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9]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9]
  • 임동식
  • 승인 2023.09.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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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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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1945년 8월16일, 아직도 영화 농장 사람들은 조국의 해방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를 통틀어도 라디오 한 대 없었기에 외부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1일과 6일, 닷새마다 서는 일로 장날이나 되어야 비로소 멀리 사는 지인들의 소식이나 나라에 생기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으니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그 이튿날인 이날도 영화 농장 사람들은 아직 조국의 해방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이날은 일로 장날이다. 장날을 이름하여 영화농장 사람들은 촌놈 생일날이라고 한다. 이날이 되면 지푸라기에 가지런히 싸진 계란이나 조, 맛조개 등의 농수산물을 내다 팔고 고무신이나 농기구, 기타 필수품을 사 오게 되는 것이며 내친김에 멀리 사는 친척이나 지인의 소식도 전해 들을 겸 재수가 좋으면 탁배기라도 한잔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날이기 때문에 이날을 일컬어 촌놈 생일날이라고 했던 것이다.

정오를 지난 시간 대전은 이웃집 쌍본과 집을 나서서 협궤철로가 놓인 신작로를 따라 일로로 향해 가는 중이었다.

"동생! 저 친구들 아는 사람들 아니여?"

가던 발길을 멈추고 대전이 앞을 가리킨다. 저만치 앞쪽에서 다가오는 세 사나이들,

"성님! 찰로(정말로) 저것들은 시름묵 후근이랑인디요. 얼마 전에 군대 간다고 갔는디 먼 일이께라우?"

과연 앞에서 보따리를 털래털래 손에 들고 다가오는 세 사나이들은 며칠 전에 징병으로 불려 갔던 영화농장의 세 사나이들, 신원목의 후근이랑이었다. 대전은 다가오는 세 사나이들에게 다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니 이것이 어찌게 된 것이여? 자네들은 일본으로 가지 않았는가?"

며칠간의 여행으로 초췌한 모습을 한 영화농장 세 사나이들은 되레 반문하듯

"아니 성님들! 당아(아직) 몰라요? 해방이 되얐어라우, 해방이."

"일본 천황이 전쟁에서 져 갖고 손을 들어 불었당께요. 인자 왜놈들이 이 땅에서 다 물러간답니다."

"인자 징병이고 뭣이고 필요 없어져 불었제라우. 긍께 우덜(우리)은 부산항에서 배를 탈라고 지다리다 빠꾸(되돌이)해 불었소."

이렇게 저마다 앞다퉈 자랑하듯 말했다. 대전과 쌍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전은 대동아전쟁의 내막을 대략은 알고 있었기에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의외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이 어떤 의미인지조차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 들은 일본인들이 없는 세상을 살아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이들 모두가 한일합방 이후 탄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제의 강탈마저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제 이전이건 일제 이후이건 그 시기와 관계없이 일본 관헌이 이 땅에서 사라져만 준다면 틀림없이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 올 것이란 것이 대전의 생각이요 믿음이었다. 대전이 후근 일행에게 말한다.

"어쨌든 잘들 돌아왔네. 언능 집으로들 가보시게!"

이렇게 하여 후근 일행은 동네로 돌아가고 대전과 쌍본은 일로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광암리로 향했다.

"종기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아헐 것이네. 언능 가 보세!"

"그 성님 벌써 알고 있는 것 아닐께라우?"

"아니여. 그 친구가 알았다면 벌써 쫓아왔을 테제."

대전과 쌍본은 발길을 재촉했다. 월곡을 지나 방뫼고개를 넘고 철둑을 넘어서 광암에 이르렀다. 종기네 집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여섯 칸 겹집에 마당도 널찍한 광암리의 부잣집이다. 대전이 대문을 들어서자 종기의 마누라는 마당 한 켠에 널린 고추를 다듬고 있었다.

"아짐! 안녕하시오? 마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종기의 마누라는 손에 든 고추를 내던지고 다가오며 말한다.

"야~아! 안녕하시께라우? 근디 애기 아부지는 도동지 간다고 갔는디 못 만나겠오?"

