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8]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8]
  • 임동식
  • 승인 2023.11.1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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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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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1949년 5월, 오뉴월의 영화농장은 분주하기 그지없다. 보리 수확과 모내기가 맞물리는 철이기 때문에 여느 농가를 막론하고 모자라는 일손으로 아녀자들은 물론 방과 후 학생들까지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할 만큼 바쁜 철이다.

이즈음의 도덕지 대전의 집, 보리타작을 마친 마당은 널브러진 보릿대와 탈곡기의 빠른 회전으로 이곳저곳 먼지투성이가 된 집 안팎의 청소까지 다 마친 시간은 해가 뉘엿거리는 저녁나절이다.

농사일 중 보리타작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급하게 돌아가는 요란스러운 탈곡기 소리에, 탈곡기에서 쏟아지는 알곡을 탈곡기의 속도에 맞추어 받아내고, 알곡에 섞인 검불을 풍로를 부쳐 걸러내고, 널브러진 보릿대를 한데 모아 보릿대 벼늘을 쌓고, 이렇게 치러지는 보리타작은 농부들의 허리를 휘게 하는 고단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날, 보리타작을 마친 대전은 아래채 사랑방에 앉아 궐련을 태우며 쉬고 있었다. 사상과 관련되어 그동안 다니던 군청 일을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하던 중으로 이날은 보리타작의 격한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늘어진 몸을 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광암의 임 종기와 월곡의 나 도남 그리고 평정의 오 근식이 찾아왔다. 오 근식은 처가인 대전의 집으로 오면서 도중에 월곡의 나 도남의 집을 들렀고 그곳에서 세 사람이 모여 대전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오늘 타작을 했는 모양일시?"

두 사람의 앞장을 서 들어오는 나 도남이 마당의 흔적들을 보고 미뤄 짐작하여 묻자 대전은

"아이고 성님! 언능 오시쑈! 친구랑 매제도 언능 오시게나! 오늘 타작을 했는디 저녁 묵고 쪼깐 쉬는 참이요."

하고 대답한다.

"우덜 가서 인길 아짐 뵈고 인사드리고 옴세!"

"저도 장모님께 인사 먼저 드리고 올랍니다."

하고 세 사람은 인길댁이 있는 큰방으로 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대전의 사랑방으로 들어오고 대전은 동생인 막례를 불러 막걸리를 받아오게 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는 대전은 어떤 사람이건 집에 손님이 들면 없는 안주라도 술대접을 하곤 했던 것이다. 이윽고 경주댁이 삐들삐들 말린 찐 조기 몇 마리에 계란을 삶아 안주로 상을 봐 들여왔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연장자인 나 도남이 대전에게 묻는다.

"대전이! 자네도 이참에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을 했는가?"

"야~아. 어차피 이 정부가 들어서서는 남로당을 멸살헐락 허는디다 우덜은 이미 공산주의를 포기헌 마당 아니요? 그렁께 순순히 했제라우. 동봉, 성숙, 쌍본이에다가 나까지 도덕지에서는 너이 다 가입 했는디 성님도 허셨소?"

"나라고 별 수 있간디? 했제."

대전이 임 종기와 오 근식에게도 물었다.

"나도 했제. 아, 그 가입허라고 우리 집으로 찾아온 순사 놈이 쩌 웃고랑 놈인디 어찌게나 으름장을 놓는지 칵 씹어 불라다 놔뒀네."

임 종기는 다혈질의 사나이로 마치 경찰관을 눈앞에 두고 말하듯 얼굴이 벌겋게 되어 끓는 속내를 드러냈다. 오 근식 또한 가입하게 되었던 정황을 이야기했다. 임 종기의 말에 나 도남이

"뿌다이 건들어서 좋을 것 없네."

하고 말하자 대전도 '잘 참었네.' 하고 나 도남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임 종기는

"에이! 개자식들 허는 짓거리 하고는 눈뜨고 못 보겄당께. 아~, 기냥 남로당 출신들은 씨를 말려 불랑갑서."

하고 혼잣말로 넋두리한다. 임 종기는 새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이다. 이 승만 대통령의 취임을 전후로 하여 새 정부는 2, 3년 사이 국회나 경찰, 검찰 및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 좌익계 인사들의 색출, 검거함으로써 남한 내에 있는 공산세력을 퇴출하는 것에 대하여 임 종기는 대단히 불만이 많은 것이었다. 나 도남은 임 종기의 감정이 누그러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한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불러서 전향을 시키는 교육을 헌다든디 자네들은 참석헐 참인가? 어쩐가?"

"클씨 어디서 받는가 모르겄는디 조용히 넘어갈라먼 나오락 헐 때 나가서 받어야제라우. 매제나 종기! 자네들도 인자는 공산주의를 잊어 불고 그 교육에 참가 허시게나!"

