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8]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8]
  • 임동식
  • 승인 2023.09.0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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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임동식

[시정일보] 1945년 3월 동네의 구장인 인길양반은 정신대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자 동네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하여 순녀네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이즈음의 마을 단위 행정편제는 리를 분할 행정구역의 최소 단위인 구로 분할되었던 것이며 산정리는 3개 구로 분할, 도덕지와 신원목, 월곡은 산정리 3구로 개편되었었다.

따라서 순녀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도덕지와 신원목, 월곡 사람들이다. 인길양반이 마당에 모인 동네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여러분! 모다(모두)들 어려우실 텐디 이렇코들 와줘서 고맙소. 오늘 여러분을 모테시락(모이라고) 헌 것은 딴 것이 아니고 정신대에 관한 얘기를 헐라고 그런디요, 이참에 우리 아들 대전이가 만주에서 돌아왔는디 말을 들어본께 일본이 미국허고 몇 해 째 전쟁을 허고 있는디 일본은 대체 미국을 이길 수 없고 질 것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냐면 미국은 중국보다도 큰 대국인디다 설상가상으로 구라파의 몇몇 나라들이 미국을 돕는다는 것이여요. 그렁께 일본은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허니 이미 징집통지서를 받은 청년들은 순사들한테 안 잡히게 도망을 쳐 불든가 꿈어 불든가(숨어 버리든가) 요령껏 허시고 시집을 안 간 처녀들이 있는 집에서는 서둘러서 딸들을 여워(출가) 버리쑈! 시집을 간 기혼녀들한테까지 정신대 나오란 말은 안 헌께 말이요."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여러 소견들을 말하며 웅성거린다.

"우리 순자는 나이가 올해 열 다섯인디 어쩌께라우? 여워불자니 나이도 아직은 어린디다 가진 것이 없기도 허고 꺽정이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다.

"해마다 숭년인디(흉년인데) 역서(여기서) 굶어 디지나 군대 가 총 맞어 디지나(뒈지나) 똑같은디 원 없이 군대서 밥이나 실컷 묵고 죽는 것이 났제."

이렇게 말을 하는 이도 있고 특히 신원목 후근이는

"그래도 전장이 끝나봐야 어디가 이길지 질지 알제 시방 그것을 어찌게 알것소! 그라고 일본이 이기면 돈도 벌 수 있지 않을께라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에 인길양반은 약간 언성을 높여 반박의 말을 했다.

"그럴 리 없네. 신원목 나종식이는 징용으로 갔다가 한쪽 다리만 잃어 상한 몸만 가지고 겨우 돌아오지 않았든가 말이세. 하이간에(하여간에) 요새 시국을 빌어서 나는 여러분에게 구장으로서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코 당부를 했응께 낭거지(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알어서들 잘 허시요!"

인길양반의 이 말을 끝으로 동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그리하여 대체로 동네 사람들은 인길양반의 말대로 징집영장을 받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버리고 미혼인 처녀들은 서둘러 시집을 보내버렸다.

이즈음의 시류가 이러한 까닭에 동네의 총각들은 별 밑천이 없어도 장가를 드는 데 애쓸 필요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화란(不謁) 두 쪽만 가진 놈이 장가는 뭔 놈의 장가냐고 했던 고민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도덕지의 만복이를 비롯한 몇몇 총각들은 이러한 시류에 편류하여 손쉽게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 무현이는 가장 어린 나이, 열다섯 살의 소녀를 새 각시로 맞아들여 총각 딱지를 뗀 사람이다.

이 소녀는 목포에서 시집을 온 여자였기에 목포댁이라 불렸고 너무 어렸던 까닭에 살림이 서툰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궁이에 밥 짓는 불도 제대로 못 피웠으므로 그럴 때면 새신랑인 무현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신원목의 후근이와 봉수, 도덕지의 성숙이는 고집스럽게 징병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며 이는 궁핍한 살림살이가 이유였을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편, 이즈음 만주에서 돌아온 대전은 절친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공산주의 이론에 대하여 논의를 하기도 하고 지인들을 규합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계몽 활동을 하기에 여념 없이 세월을 보내는 중이었다.

보리 이삭이 한창 피어나는 4월의 어느 봄날 초저녁, 어둠과 함께 누군가 순녀네 집을 찾아왔다.

