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은 콘텐츠만 중요한 건 아니다. 심사위원들을 매혹할 수 있는 구성과 발표자의 태도도 중요했다. 나는 그녀를 스티브 잡스로 만들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1차 현장 평가에 이어 최종 평가 항목은 사업 타당성, 사업추진 역량, 사업 실행력, 사업 확장성이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당일, 나는 장기재직휴가를 하루 미루고 시청으로 향했다.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기 직전 문화원장님과 넷이서 시청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며 마지막 결의를 다졌다. 팀장이 발표하고 답변은 팀장과 문화원장이 했다. 그리고 이틀 후 구에선 소식 하나를 공지했다.

“우리 구가 서울시에서 공모한 특색 있는 〈골목상권 로컬브랜드 육성사업〉에 선정되어 서울시로부터 3년간 최대 30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오픈 멘트는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인용하게 했다.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에게 당신은 스케치도 없이 어떻게 조각을 그렇게 잘하냐고 물었다. 미켈란젤로가 답했다.

“나는 대리석 속에서 형상들이 꺼내 달라고 하는 외침을 듣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