하고 대전이 대답과 아울러 매제인 오 근식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다시 나 도남이 말을 잇는다.

"근디 감두이(감동리) 홍 윤표나 나 정율이로 해서 몇몇 전향을 안 헌 친구들은 당아도 무안 읍내 동지들허고 활동허는 모양이던디 연맹에 가입은 당연히 안 했을 테제?"

하고 대전과 임 종기를 번갈아 쳐다본다. 임 종기가 대답한다.

"그 친구들은 올 3월에 당국에 체포된 김 삼룡, 이 주하 동지들을 얼마나 철석같이 믿고 있는디 당연히 연맹가입은 안 했을 것이요. 그나저나 남조선, 북조선이 이렇코 갈라져 부니 통일독립을 그렇게도 단호하게 주장허시던 김 구 선생도 돌아가 부시고 장차 이 나라는 어찌게 될랑가…."

삼팔선 분단 독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임 종기의 말에 나 도남은 주머니 안에 있던 궐련을 꺼내 또르르 종이에 말며 다소의 이견을 주장한다.

"인자는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살어야지 별 수 있겄는가? 미소 양 대국의 등쌀에 우리 조선 같은 소국은 어쩔 수 없제."

조선은 힘없는 소국으로서 일제 36년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미소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고 지금은 그것을 주도했던 미소 양국의 힘의 논리에 어떤 항거도 할 수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지금껏 듣고 있던 대전이 끼어들어 말을 꺼낸다.

"성님! 내 말 좀 들어 보이쑈! 우리 조선은 삼팔선 이북이 남으로 합쳐지든 이남이 북으로 합쳐지든 사상과 이념을 넘어서 백범 선생께서 주장허시던 대로 우선 통일독립을 했어야제라우. 그런디 이북에서는 김 일성이란 작자가, 이남에서는 이 박사가 쏘련과 미국을 등에 업고 별도로 각각의 정부를 새워 불었으니 언제 다시 우리 강산, 우리 겨레가 하나로 합쳐질지 아득허기만 헙니다. 그 옛날의 조선 반도를 생각해 보먼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겨레, 한 나라인디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원수의 나라로 생각허고 적대시허며 살았냔 말입니다. 그렁께 해방 후로 미소가 조선에 들어오지를 말었어야 허고 기왕에 들어왔닥 허드라도 김 구 선생이나 조 만식 선생님 같은 분들의 뜻이 잘 받들어져서 조선 반도가 하나가 되얐어야 허는디 남북이 갈라진 것은 우리 겨레에게는 크게 불운헌 일이여라우. 이것을 아는 학생들이나 애국지사들은 지난 몇 해 동안 얼마나 반탁을 외쳐댔소!"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이에 임 종기도 맞장구를 친다.

"맞아. 47년도 12월에 김구 선생께서 남이나 북이나 단독정부는 안 된다고 발표했고 그 후로도 서울서는 반탁운동을 얼마나 했는디 대국들을 등에 업고 정권 잡는 데만 혈안이 된 두 놈들 땜에 나라가 두 동강이 나 불었당께. 그 쳐죽일 놈, 안 두희는 어찌게 된 거여? 누구의 사주를 받고 애국지사이신 김구 선생을 쏴 죽였으까?"

대전과 임 종기는 사상과 이념에 앞서 우선 통일독립을 주장하는 반면 나 도남은 국제정세, 즉 미소 양국의 세력 견제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 도남은 두 사람의 세론에 별수 없다는 듯

"인자는 어쩔 수 없네. 자네들 생각도 일면 일리가 있제만 인자는 삼팔선에 말뚝을 박고 철망을 둘러쳐 불어서 결판이 다 난 지경이라 별수 없어. 대전이! 그렇지 않겄는가?"

하고 확신에 찬 푸념 조의 말을 하며 대전에게 묻자 대전은

"성님 말씀대로 38선에 말뚝을 박아 불어서 지금 상황이사 어쩔 수는 없제만 그래도 나라 안에는 통일독립을 여망허는 국민들이 많으니 내 생각으로는 틀림없이 머지않아 큰 변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돼요."

하고 대답했다. 평정의 오 근식도 대전의 말을 거들어

"대전 성님 말씀이 맞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허고 현 정권에 줄서기 허는 놈들 빼놓고 조선 사람이먼 누구라도 남북이 갈라선 것을 좋아헐 사람은 없고 우리 국민들 여망이 그렁께 머지않아 변란이 나고 말 것이요."

나 도남은 할 수 없었던지

"큼메 말이시…."