"대전이! 대전이 집에 계신가?“

대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대전의 친구인 광암리 사는 임종기였다. 종기는 대전과 어릴 적부터 동문수학하며 우정을 쌓아온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늘 서로의 집에 번갈아 가든가 아니면 제3의 장소에서 만나 공산주의를 토로하고 조직을 규합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날 밤은 평정마을에서 회합을 갖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어서 광암리의 종기가 대전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대전이 마루를 내려서며 반가이 종기의 손을 잡는다.

"오셨는가? 그러면 바로 가도록 허세! 옆집 쌍본이는 부르면 바로 나올 것이네."

"그러세! 지금 가도 늦은께 서둘러서 가세!"

이때 밖의 인기척에 인길양반이 문을 열고 나왔다.

분위기를 짐작한 인길양반이

"느그(너희)들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잘 살 수 있게 해보겠다는 패기에 찬 열정은 과연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다 내 뜻하는 대로 될 수는 없으며 특히나 느그들 나이 인자 약관(弱冠)을 넘어 이립(而立)을 눈앞에 둔 나이인디 열혈의 젊은 패기만 믿고 처신했다가는 자칫 인생의 큰 오류를 범 헐 수 있응께 조심조심 처신 하그라! 무릇 사람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세 번의 생각 끝에 행동해야 쓰고 근면하기 위해서는 당장 실천에 옮기는 습관을 지녀야 쓴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관계는 모순된 관계이지만 두 관계 사이를 잘 조절하여 실천허는 것이 슬기인께 오늘 내 말을 명심해서 앞으로 처신을 잘허기 바란다!“

하고 말했다.

"야~, 아부지! 잘 알겄습니다. 너머 걱정 마이쑈!"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며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대전과 종기에 합세하여 쌍본이 동행하므로 세 사람은 평정으로 향한다. 신작로 양쪽으로 펼쳐진 보리논에 달빛이 내리고 가끔 불어오는 밤바람에 보리밭의 풋내가 콧전을 스친다

세 사람은 바쁜 걸음으로 평정마을 오근식의 집에 도착했다. 대전의 앞장을 서서 대문을 들어선 쌍본이 아래채 사랑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방안에는 오근식을 비롯한 예닐곱 명의 젊은 청년들이 앉아있었다. 오근식은 평정마을 부잣집 외동아들로 큰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귀티가 흘렀으며 쌍본과는 동년배기 일가였다.

쌍본이 대전과 종기를 소개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나눈 후 방 가운데 놓인 호롱불을 중심으로 하여 빙 둘러앉았다. 청년들의 선량한 눈빛은 초롱불에 비쳐 반짝거린다. 대전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렇게 만나서 참 반갑습니다. 아까 인사를 해서 알다시피 나는 도동지 사는 박대전입니다. 인자 우리는 새 시대, 새 세상을 맞게 될 것이며 우리 젊은 청년들은 이 지역을 대표하여 이 시대에 부응하고 앞장을 서야 비로소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인자 머지않은 날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패망 헐 것이고 우리는 그때 우리의 세상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가 따로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 바로 공산주의 세상이 그런 세상이며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대전은 열변을 토로하고 있었으며 대전의 열변이 끝나자 방안은 환호와 박수 소리로 가득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대전의 논단이 끝나고 광암리 임종기는 미리 준비된 노트에 모인 사람들의 신상명세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공산당 입당자들의 명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대전을 비롯하여 임종기, 오근식은 일로면 일대를 무대로 지하 공산당원을 조직하고 그 수뇌부로서 맹활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대한 독립 만세!"

이날 정오를 기하여 용암처럼 솟구치는 외침 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었으니 이는 동양의 평화를 위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되던 날로부터 36년의 긴 세월이 지난 날이며 일제강점기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육성이 라디오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동아전쟁 종결 조서.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중략) 굳건히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짐의 이러한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이 내용이 일본 천황이 발표한 대동아전쟁 종결 조서로서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기하여 이 방송이 흘러나오자 대한민국은 열광하는 환희 속에서 그동안 치욕과 울분의 역사에서 해방이 되어 광복을 맞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 동네를 통틀어 라디오 한 대 없던 도덕지는 해방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해방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