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7]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7]
  • 시정일보
  • 승인 2023.09.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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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임동식

[시정일보] 1945년 2월, 갯일 중 신동댁이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있었지만 그래도 동네 아낙네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본업인 농사일을 제쳐 두고는 갯일이었다.

없는 살림에 그나마 갯바닥으로 나가 맛조개나 게를 잡아서 팔아야 양식이라도 마련할 수 있으니 영화농장 아낙네들에게 있어서의 갯일은 소중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순녀는 달랐다. 신동댁의 익사 사고가 있던 날 그녀의 아버지인 인길양반으로부터 강력한 훈시 때문에 순녀는 갯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즈음은 순녀도 길쌈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 인길댁을 거들고 있는 중이었다. 2월 열 사흩 날 해거름, 이날도 순녀와 경주댁 그리고 말례는 곡광에서 길쌈 일을 하고 인길양반은 큰방에서 임자도에서 찾아온 환자와 이야기 중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없이 마당에서 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 있던 인길댁이

"순녀야! 누가 오셨는갑다. 나가 봐라!"

하고 곡광 쪽 순녀에게 말하자 순녀가 들고 있던 솜뭉치를 망태에 던져 놓고 일어서는데 밖에서 구두 소리와 함께

​"어무니! 어무이! 저 왔어라우."

하고 인길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녀가 문을 열고 보니 토방에 우뚝 서 있는 사나이, 그동안 온 식구들이 학수고대하여 기다리던 대전이 돌아온 것이었다.

대전의 뒤로는 동구에서 만났던 듯, 길수와 맹술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이웃 사람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오빠! 아이고 우리 오빠 오셨네. 아부지! 오빠가 돌아왔어라우."

너무나 기쁜 나머지 순녀는 처녀로서의 부끄러움도 잊은 채 목소리가 담을 넘을 만치 큰소리로 외쳐대자 온 식구가 다 마루로 나왔다. 대전이 인길댁 내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아부지! 어무니! 저 없는 동안 얼마나 고생 많아겠오?"

"오냐! 내 아들 기별도 없이 이러코 왔구나!"

인길댁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전을 얼싸안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정리를 어찌 눈물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만은 인길댁이 흘리는 눈물에는 그동안의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하는 마음이 피보다도 진하게 농축된 희열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길 양반도 반가운 마음은 한가지다.

"그래. 그동안 타국생활로 고생이 많았던갑다. 몸이 많이 수척해 졌구나! 점돌아! 느그 아부지다."

인길 양반이 경주댁의 치맛자락을 틀어잡고 서 있는 점돌을 보고 말하자 점돌은 낯선 이방인이 무서운 것일까 경계의 눈빛으로 대전을 바라본다.

대전은 그런 아들을 끌어안으며 코 묻은 볼에 입을 맞춰 준 후 경주댁을 향해 말했다.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오!"

경주댁은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순녀네 식구들을 비롯하여 순녀의 작은댁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앉으니 방안은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며 대전이 돌아왔다는 소문에 열 일을 제쳐 두고 앞을 다퉈 찾아온 사람들은 광암댁을 비롯하여 만주로 간 자식이나 남편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남편이나 자식이 몸은 성한지 돈벌이는 잘 되는지 신상에 관한 실오라기 같은 사연이라도 듣고 싶은 것이 당연지사요 인지상정이라 해야겠다.

"아제! 종필 아부지는 뭣을 허고 있습디여?"

금동굴댁의 물음에 대전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소하고도 세심하게 대답해 준다.

"금동굴 성님은 광암 종남이 성님이랑 봉천에서 진흙으로 쥐구녘 막는 일을 헙디다."

하고 대답한다. 이러한 소식을 바람인들 전할 수 있을까 구름인들 전할 수 있겠는가. 대전은 그들이 살고 있는 모습들을 봤던 대로 느낀 대로 소상히 일러 주고 있었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기가 한참 이어지던 중 인길양반이 경주댁에게 말한다.

"점돌 에미야! 이 아그가 반 십 년의 세월을 타국에서 보내고 돌아 왔는디 있는 음식 다 내오고 닭도 잡고 술도 좀 사 와서 여기 있는 사람들 함꾼에 들도록 허자!"

이에 경주댁은 때아닌 음식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씨암탉을 잡고 영산강 맛조개탕에 이날 임자도 손님이 가져온 죽상어찜까지 진수성찬의 상이 차려졌다. 부엌에서 조리를 돕던 순녀가 방문을 열고 묻는다.

"아부지! 상을 다 봤는디 방이 좁은께 물레(마루)로 가져갈라우."

"그러자! 물레로 가는 것이 좋겄다."

이렇게 하여 마루에 큰상이 차려지고 대전이 막걸리를 좌중을 빙 둘러 가며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야말로 때아닌 잔칫집이 되었다. 재회의 기쁨이란 이런 것일까. 술을 한 잔 받아마신 길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한다.

"대전 성님! 성님이 돌아오신께 이렇코 좋으께라우? 그전에 복룡촌 살 적에도 성님이 일본 가부신께 동네가 빈 것 같디만은 성님 안 계신 도동지도 그랬어라우. 인자 성님이 돌아오셨응께 동네가 사람 사는 것 같을 것이오. 지거멉 씨벌꺼 하도 좋은께 내가 가서 꽹메기를 가져와서 한바탕 놀아불라우."