부정도 긍정도 아닌 짤막한 대답을 했다. 이렇게 네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담을 주고받는 것이었으며 벌렛간 늙은 솔가지에 앉아 울어대는 소쩍새 울음소리 속에 5월의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들녘의 모심기가 다 끝나가는 6월 27일 이른 아침이다. 영화농장 들판 아랫녘에서 바쁜 걸음으로 수로와 나란히 한 농로를 따라 올라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검은색 양복바지에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있었으며 구두에는 질퍽한 농로의 진흙이 철벅하게 묻어 있었으나 사나이는 그따위에 개의치 않고 바쁜 걸음으로 농로가 끝나는 신작로에 이르러서야 구두에 묻은 진흙이 마음에 거슬렸던지 길가의 풀에 구두를 문지른 후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도덕지에 이르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길거리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집 저집 초가지붕 너머로 밥을 짓는 연기가 무풍의 하늘을 향해 곧장 피어오른다. 사나이는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동네 입구의 신작로 바로 옆 첫 집으로 들어갔다.

"실례헙니다. 쥔네 계시요?"

마당의 인기척에 부엌에 있던 초로의 여인이 나왔다. 이른 아침 낯선 사나이의 등장에 짐짓 놀란 표정을 한 여인이 누구냐고 묻자 사나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아짐! 이른 식전에 미안헙니다. 저는 인의산 너머 무룡둥 사는 이 동네의 박대전이 친구 되는 사람인디 대전이네 집이 어디께라우?"

하고 예의 바르게 묻자 여인은 사나이의 앞장을 서 신작로까지 나와 손짓을 해가며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사나이가 대전네 마당에 들어섰다.

"대전이! 대전이 집에 계시는가?"

마침 대전이 집 모퉁이 부엌 앞에서 세안하던 참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세안은 허둥지둥 마치고 마당으로 나왔다. 대전은 난데없는 아침 방문객을 발견하고 반가이 맞는다.

"오메! 무룡둥 석규 아닌가? 이렇코 이른 아칙에 뭔 일이신가? 구두는 다 멍쳐 불고…. 그나저나 먼 길 왔네. 언능 방으로 들어가세!"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는 대전은 우선 반가운 마음에 팔을 붙들며 방으로 데려가려 하자 석규는 극구 사양하며

"대전이 내가 지금 방으로 들어갈 시간은 없네. 지금 지서로 출근을 해야 된께 찾아온 용건을 간단히 말허고 갈라네."

하고 상황 설명을 하였다. 대전은 석규가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 뭔 일이신가?"

석규는 경계의 눈초리로 좌우를 살피더니

"오늘이나 낼 지서에서 자네를 잡으로 올 것이네. 그렁께 당분간 어디로 피신해 있으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의아해진 대전이 왜 그러는지 다그쳐 묻자 석규가 이어서 설명한다.

"지금 한양 쪽에 전장이 났어. 북조선에서 땅크를 몰고 내려왔다는디 함마 지금쯤은 콩대밭이 되얐을 것이여."

"시방 뭣이락 헌가? 전장이 났다고?"

"그런당께. 그저께, 긍께 일요일 날 새복에 밀고 내려왔닥 허네."

천지가 고요하고 산야는 푸른데 바람 없는 산허리에 흰 구름 머물고 여물 쑤는 머슴아이 휘파람 소리도 정겹네. 영화농장의 아침은 이처럼 평온하기만 하다. 그런데 전쟁이라니…. 대전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짐짓 놀라운 표정으로 묻는다.

"차말로 전장이 났단 말이여?"

"아 이 사람아! 그렁께 내가 이리 새복같이 왔제. 그래서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디 예전 각 지역의 남로당 위원장을 했던 사람들을 잡아들이라는 것이여."

"어쩐다고 그러까?"

"적과 내통헐 수 있을 깜송께 미리 차단해 불잔 것이제. 어쩌먼 생명도 위험헐 수 있응께 잠시 어디로 몸을 피허소! 오늘 지서에서 나올 것이네. 나는 시방 이 자리서 떠날 텡께 그리 알소! 참, 그러고 혹시라도 오늘 나를 안 만난 것으로 허소!"

"어이 알겄네. 그래도 이렇게 왔다가 바람같이 가분닥 헌께 너머 서운허네. 이 은혜를 어찌게 갚으까. 정말 고맙네. 석규! 조심히 가시게나!"

석규는 남이 볼세라 서둘러 떠나갔다. 대전은 안방 앞 토방에 서서 나직하게 인길댁을 불렀다.

"어무이!"

"오냐! 누가 왔다 갔데야? 아까침에 두런거리든디?"

