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 인문학광장#38 지공파(地空派)
시정 인문학광장#38 지공파(地空派)
  • 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 승인 2023.09.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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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 ㈜뉴런 대표이사, 수필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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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당신도 이제 지공파에 가입해요!”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내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지공파? 그게 뭐야? 무슨 조직 모임이야?” 나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아내가 농담하는 줄 알고 따라 웃으며 물었다. “지하철 공짜로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지공파라고 한대요. 준선 씨는 재작년부터 노인 카드 나와서 삑삑 소리 내고 그냥 통과해요. 호호.”

“아, 그래? 전철은 무조건 다 공짜로 탈 수 있단 말이지?” 전철에 무임승차할 수 있는 노인 우대 카드를 발급받을 나이가 되었다는 말에 무척 반가웠다. 어쩌다 볼일이 있어 서울 나들이라도 하게 되면 왕복 전철 비용이 담배 한 갑 값을 훌쩍 넘기기 때문이다.

주민센터에 발급 신청을 하고 나서 내 생일이 지난 며칠 후에 빨간색 교통카드가 집으로 배송되어왔다. 경기도에서 발급한 G-PASS(지패스)로 뒷면에 ‘만 65세 이상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막상 노인 우대 카드를 받고 보니 이제 명실상부한 노인네가 되었구나 싶어 기쁨보다 어쩐지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환갑이 지나 사회생활을 접고부터 머리의 염색도 하지 않고 지낸다. 대인 관계상 예의를 지켜야 할 일도 별로 없고 매주 염색하는 일도 귀찮아져서이다.

만 65세가 다 된 지금은 회색보다 흰 머리칼이 더 많아졌고 유전적으로 앞머리 숱이 적어서 실제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더 많게 보인다. 그래도 지금까지 전철을 탈 때 노약자지정석에 앉지는 않았다. 아직은 두 다리로 서서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석 중간쯤에 서 있으면 간혹 예의 바른 젊은이가 슬며시 자리를 비우고 일어서는 경우도 있다. 내가 겉보기로 칠순은 넘어 보여서 일 게다. 그래서 앉을 자리가 없이 복잡할 때는 가급적 출입구 근처에 기대서서 오곤 한다. 젊은이들도 한창 각박한 사회생활에 찌들어 피곤할 테니까, 자리를 양보받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고 한 달쯤 지나서 동갑인 아내도 노인 우대 카드를 발급받았다. 아내는 아직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매일 한 시간 이상 걷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보다 네댓 살은 젊어 보인다. 둘이 함께 나섰다가 초면인 사람을 만나면 열 살쯤 차이 나 보이는 부부가 동갑이라는 말에 적이 놀라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당신 친구들 만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만나고, 놀러도 자주 가도록 해요. 나중에 나이 들면 그러고 싶어도 못 하니까.” 나는 집에 틀어박혀 글이나 쓴답시고 친구들 모임에도 거의 안 나가지만 아내에게는 열심히 놀러 다니라고 일렀다. 그 나이에 일주일에 네댓새 정도나 온종일 서서 강의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

그래서 아내는 이제껏 마음 맞는 친구들 몇 명과 거의 매주 만나서 나들이를 하고 있다. 주로 서울의 백화점에서 만나 아이쇼핑하며 유행하는 옷의 트렌드를 살피고, 백화점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씩 시켜놓고 싸 가져간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운다. 그리고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싸구려 옷이나 신발, 생활용품을 사거나 어디 세일하는 장소에 다녀오기도 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헛돈 쓰지 않고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기도 하거니와 평균수명이 연장되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길어졌으니 조금이라도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니까. 괜찮고 값싼 물건은 두어 개씩 더 사 와서 며느리들이 집에 오면 선물로 나눠주기도 한다. ‘좋아라.’ 하며 받아 가는 며느리들 얼굴을 보면 나도 기분이 무척 흐뭇해진다.

