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36 전면 주차
시정 인문학광장#36 전면 주차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9.0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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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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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내가 30대 중반일 때니까 한 33년쯤 전의 일이다. 수원 시내에 있는 한 신축 아파트에 살았는데, 10층 이상인 고층 아파트가 십여 채 되는, 당시로는 꽤 큰 아파트단지에 속했다. 차량으로 한 시간 거리인 안양까지 회사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다가, 직책이 부장으로 승진되면서 내 생애 최초의 자가용 차를 사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에 승용차가 드물어서, 주차장이 지상에만 있어도 항상 널찍하고 여유로웠다. 나는 퇴근길 주차 때는 약간 힘들어도 차를 화단 쪽으로 후진시켜 주차했다. 다음날 출근 때 곧장 앞으로 쉽게 나가기 위해서였다.

애지중지하는 보물 1호다 보니, 5층 내 집에 올라가서도 복도 난간 너머로 한번 내려다보고서야 마음 편히 집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차된 자동차들의 방향을 무심히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4평형인데, 다른 차들이 모두 내 차와는 반대로, 운전석이 화단을 향해 주차되어 있었다.

그냥 머리부터 곧장 들어가서 쉽게 주차한 것이다. 그런데 건너편 32평형 아파트의 차량은, 차도 크고 고급형이면서, 거의 다 나처럼 꽁무니를 화단 쪽으로 주차해 둔 것이 아닌가? 그걸 본 나는, ‘역시 난 남들과는 뭔가 다르단 말이야! 주차부터 벌써 차이가 나잖아?’ 하며 만족감에 미소까지 지었다.

평수가 큰 아파트에는 아무래도 지체가 높은 분들이 살고 있을 텐데, 나처럼 저렇게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한 준비성을 갖춘 자세가 주차에까지 습관화되어 있으니, 나도 곧 그들과 동격의 수준에 오를 거라는 야심에 찬 포부가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유수와 같은 세월이 금세 흘러 33년이 지난 지금, 아파트마다 주차장에 ‘전면 주차’라는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 뜻은 나처럼 꽁무니를 화단 쪽으로 두는 ‘후면 주차’를 하지 말고, 차량의 머리가 화단으로 향하게 주차하라는 말이다.

얼핏 화단의 화초나 보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스 배출의 위험이 있어 그러는 거라고 느끼기 쉬운데,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후면 주차할 경우, 본인은 나중에 나가기가 편할지 몰라도, 저층에 거주하는 분들이 매연으로 인해 심한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 속에 두통의 원인이 되는 일산화탄소, 발암물질인 벤젠과 폼알데하이드 등 유해 물질이 30여 종이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한 아파트에서 차량의 배기구를 아파트 쪽으로 향하게 후면 주차한 상태에서 시험한 결과, 시동을 걸자마자 차에서 5m 떨어진 아파트 출입구 주변의 일산화탄소 농도가 200ppm을 넘었다고 한다.

이는 실내 기준치의 20배를 웃도는 수치다. 만성 폐 질환이나 천식, 심혈관 질환자들이 장기적으로 노출되면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고, 흡연하지 않아도 폐암 등을 유발할 수 있어 간접흡연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러니 나갈 때 뒤를 살펴야 해서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이웃인 저층 거주자가 입을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전면 주차’가 당연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운전하는 분은 다 공감하겠지만, 좌우 다른 차량 사이에 끼어 주차된 상태에서 후진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바쁜 출근 시간에 좁은 공간에서 앞뒤로 오가며 끙끙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옆 차량의 운전석 전화번호를 찾아 누르며, 상쾌하게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할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 경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자칫 후방 주시에 소홀했다가는 좌우 차량은 물론이고, 한순간에 지나가는 차량과 쿵, 하는 접촉 사고를 내기 십상이다. 이런 경우 차에서 내린 두 운전자가 양보 없이 상대방의 잘못만 지적하다 보면, 삿대질을 넘어선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보도나 집계는 안 되지만 전국에서 매일같이 수도 없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아파트마다 ‘전면 주차’ 팻말만 세워두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시원한 조처나 가시적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우리나라 공동주택단지 법정 주차 넓이의 최소면적은 길이 5m, 너비 2.3m인데, 이것은 중형차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따라서 요즘 나오는 대형차나 에스유브이(SUV) 차량에는 비좁을 수밖에 없다.

처음 아파트를 시공할 때 세대수에 맞춰 최소의 면적만 할당하느라, 주차 공간이 모두 차량의 진행 방향과 직각을 이루며 주차하도록 구획되어 있다. 그래서 수평으로 들어오다가 직각으로 꺾어 주차하거나, 반대로 뒤로 나가다가 좌, 우로 직각 방향으로 꺾어 수평으로 진행하게 되어 매우 힘이 든다.

미국이나 선진국의 경우도 당연히 전면 주차를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주차를 대각선으로 할 수 있게 사선으로 주차선을 긋고, 사선이 그어진 방향으로 일방통행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량 진행과 역방향이 되는 후면 주차는 아예 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는 주차장을 사선 구조로 만들거나, 주차 폭을 넓힌 확장형 주차 공간을 도입하는 추세다. 그런데, 늘 위험을 안고 사는 기존의 직각형 주차 공간 문제에 대한 뾰족한 대책은 과연 없는 것인가?

인터넷에서 ‘전면 주차’에 대해 좀 살펴봤지만, 전면 주차하는 요령에 대한 설명은 많아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묘안은 보이지 않았다. 층간소음이나 흡연 문제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같은 아파트의 거주민으로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땀띠 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사선으로 주차된 차량 모습을 찍어 올린 사진들을 살피다 보니, 반짝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현재의 직각 방향 주차 공간을 45도 각도로 사선으로 바꿀 경우, 한쪽 끝에 있는 2개의 주차 공간만 사라지면 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 10개의 주차 공간이면 8개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 대신에 길이 5m, 너비 2.3m를 고려하면, 차량 뒤쪽 진행 통로는 1.2m가량 넓어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최대 20%의 주차 공간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당장 페인트칠 수정만으로 ‘전면 주차’ 문제는 완전히 사라질 수 있으니, 아파트 운영위원회와 관리사무소는 이런 방법의 적용을 한번 검토해보면 어떨까 싶다.

누군가 ‘전면 주차’ 문제에 관계되는 분이 이 글을 읽어보고 현실적으로 적용해서 개선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하면서, 젊은 시절에 ‘후면 주차’하며 나밖에 몰랐던 어리석은 사람의 실수를 상쇄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