인길댁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마루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대전은 한양 쪽의 전쟁 발발 사실과 이에 대해 자신이 처한 입장을 말하자 인길댁은 경악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오메메! 아쨔사께! (어찌해야 살까. 전라 서남부 지방의 방언으로 그 어원의 변천 모습은 이렇다. 어째야 살까-어쨔 살까-어쨔 쓰께-어쨔 사까 등으로 변천) 그러먼 너는 어쭈고 헌단 말이냐?"

하고 묻자 대전은 한참 동안 침묵 끝에 대답한다.

"일단 서둘러서 아침을 묵고 어디로든 피신을 해사 쓰겄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막연한 대책이지만 일단 피신을 해야 하는 것이 대책인 것이었다. 다급해지는 것은 인길댁이라고 다를 바 없어서 급하게 경주댁을 불러 조반을 차리게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초조해진 분위기에 방 가운데서 혼자 식사를 하는 대전을 식구들 모두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며 대전은 경주댁을 시켜 여행 가방을 챙기게 하고 태곤에게는 동봉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사이에 대전의 여동생인 막례가 묻는다.

"오빠! 뭔 일이라우? 어디를 가실라고 그러요?"

"시방 한양에 전장이 터졌다고 안 허냐."

대전을 대신하여 대답한 인길댁의 말을 듣고 막례는 깜짝 놀라 일순간 숨을 들이켜며

"흡! 전장이 났다고라우? 그렁께 오빠가 전장터로 가시는개비요?"

하고 묻자 인길댁이 대전이 떠나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때 태곤을 따라 동봉이 왔다. 느닷없이 불려온 동봉이 묻는다.

"성님! 뭔 일 있으시요?"

대전이 동란발발 사실과 자신이 처한 입장의 이야기를 해주고 끝으로 이런 당부를 하는 것이다.

"아우! 나는 한 달쯤이나 피신을 갔다 올 것인께 전장이 언제 어찌게 끝날지 모르것네만 혹시라도 보도 연맹허고 관련된 일이라면 심각히 생각하여 조심하기 바라네! 내가 지금 떠난 뒤에 이러헌 사실을 종기나 쌍본이, 성숙이, 도남 형님에게 알리기 바라네!"

이렇게 말하며 경주댁이 준비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며 인길댁의 앞으로 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어무이! 차말로 죄송헙니다. 일정 때도 일본으로 만주로 외유만 했었는디 그 뒤로 쪼깐 집에 있다가 또 이렇코 집을 나서게 되니 어무이 마음에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헙니다! 차말로 죄송헙니다."

이 말을 듣는 인길댁의 마음은 살얼음 밭으로 자식을 내보내는 심정이다.

"아니다. 니 본심이 어디 나쁜 디가 있디야 악헌 디가 있기를허냐. 니 맘을 이 에미는 다 안께 어디로 가 있든지 간에 몸만 성히 있다가 오니라!"

"야~! 그럼 다녀오겄습니다. 그러고 점돌 어매! 어무이 모시고 집안 잘 봐 주시기 바라오! 말례야! 태곤아! 느그들도 나가 다시 올 때까장 어무이 말씀 잘 듣고 잘 있그라!"

두루 인사를 마친 대전은 경주댁의 치맛자락 앞에 아무런 까닭도 모르고 서 있는 세 살배기 용균을 한 번 안아주고는 모든 식구들의 눈물 바람 섞인 이별의 손짓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용균은 대전의 둘째 아들로서 순녀가 시집을 가고 그 이듬해에 낳은 아이였다. 집을 나선 대전은 신작로를 우회하여 백호동 뒤 공동산 자락길을 넘어 평정 순녀의 집으로 향했다. 대전이 순녀네 집에 들어서니 마침 아침 식사 중이었다.

"사둔 어르신들 안녕하시오? 식사 중이시그만 많이들 드시쑈!"

난데없이 나타난 대전으로 말미암아 밥상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근식이 숟가락을 놓고 마루로 나서자 순녀도 보름달만큼 둥실해진 배를 하고 뒤뚱거리며 마루로 나와 대전을 맞는다. 순녀는 포태 중으로 만삭에 이른 몸이었다.

"우메 오빠! 이렇코 일찍 뭔 일이시요?"

"성님! 이리 와게서 진지 좀 드십시다!"

대전은 토방에 선 채 인사 소리라도 누가 들을까 두리번거리며

"내가 방에 들 시간은 없네. 매제! 이리 좀 와 보시게! 지금 한양 쪽에 전장이 터졌다네. 아칙에 일찍 무룡동 석규가 와서 전해주고 갔네. 그래서 나는 지금 몸을 피신헐라고 집을 나섰어."

이렇게 말하자 근식과 순녀는 깜짝 놀라며 묻는다.

"오빠! 전장이 터졌는디 어째서 오빠만 피신을 헌다우?"

