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눈물이 절반이다
기고/ 눈물이 절반이다
  • 시정일보
  • 승인 2023.10.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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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택(전 신한데이타시스템 사장, 영화배우)
임금택
임금택

[시정일보]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용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그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서울에 살면서 새삼 고향을 생각하는 까닭은 그저 물리적으로 먼 곳에 있는 고향이 그리워서만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지금(now)의 진실 때문이다. 지금 여기만 오롯할 뿐 다른 것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소망으로서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무안군 일로읍 아래 광암(光岩) 마을 뒷산에 널따란 큰 바위가 있어 주민들은 이 바위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고 흥겹게 놀기도 하였다. 마을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로 나주임씨(羅州林氏) 집성촌이다.

마을의 지형이 남향의 소쿠리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형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마음 주변에는 지석묘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제 고향은 정체된 탓에 답답하다. 고향을 박차고 떠나는 것은 청년들이다. 하지만 탈주 욕망을 부추긴 더 좋은 사회적 기회를 거머쥐려는 기대는 좌절되기 일쑤다. 요새 고향은 덧없이 사라진 과거, 그 부재가 빚는 그리움 속에서 기억의 왜곡을 낳는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고향은 선조들의 오래된 땅이고, 태어나고 자란 풍경, 원초적 입맛과 취향을 빚는 곳이다. 그것은 깊숙하고도 고요한 애착의 장소, 참된 삶의 바탕이고, 지각적 통합성을 만들며, 정서의 중심을 관통하는 근원이다.

사회학자 전광식(全光植)은 “고향은 존재의 추상화를 배격한다”라고 말한다. 고향은 개별적 실존의 생생함을 부여하지만 도시는 개별자를 원자 단위로 쪼개고 헐벗은 익명성 속에 가둔다는 뜻이다.

어린 청소년 시절은 부모님과 고향에 살았다. 특히 아버지의 역할이 성장 발달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에서 시작된 존재이며, 가족에게 있어 부성의 역할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래서 도무지 아버지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불효자식일까.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생각난다.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인간이 까마귀 새끼만도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조선 중기 이이(李珥, 1536~1584)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가 3천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가장 큰 죄는 바로 불효하는 죄다”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좋은 정신과 전통이 무너지고 있어 안타깝다. 이 사실을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다. 정말 낫 놓고 기역도 몰랐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까닭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만큼은 누구보다 큰 부자였다. 아버지의 지성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식꾼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명문교인 목포에 있는 유달중에 시험을 쳤다. 함께 시험을 봤던 친구들은 모두 떨어졌고, 혼자만 겨우 합격했다. 당시 아버지의 어깨가 한 뼘 올라갔다.​

일로 시골에서 목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새벽에 집을 나와 50분쯤 걸어서 목포행 통학 열차를 타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굣길을 동행했다. 아들을 교문으로 들여보내고는 목포 부둣가 부두로 향했다. 힘든 하역작업을 한 뒤 아들의 수업이 끝날 무렵 학교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귀가했다.

​이따금 아버지는 이런 부탁을 했다. “교실에 들어가거든 창문을 살짝 열어 놓아라.” 당시엔 교실 창문을 비싼 유리 대신에 한지를 발랐다. 신설 학교라 임시 가교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의 말씀대로 늘 창문을 빠끔 열어 놓았다. 그런 날엔 아버지는 부두로 일을 나가지 않으셨다. 창문 틈새로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셨다.

지금까지도 기억이 새롭다. 1학년 때엔 창 쪽 48번이 내 좌석이었다. 학년이 바뀌어도 내 자리는 언제나 창 쪽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선생님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것이었을까. 그럴 리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교문 밖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셨다. 그리고 통학 기차를 기다리면서 단팥죽을 사서 먹였다. 아버지 한 그릇, 나 한 그릇. 그때의 팥죽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의 등하교 동행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3년간이나 연속이었다.

​목포 상고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막걸리 양조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자전거에 무거운 막걸리 여섯 통을 매달고 배달하러 다녔다. 나중에 양조장이 어려워지자 그것을 인수하기도 했다. 집안의 형편은 좋아졌으나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술을 즐기던 아버지는 아들의 대학 졸업을 앞두고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었다. 문득 시인 김현승(金顯承, 1913~1975)이 쓴 ‘아버지의 마음’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지금은 이슬 맺힌 눈으로 술잔을 기울인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술잔에도 눈물이 절반이다. 이제야 불효자식의 한(限)을 반추해 본다.

돌이켜 보니, 내 나이 벌써 80에 들어섰다. 사람의 나이가 80이 되면 이제 앞쪽을 봐야 할 때다. 아버지의 은덕으로 요새도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소비 생활과 여가를 즐기고 있다.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심지어 고독사의 불행이 우리 주변에 자주 나타나고 있음은 참으로 우려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현실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늙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늙어서 돈이 부족하여도, 부자가 아니어도, 인생에서 행복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비법은 없을까.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라고 늘 말씀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은 오래 살아갈 뿐 아니라 행복 지수도 높게 살아간다.

어쨌든, 친구들은 나쁜 행동이나 잘못된 결정들을 막아주며 인생의 즐거움과 가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도 담당해준다. 푸른 잎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고, 예쁜 꽃도 언젠가는 떨어진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좋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즐겁게 갈 수 있다. 아버지와 같은 친구가 많은 것이 다행이다. 이게 바로 건강 장수의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