"오메! 그랬어라우? 길이 엇갈렸는갑네. 저 그러먼 우덜은 이만 가 볼라우."

이렇게 하여 대전과 쌍본은 부리나케 다시 도덕지로 향했다. 종기도 이미 해방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며 이 사실을 한시라도 바삐 대전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도덕지로 향하여 월곡의 대밭 옆길을 지나는데 저만치 도덕지로 갔다 돌아오는 종기를 만났다. 종기가 반가운 듯 손을 높이 흔들며 다가와 말한다.

"어찌게 그쪽에서 오는가? 나는 하도 기쁜 소식이 생겨 자네에게 알린다고 자네 집으로 갔디만 일로로 갔닥 해서 도로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네. 해방이 되얐담서?"

"나도 그 기별을 들어서 자네 댁으로 갔다 오는 참이네. 잘되얐네. 기왕에 여그서 만났응께 여기 도남이 성님 댁엘 들리세!"

하고 대전이 대밭 안쪽 집을 가리켰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은 월곡의 나도남의 집으로 들어갔다.

월곡의 나도남, 그는 대전보다는 여남은 살 위로 언젠가 공산주의 이론을 접한 후 둘째가라면 서러우리만치 공산 사상에 대하여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도남의 내외는 햇살 좋은 마당에 멍석을 펼치고 그 위에 고구만 순을 널고 있었다.

"아따! 자네들 먼일인가? 자네들이 우리 집을 다 찾아온 것 본께 아칙(아침)에 해가 꺼꿀로 떴든갑다."

"성님! 그것이 아니고 해방이 됐다고 헙니다, 해방이!"

대전의 이 말에 도남은 반색을 하여

"뭣이여! 해방? 누가 그러든가?" ​

대전이 자초지종 설명하자 도남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놈들이 이 땅에서 물러갈 텐디 그리되면 우리도 떳떳이 우덜의 일을 펼쳐갈 수 있겄네. 너나없이 다 같이 잘 살작 헌께 저짝 백호동 남용 씨나 또 그 마냥 잘 사는 사람들이사 좋아헐 리 없겄지만 가난허고 배고픈 사람들이사 안 좋을 사람 어딨겄는가? 인자부터 우덜 열성으로 해보세!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있네그랴! 당장 진사동 김해봉이한테로 가 해방 사실을 알리세!"

나도남은 숨 쉴 겨를도 없이 당장 사달을 낼 것 같았다. 이에 종기가 말리고 나선다.

"성님! 지금 당장은 안 되야요. 그 사람들 낮에는 논밭에 나가 일들을 할 것인디 가드라도 낸중에 가사 써라우(가야 되요)!"

"성님! 종기 말이 맞습니다. 낸중에 가도록 허십시다!"

이렇게 대전이 종기의 말을 거들자 나도남은 자신의 의견을 접고 마누라를 시켜 찐 고구마를 내오게 하였다. 이날은 이렇게 모두 헤어졌던 것이며 진사동은 며칠 뒤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해의 시월 경, 이 무렵 대전과 평정의 오근식은 지난 4월 첫 만남 이후 급격히 친밀해져 있었다. 대전이 일로 면사무소를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 몸이나 녹여 가자고 오근식의 집을 찾았다. 오근식은 토방까지 나오며 대전을 반겨 맞는다. 대전이 말한다.

"마침 집에 계시네. 면사무소에 좀 들렀다 가는 길에 몸이나 좀 녹여 갈까 하고 들렀네."

"야~아. 성님 잘 와겠습니다. 내 가서 따신 차 한 잔 가져올 텐께 쫌 지다리쑈!"

대전은 빈방에 앉아 사방을 훑어보았다. 윗목 책장에는 책들이 키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고 그 옆으로 상 위에는 보다가 덮어놓은 듯 잡지가 놓여 있었다.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 보이는 창 옆 횃대에는 잘 다려진 검정 무명 바지저고리와 검정 모직 코트가 길게 걸려있다. 대전은 코트를 바라보며 큰 키의 오근식에게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과 ‘부잣집 아들에 인물 또한 훤칠하며 늘 미소짓는 여유로운 인품을 지녔는데 왜 결혼을 안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드르륵' 문이 열리고 차 쟁반을 든 오근식이 들어왔다.