"내가 남로당 일로 위원장을 했던 것이 화근이다. 적과 내통헐 깜송께 나를 잡아들이라고 헌다는 것이여."

이야기를 듣고 대충 이해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근식이 말한다.

"성님! 그런닥 허시먼 돈이라도 넉넉히 갖고 가셔야제라우! 쪼깐 계시쑈!"

근식이 사랑방으로 들어가고 순녀와 대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속내를 모르는 근식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한사코 대전에게 방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지만 대충 급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양한다. 잠시 후 사랑방으로 갔던 근식이 손에 지폐를 쥐고 나와

"얼마 안 되제만 노자로 보태 쓰시쑈! 그런디 어디로 가실라고 그러요?"

하며 대전에게 건넨다.

"사정이 급헌께 염치없이 받고 볼라네. 고맙네. 나는 이 길로 강원도 쪽으로 가서 시국이 조용해질 때까장 고기잡이배나 탈라고 그러네. 매제! 앞으로 전장이 어찌게 될랑가 모르제만 보도연맹하고 관련해서 지서에서 지시가 있으면 신중허게 생각하여 행동허소! 광암 종기는 성질이 급헌 사람인께 월국 나 도남 성님을 자주 만나서 상의를 해 보시게! 나는 시간이 급헌께 지금 뜰라네."

대전은 근식에게 이런 부탁을 하며 순녀의 집을 나서고 순녀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오라버니! 전장으로 나라가 어수선헐 텐디 위험스러워서 어찌게 허께라우? 너머너머 꺽정스럽소."

라며 눈물 섞인 이별사를 하였고 대전은 순녀의 등을 다독이며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긴 체 일로역 쪽으로 멀어져갔다.

"여보! 성님은 워낙 영리헌 분인께 무사히 다녀올 것이요. 들어갑시다!"

이날 대전이 떠나간 도덕지, 대전네 집 앞 개천에는 방죽에서 방류한 농업용수가 흐르고 다리목에는 남정네들 몇이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시국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라 안의 소식이 촌락의 오지인 도덕지에 전해지기까지는 일로 장이 서는 날이나 그도 아니면 어쩌다 목포에 나갔다 오는 사람들이 전하는 것이 전부이며 그나마도 다리목에라도 나와 이웃 간 왕래가 잦은 사람들은 뒤늦은 소식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다리목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다리목 앞집의 순재와 수로 건너의 해남양반, 대전의 사촌 동생인 동봉, 신원목의 후근이었다. 후근은 삽을 깔고 앉아있는 것으로 봐 논에 물을 대고 오는 중인 모양이다.

이들은 남에 앞선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마치 자랑거리를 늘어놓듯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렇듯 다리목은 새로운 소식을 자랑하기도 하고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날은 아침에 전쟁 소식을 들은 동봉이 말을 한다.

"그저께 말이세. 그렁께 25일 날인개빈디 북조선에서 삼팔선을 넘어 땅크를 몰고 내려와서 한양 쪽에 전장이 터졌는개비여."

난데없는 이 말에 모두가 자신의 귀를 반신반의하며 놀라워하고 해남양반이 반문한다.

"뭔 전장이여? 누가 그러든가?"

"클씨, 대전이 성님 말씀이 그러는디 전장이 터졌닥 허요."

"그러먼 인민군들이 여그까지 쳐내려오는 것 아니여?"

"그것이사 누가 알 것이라고! 두고 봐사제. 그나저나 큰일이세."

그때였다. 저만치 신작로의 일로 쪽에서 두 명의 순경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순경들은 동네 사람들 곁으로 다가와 묻는다.

"여그 도덕지 박 대전 씨 집이 어디요?"

"바로 이 집인디요."

무슨 일인지 의아한 사람들이 대전의 집을 손짓으로 가르쳐 주자 순경들이 대전의 집으로 들어간다. 마당 절반에 보리가 널려있고 인길댁은 그 보리를 맨발로 젓고 있었으며 마루 한쪽 귀퉁이에서 경배와 점돌은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짐! 여가 박 대전네 집 맞으요?"

인길댁은 아침에 집을 떠나간 아들에게 들은 바가 있어 지금 직면한 상황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태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박 대전씨는 어디 있소? 좀 만날 일이 있는디요."

"어디 나갔는갑소만은 우리 아들이 뭣을 잘못헌 일이 있으께라우?"

인길댁이 시치미를 떼며 묻자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그때 마침 호미를 든 경주댁과 말례가 마당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동봉도 들어왔다.