그런데 노인 우대 교통카드를 받고 나서는 아내의 나들이 행선지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상암 하늘공원에도 놀러 가고, 강화도 근처뿐만 아니라 전철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심지어 온양 온천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교통비가 공짜니까 부담 없이 놀러 다닐 수 있어 더없이 좋아졌다며 즐거워했다.

이용 가능한 전철은 지하철 1호선~9호선과 분당선, 중앙선, 경의선, 경춘선, 수인선, 공항철도(일반), 신분당선 등이다. 며칠 전 토요일에는 가을 단풍 구경한다며 양평 용문사에 놀러 갔다. 공짜 전철을 타고 가서 내리면 용문사 입구에 있는 식당의 셔틀버스가 있다고 한다. 그 버스를 타고 10분쯤 가서 그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주면 용문사 입장료도 무료라고 한다.

대신에 더덕구이나 북어구이를 1만 3천 원에 먹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용문사의 가을 정취를 흠뻑 만끽하고 올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부담은 별 게 아니다.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는 나이가 1,100살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가 15m이며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서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사람이 엄청나게 놀러 와서 전철이 만원이라 올 때는 계속 서서 왔어요!” 용문사를 다녀온 아내는 즐거움이 잔뜩 배인 얼굴로 억지 푸념을 했다. “살기 어렵다면서 웬 사람들이 그렇게 놀러 다니는 건가?” 올해 가을 단풍이라야 아파트단지 내의 벚나무와 느티나무 잎사귀 시드는 거나 보았던 나는 그래도 아내의 밝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해서 물었다.

“당신 나이 남자들도 여럿이 뭉쳐서 많이 왔던데요? 당신도 언제 한번 가보면 좋을 텐데...” 글 쓴다고 집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운지 아내가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동창회 모임에서 갔나 보지 뭐. 노인네들이 말짱 지공파가 돼서 단풍 구경한답시고 나서니까 전철이 만원이 안 될 수가 없겠네. 허허.”

“젊은 사람들도 많아요. 애들 데리고 온 부부들도 많고.”

“그래? 용문사는 유명한 데니까 당일로 단풍 구경하는 젊은 층도 많이 오는 모양이네. 하기야 일주일 동안 격무에 시달리다가 가족이랑 추억 만들기 하면 피로 해소도 되고 에너지도 재충전할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지. 그런데, 노인네들 때문에 전철이 만원이 돼서 젊은 사람들이 짜증 나지 않았을까?”

얘기하다 보니 문득 지공파들이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열심히 일한 당신들, 이제 남은 인생 즐기면서 사세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창 바쁘게 사회생활 하느라 피곤한 젊은이들의 목마른 휴식에 방해가 되어서야 쓰겠나 싶어졌다.

우리나라도 2000년부터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이 되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65세 이상 인구가 14%가 되면 ‘고령사회’라고 하는데, 2017년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자가 이미 13.8%나 된다. 벌써 65세 이상 노인네 한 사람을 생산 가능 인구 5.3명이 부양하는 꼴이 되었다.

고령자가 20%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인데 우리나라는 2045년에 고령자가 47.7%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 인구의 절반이 노인네가 되어, 젊은이 한 명이 벌어서 자기도 먹고살고 노인 한 명도 부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2016년 65세 이상 고령자의 고용률은 전년보다 0.1% 포인트 증가한 30.7%에 불과하다.

‘100세 인생’을 노래하면서 만날 놀러만 다녀서야 머지않은 우리 자식들 세대에 큰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2017년 조사에 의하면 55세~79세의 고령자 중 62.4%는 일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래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여보! 당신 친구들하고 놀러 가는 걸, 주말 말고 평일로 바꿔야 하지 않겠나? 젊은이들이 모처럼 휴식 취하러 나왔다가 우글거리는 노인네들에게 치여서 스트레스만 더 받고 가겠구먼. 허허.” 아무리 전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파라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 할 것 같다. “그러네요. 다음에는 평일에 가자고 해야겠어요.” 아내도 두 아들 부부와 손녀 생각에 미안한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