"이놈의 곤로가 오래 되야서 불이 언능 안 붙어서 시간이 걸렸네요. 자! 땃땃허니 한 잔 드이쑈!"

"어이. 뿌담씨(괜히) 내가 와서 귀찮허게 허네. 앉으소!"

차를 마시며 시국담을 논하기를 한 식경, 대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인자 몸도 녹이고 했으니 가야것네. 근디 내가 연길에서 구한 소중한 책 한 권이 우리 집에 있는디 자네 보실란가?"

"무슨 책인지 모르제만 성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책을 어찌게 제가 돌라고(달라고) 허것습니까?"

"괜찮허네. 자네가 그 책을 보고 공부헌다면 뛰는 말에 날개를 단 셈이 될 것이네. 그렁께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세!"

대전의 말을 듣고 근식은 잠시 생각을 하다 대전에게 곧 따라가겠노라며 혼자 먼저 가라고 한다. 그리하여 대전은 먼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이어 근식이 대전의 집으로 들어서는데 그의 손에는 아직 핏기가 마르지 않은 소고기가 들려 있었다.

"이 사람아! 이 비싼 소고기를 멋 헌다고 사오시는가? 기냥 오면 어쩐다고…. 그나저나 방으로 들여감세!"

"실은 어르신이 계신닥 헌께 이놈을 사 올라고 성님 먼저 가시락 헌 것입니다. 그 사이 장터 조 씨네 푸줏간에 댕겨 왔어라우."

대전은 고기를 받아 들며 근식을 인길양반이 있는 큰방으로 안내하였다. 이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인길양반은 아랫목에 앉아 침술 관련 책을 보다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과 함께 상지 위에 올려놓는다.

"아버님! 이 친구는 평정에 사는 후배입니다. 아우! 인사드리시게!"

"어르신! 인사 올리겠습니다."

오근식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저, 평정에 사는 오근식이라고 헙니다."

"오~호! 그러신가? 자네 어르신의 함자는 누구신고?"

"야~아. 시방은 작고허시고 안 계신디 오 병자 권자, 오병권이셔라우."

"아! 몇 해 전에 용산리 구장 허셨던 오병권 씨? 내가 잘 알제. 반갑네그려."

몇 해 전 용산리의 구장을 했던 오근식의 아버지를 같은 구장 일을 했던 관계로 인길양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어서 인길양반이 다시 묻는다.

"자네 선친의 기일이 아마도 6월 경일 텐디. 내가 문상을 갔었응께 알제. 그러면 제사는 자네가 모실까?"

"야~아. 맞어라우. 유월 초 사흗날이 제산디 제가 모시제라우. 그날은 큰집에 성님들 그러고 작은아버지와 사촌들이 다 참석헙니다."

인길양반의 물음에 오근식은 차분히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는 대전은 인길양반이 왜 오근식에게 세세하게 묻는지 그 까닭을 짐작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님! 그럼 저희는 제 방으로 가겄습니다."

"그래라! 자네도 같이 가서 놀다 가시게!"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큰방을 나왔다. 대전이 근식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면서 작은방을 향해 순녀를 부르자 순녀가 나왔다.

"순녀야! 이분은 평정 사는 오빠 후배다. 인사드리고 옆집에 가서 쌍본이 좀 오라고 해라! 평정서 친구가 왔다고 말이다. 그러고 근식이! 이 애는 내 여동생일세. 서로 인사허시게."

하고 순녀와 근식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아따! 이쁜 동생이네. 나는 오근식이여."

"야~아. 저 같은 박색을 이쁘닥 헌께 고맙기는 허요만 실은 이쁘던 않제라우. 저는 박순녀여라우. 그러먼 나는 쌍본 오빠네 갔다 오께라우."