경찰들은 어떤 실마리라도 발견한 듯 경주댁에게 다가가 대전과의 관계를 물은 후 자신들이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는 대전의 행적을 다그쳐 묻는다. 경주댁은 순순히 그들에게 말을 다 해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숨길 필요도 없다는 생각으로

"그 양반은 어디를 가도 어디를 간다고 얘기를 헐까, 언제 온다면 온다는 기약을 허기나 헐까 그렁께 잘 몰라라우. 근디 어째서 우리 집 양반을 잡으러 오신 것이라우?"

이렇게 막연한 대답과 함께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지소장이 데리고 오락해서 그러제 우덜은 잘 모르요. 근디 박 대전 씨, 혹시 밭에 있는 것 아니요?"

하고 묻자 경주댁은 양손을 저어 손사래를 하며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이날 경찰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그 이튿날, 해거름이 되자 인길댁은 마당에 널었던 보리를 당글개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때 집 옆구리 장독대 앞에서 절구질하던 가마골댁이 인길댁에게로 다가왔다. 가마골댁은 겉절이 김치에 양념으로 쓸 고추와 밥을 절구통에 찧고 있는 중에 뭔가 할 얘기가 생긴 것이다.

"인길 성님! 아까부터 쩌그 언덕 우개에 순사들 둘이 앉거 있는 것이 성님네 집을 엿고 있는갑소."

"밥 묵고 허는 일이 그것인개빈디 내비 두소! 지 풀에 지치먼 깔데(다니는 것을 꾸미는 수식적인 방언) 갈 테제."

경찰들이 대전네 마당이 내려 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 대전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길댁은 벌써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 되자 잔등 너머 고추밭에 일을 나갔던 경주댁과 말례가 돌아오고 뒷산 벌렛간에서 놀던 점돌과 경배까지 집을 찾아든 시각, 마당으로 두 명의 경찰관이 들어섰다.

"박 대전 씨 계시요?"

오전 이른 시간에 대전을 잡으러 왔다 대전이 집에 없자 자신들의 임무완수를 위해 종일 언덕에 앉아 망을 보던 경찰관들이다. 부엌에 있던 경주댁이 마당으로 나갔다.

"우리 그 냥반 시방 며칠째 소식이 없어라우."

"방에 있는 것 아니요?"

"어째서 사람 허는 말 곶이를 안 들으요? 없당께라우 없어…."

"쳇!"

경찰관들은 투덜거리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다가 대전의 흔적이 없자 결국 돌아갔다. 경주댁의 뒤를 따라 나온 점돌이 집을 떠나가는 경찰관들의 뒷모습과 경주댁을 번갈아 쳐다보며 경주댁에게 묻는다.

"어매! 순사들이 어째서 아부지를 잡아갈라고 그런당가?"

"느그 할매한테 가서 물어봐라!"

경주댁은 이렇게 심기 불편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 대전은 신혼 초기부터 일본으로, 만주로 외유를 하였던 것이나 귀국 이후로도 공산주의 사상이나 직장 일에 전념할 뿐, 가사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데 대하여 경주댁은 불만을 갖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런 중에 또다시 도피 생활을 하게 된 남편을 두고 경주댁은 심드렁한 것이었다.

이날 밤, 낮 동안에 힘겨운 육체노동을 한 농가 사람들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인길댁네라고 예외일 수 없어서 초꽂이 불을 끄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이다. 문밖에서 뚜벅거리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쥔네 계시오. 쥔네 계시오?"

하고 아닌 밤중에 불청객이 찾아든 것이다. 이즈음 집안의 분위기도 순탄치 않은 참이라서 쉽사리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은 없고 어떤 이가 무엇을 하러 왔을까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무수하여 잠자코 누워서 밖의 반응을 기다린다.

"대전 씨 계시오?"

이름까지 부르는 것으로 보아 필시 아는 사람이라 생각한 것인지 인길댁이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서자 경주댁도 자신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달은 밝은데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은 세 사람의 사나이들이었다.

"누구시오? 누구신디 어렇코 야심헌 밤에 찾아와겠오?"

"쩌…, 쩌그 청호에서 온 나 정율이라고 허는 사람인디 박 대전 씨를 좀 찾어 왔어라우."

나정율은 예전에 홍 윤표와 함께 대전과 남로당 일로 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인길댁이 나 정율이란 사람을 알 까닭이 없다.

더구나 청호리라면 적어도 한 시간 남짓을 가야 하는 곳의 사람이라니 섬짓 이러도 저러도 못하고 서서 인길댁이

"그 먼 디 사시는 양반들이 먼일로 우리 대전이를 찾아와겠으께라우?"