넘쳐나는 기쁨이 컸던 까닭에 길수는 이렇게 극단의 표현밖에는 달리 더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대전은 대답했다.

"그래! 고맙네. 내가 돌아왔닥 해서 동네가 어찌게 많이 달라지기사 허겠는가만 열심히 잘해보세!"

이윽고 길수가 꽹과리를 가져오고 마당에서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지자 이집 저집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당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길수는 꽹과리의 고수였다.

'꾀굉꽹꽹 꾄 꽤 꽹' 사람들은 꽹과리 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먹거리고 마당을 돌며 춤을 추고 박수를 쳤다. 도덕지에서 창가의 명수는 단연코 오쌍본이었다. 쌍본이 미끄러지듯 매끈한 목소리로 창가를 부르고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세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느윽고~오. 부~우평 같은 내 신세~에가…."

한바탕 놀이마당은 어둠이 깔리며 막을 내리고 사람들은 다 돌아갔다. 이제 순녀네 방에는 순녀네 식구들과 순녀의 작은아버지인 신촌 양반과 그의 외아들인 동본이 남았다.

혈육의 정은 물보다 진하고 뜨겁다. 아까 대전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점돌은 그새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된 것인지 찰거머리처럼 대전에게 달라붙어 대전의 무릎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대전이 점돌을 무릎에 앉은 채 아랫목에 앉은 인길 양반을 위시해 식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리고 작은아버님! 인자 우리 조선팔도에도 신 세상이 옵니다."

대전의 이 한 마디에 방안이 조용해졌고 대전은 말을 이어간다.

"시방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국하고 전쟁을 몇 년째 계속허고 있는디 미국은 중국보다 더 큰 대국인디다 구라파 쪽에서 몇몇 나라들이 지원을 해 준께 곧 일본은 망헐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인들은 조선반도에서도 물러갈 것인디 더 중요헌 것이 있어라우."

대전이 잠시 말을 쉬는 사이 인길 양반이 묻는다.

"가만…, 그러이면 농장에 소나다상이나 히도미상 그러고 시름묵의 구찌상도 일본으로 간데야?"

"아부지! 전쟁에서 일본이 진닥 해도 그 일본사람들이 가든가 말든가는 즈그들이 알아서 헐 테제라우."

​"일본 사람들이사 그러기도 허것제만 시름묵 나상은 일본에 징용으로 갔다가 다리를 잃고 얼마 전에 돌아왔고 지난 시안(겨울)에는 또 시름묵 후근이로 해서 월국 요 근타리(근처 복룡촌, 용호동, 회산, 월곡, 신원목, 도덕지를 지칭), 그러고 여러 청년들을 데려다 방죽에서 연성 훈련을 시켰는디 일본 징병으로 데려갈 모양이더라. 나사 동네 구장인께 면에서 시키는 대로 허고 있기는 허다만."

"연성 훈련을 허고 그렇게 해서 징집을 당허면 져가는 전쟁에 총알 밥이 되기 쉬울 텐디…. 근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앞으로 또 생긴당께요. 그것이 뭣이냑 허면 앞으로는 부자나 가난뱅이가 따로 없이 다 같이 잘사는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것이여라우. 시방은 어떤 사람은 토지를 많이 보유해서 턱없이 잘살고 어떤 사람은 궁파지(엉덩이) 붙일 밭뙈기 하나 없어 쪼드라지게 못사는디 이 가난한 사람들은 부잣집에 일 다니며 정상에 못 미치는 쬐깐(조금)의 대가를 받기 땜세(때문에) 마냥 가난을 면털(면하지를) 못 하는디 그 반면에 부자는 가난헌 자들의 노동의 대가를 정상에 못 미치게 지불하므로 더욱이 가진 자에게 부가 쏠리게 된다는 말이여라우. 그렁께 앞으로는 그러한 폐단이 없는 공평한 세상이 온다는 말이제라우."

대전은 대륙의 땅, 만주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공산주의를 알게 되었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그는 유토피아와 같은 그러한 세상을 영화농장에 펼쳐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공산주의, 약 1세기 전 독일의 철학자인 카를 마르크스가 생산분배의 불공평함을 지탄, 타파하기 위해 주창한 이 사상이 공산주의 사상이다. 근대산업이 한창 발전하던 그 시기에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피나는 노동의 대가는 부당한 것이었다.​

부당한 노동의 대가란 것은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을 하여도 겨우 먹고살기에 급급한 대가가 부당한 것이며, 노동의 대가에 못 미치는 공평하지 못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부당한 그 대가의 나머지가 자본가에게 쏠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 주창한 것이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이며 단적인 표현으로 '합동으로 생산하여 공동 분배를 하자.'라는 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처럼 아름다운 이상은 인간이 가진 나태 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심리를 간과한 것으로써 '나 아니어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생산에 가담할 것'이라는 공산주의의 폐단의 원인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만인의 평등과 행복할 권리, 특히나 소외된 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 그는 희대의 대인이요, 사회철학자로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은 1세기 전 유럽에서 출발하여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서 충실히 이행되었고 파란의 격변기를 겪고 있던 동남아의 끄트머리, 한반도의 최남단 영화농장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