잠시 후 순녀가 쌍본을 불러왔다. 이렇게 하여 대전과 근식, 쌍본은 해 질 녘까지 얘기를 하다 근식과 쌍본은 돌아갔다. 두 사람이 돌아가자 대전이 순녀를 불러 묻는다.

"순녀야! 인자 너도 시집 갈 나이가 다 되얐는디 아까 봤던 근식이 어쩌디야? 내가 너를 생각허고 쌍본이한테 물어본께 그 친구도 아직 짝이 없다고 헌다. 내 생각은 너와 짝을 지어 주고 싶은 생각이다."

순녀는 얼굴이 붉어지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서 있다. 대전이 재차 묻는다.

"사나그가(사나이) 저만침(만큼)이면 덩치나 인물이나 가정이나 다 괜찮은디 어찌게 생각허냐?"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경주댁도 대전의 말을 거들었다.

"애기씨! 그 총각 인물도 좋고 싹싹허니 좋습디다."

이리되자 순녀도 본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오빠랑 성님이 그렇게 생각허시면 나도 괜찮허제라우. 근디 내가 빠꾸 맞으먼 부끄라서 어찌게 헌다요!"

"그것이사 이 오래비가 알어서 헌께 꺽정을 말그라! 알었다."

사실 대전이 근식에게 책을 주겠노라고 했던 것은 근식을 자신의 집에 오게 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이며 이들 두 남녀에게 간접적으로 서로 마주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순녀의 의중을 안 대전은 이렇게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 밥상머리에서 이 이야기가 인길양반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점돌 애비야! 아까 왔던 병권 씨 아들, 총각인 모양이던디 색싯감이 있다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먼 잘되얐다. 머스마가 인물도 괜찮허고 집안 내력도 괜찮헌께 니가 서둘러서 순녀랑 어찌게 맺어줘 봐라! 사람 속이야 겪어봐야 알기는 허제만 본마음과 습관이 얼굴과 행실에 다 나와 있는 법인께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총각임이 틀림없다. 순녀야! 너는 아까 본 총각이 어짜디야?“

인생의 나이 이순이면 산전수전 다 겪고 수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을 것인즉, 인길양반의 나이가 나이니만큼 예순에 이른 세상을 살아오며 인생사에 달관하였을 것이며 사람을 보는 눈 또한 정확하였다. 순녀가 섣불리 대답을 않고 머뭇거리자 대전이 대신 대답한다.

"아버님! 저도 아버님이랑 생각이 같어라우. 그래서 제가 아까침에 순녀한테 일러 뒀는디 어무이랑 아부지만 좋닥 허시면 제가 어찌게든 맺어 줄랍니다."

"그래. 순녀도 인자 과년한 나이에 이렀응께 오라버니인 니가 꼭 힘써보기 바라마!"

"야~아. 아부지 명심 헐께라우."

이렇게 하여 인길양반과 대전은 근식을 순녀의 짝으로 맺어 주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은 물 따라 길 따라 이리저리 맺어지는 것인가 보다.

이날 밤 순녀의 방, 말례와 태곤은 아랫목 잠자리에 누워있고 순녀는 태곤의 구멍 난 양말을 꿰매고 앉아있었다.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던 순녀는 어머니인 인길댁이 바느질하던 것을 뺏다시피 하여 바느질을 하는 것이었다. 잠자리에 누웠던 말례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인지 꼼지락거리다가 순녀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낮에 온 그 오빠한테 언니 시집 갈랑가? 그 오빠 겁나게 잘생겼든디…."

"응? 암만(아무리) 잘 생겼어도 뭣 헌데야. 내가 시집을 가고 잡아야 가는 것이제. 씨얄디 없는 소리 말고 언능 자그라!"

"칫! 뿌담씨(괜히) 좋음시러(좋으면서) 그러제? 나는 우리 성부(형부) 허고 싶그만."

"니가 뭣 안다고 그냐? 언능 자그라이!"

"알았당께. 언니도 불 끄고 언능 자! 불 안 끄먼 나 잠 못 자."

순녀는 꿰맨 양말을 접어 잠이든 태곤의 머리맡에 놓고 자신도 이불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