하고 묻자 나 정율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아짐! 인자 새 세상이 오는디 그 대업을 달성허는디 우덜이 힘을 합쳐야 쓰고 대전 씨는 우덜보다는 한발 앞선 사람인께 이렇코 찾어 왔제라우. 곧 있으먼 북조선으로 잠시 피신했던 박헌영 동지가 남조선으로 밀고 내려올 것이고 그렇코 되먼 삼팔선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인께 그때를 대비해서 우덜은 준비를 해야 써라우."

나 정율의 일행들은 여전히 좌경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정부에서 추진한 좌익분자들의 전향사업의 일환인 보도연맹 가입을 회피한 사람들이었으며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이 곧 관공서를 접수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나 정율이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경주댁이 끼어들었다.

"새 세상이든 헌 세상이든 우리 그 양반은 집을 나간 지가 여러 날 째여라우.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기나 헐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요."

이런 말을 하는 경주댁은 싸늘한 눈초리였으며 나 정율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낸중에 다시 올 텐께 대전 씨가 오시거든 말씀이나 전해 주시쑈!"

이런 말을 남기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려 어스름한 달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뒷날인 6월 30일 아침 식사가 끝난 시간, 인길댁과 말례가 잔등 너머 고추밭으로 가기 위해 사립문을 나서는데 경찰관 셋이 들이닥쳤다.

"박 대전이 집에 있오?"

어저께 대전을 찾던 경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진 거칠고 억센 태도였다. 집을 나서다 경찰들에 밀리다시피 뒷걸음질을 한 경주댁이 대답한다.

"아니라우. 여직 안 왔는디요."

"좋소. 그러먼 당신이 대전이 마누라가 맞지라우? 무안 본서로 같이 가셔야 쓰겄소."

경찰들은 두 말의 여지도 없이 경주댁의 양팔을 끼고 사립문을 나서려 하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인길댁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것이 뭔 일이요? 우리 며늘애기가 멋을 잘못 했가니 끌고 가는 것이요? 뭣을 잘못헌 것이 있으먼 내가 잽혀갈 텐께 우리 며늘애기는 놔 주시오!"

"할매! 할매는 필요 없응께 쩌리 치나이쑈! 박대전의 처는 무안 본서 유치장으로 갈 것이고 박 대전이 자수헐 때까장은 거그 감금돼야 있으 것이요. 그렁께 박 대전이 집으로 오는 대로 본서로 오락 허시오!"

경찰들은 앞을 가로막는 인길댁을 밀쳐내며 경주댁을 끌고 가버리고 인길댁은 마루에 걸터앉아 바닥을 치며 통곡한다.

"어무이! 울지 마이쑈! 즈그들이 산 사람을 죽이기사 헐랍디여."

말례가 통곡하는 인길댁을 달래기는 하지만 스스로 말례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며 집에 없는 대전을 대신하여 경주댁은 볼모가 되어 무안경찰서로 끌려갔던 것이었다.

한편 같은 시간 평정 순녀 집, 만삭이 다 된 순녀는 둥실해진 배 때문에 논밭의 거친 일은 하지 못하고 집 안에 머물며 허드렛일이나 하는 정도였다.

시어머니는 밭으로 가고 순녀와 그녀의 시할머니가 평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앉아있던 중에 순녀가 말한다.

"할무이! 언저녁 밤에 희한헌 꿈을 꿨어라우."

"뭔 꿈을 꿨는디야?"

순녀의 꿈 이야기는 이렇다. 순녀가 동네 안의 평나무 옆을 지나는데 동네 뒤, 밭쪽에서 한 줄기 황토 먼지를 동반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 바람이 평나무를 스치고 지나가자 평나무가 그 바람을 맞고 뿌지직 소리를 내며 넘어지려 하길래 순녀가 달려들어 사력을 다해 그 나무를 받쳐 들고 넘어가지 않게 하려 했지만 결국 그 나무는 쓰러지고 말았으며 자신은 겨우 나무에 깔리지 않고 빠져나왔다는 것이 순녀의 꿈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근식의 할머니가

"어쩐다고 그렇코 큰 낭구가 자빠져 붓으끄나? 별척스런 꿈이구나."

하고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하도 괴상해서 아칙에 낭구가 지대로 서 있는가 허고 가봤당께라우. 근디 낭구는 말짱허게 고대롭디다."

순녀의 꿈과 동네 안의 나무가 상관관계가 있을 리 없으나 크나큰 나무가 쓰러지는 괴이한 꿈을 꿨다하니 개운치는 않을 법도 한 일이다. 이때, 사랑채에서 책을 뒤적이던 근식이 외양간으로 가, 소 구들에 여물을 퍼주고는 평상으로 다가왔다. 근식의 할머니가 자리를 내어주며

"입이 궁금헌갑다. 개떡 좀 갖다 주랴?"

하고 묻자 근식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순녀가 부엌으로 가 개떡을 들고나와 근식의 앞에 놔 주었다. 근식의 할머니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헐헐 웃으며 좋아하였는데 근식이 외동아들인 탓에 어려서부터 금이야 옥이야 하고 애지중지 길러온 정 때문이리라. 근식이 개떡을 들고 입에 넣으려다 말고

"여보! 오후에 목포에 좀 갔다 올 일이 있오."

하고 순녀에게 말하자 순녀가 만류한다.

"뭣 땀세 가실락 허요? 꿈자리도 사나운디 며칠 지나서 갖다 오이쑈!"

"허허! 원 당신도…. 꿈 땀세(‘ 때문에’의 일로 사투리) 할 일을 미뤄 불다니…. 내 오후에 댕겨올 텡께 꺽정허지 마시오!"

근식은 꿈 따위의 얘기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 점심 끼니때도 가까웠겠다 점심을 먹여 보낼 요량으로 순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때,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오 근식 씨!"

근식을 부르는 사람은 평정, 같은 동네의 김 상선과 대동한 경찰관이었다. 김 상선은 근식과 함께 좌익활동을 하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연맹원이었다. 평상에 앉았던 근식이 마당 복판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뭔 일이시오?"

근식이 경찰에게 묻자 경찰은 근식에게

"오늘 오후에 보도연맹원들 교육이 있응께 시방 지소로 같이 가야 되오. 언능 갑시다!"

하고 재촉하는 것이다. 김 상선이 경찰관과 서 있는 상황을 보아 근식은 묻고 따질 겨를도 없이 옷만 겨우 갈아입고 경찰관을 따라나서고 근식의 할머니나 밥을 차리던 순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바쁘게 경찰관을 따라 집을 나서는 근식은 뒤를 돌아보며

"여보! 연맹원 교육이 있닥 헌께 갔다 오리다."

하고 떠나갔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순녀와 그녀의 시할머니, 시어머니, 세 여인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 가운데 상을 놓아둔 채 대화 중이다. 근식의 할머니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시상에 뭔 일로 이렇코 늦도룩 안 오끄나?"

이렇게 말한다. 낮에 보도연맹 교육을 받으러 간 근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기에 세 여인들은 식후 설거지도 잊은 채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괘종시계는 덩덩거리며 10시 정각을 가리켰다. 근식의 어머니는

"뭔 사고가 붙은 것이 틀림없는 개비요. 어쨔쓰까이."

하고 걱정스러운 말을 하자 순녀가

"지가 기영쳐 놓고(설거지의 일로 사투리) 지소로 갔다 와 볼라우."

하고 상을 들고 일어서자 근식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하며 홀몸도 이닌 아녀자가 어떻게 늦은 밤길을 갔다 오느냐며 말렸다. 밤이 깊어 가도 근식은 오지를 않고 세 여인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안달이 난 근식의 어머니는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일로 지소로 갔다가 망연자실하며 집으로 들어온다.

"오매, 아가! 느그 신랑 말이다 무안 본서로 갔닥 헌디 어째서 그러끄나? 뭔 큰 죄를 졌다고 본서에 까장 갔단 말이여."

근식의 어머니는 마당 가운데 선 채 넋두리를 한다. 가는 귀를 먹은 근식의 할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자부와 손부를 번갈아 쳐다보며

"우리 근식이가 감악살이 갔닥 허냐? 어찌게 된 것이다냐? 속 터지겄다. 개안이(개운하게) 말해 봐라!"

하고 지레짐작으로 묻자 순녀가 큰소리로 설명을 해주자 노인은 털썩 주저앉아 눈물 바람을 한다. 순녀는 노인의 손을 잡아 달래 준 후 시어머니에게 묻는다.

"어째서 본서로 보냈으께라우?"

"몰르겄다. 일로 지소에서 여럿이 제무시(G,M,C) 차에 실려 갔닥 헌다."

이때 순녀의 친정 동생인 말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말례야! 어서 오니라! 어무이랑 집 식구들 다 편안허시냐?"

"언니! 요새 집안이 편털 안 해. 어지께 성님이 잽혀갔어. 그래서 시방 벤또를 싸가는 길이여."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이었지만 반가움에 앞서 폭풍처럼 불어닥친 집 안팎의 사정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말례는 외유 중인 대전의 일과 경주댁이 경찰에 잡혀간 경위를 소상히 말해 주었다.

"그래서 어지께 어무이가 일로 지소로 쫓아가 봐겠는디 성님이 무안 본서로 넘어갔닥 해서 벤또를 갖다 드릴라고 싸 온 참이여."

두 자매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순녀의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대체 뭔 일로 여그나 저그나 예문 사람들을 잡어간다냐? 무안 읍내로 가 봐사 쓰겄다."

라고 하며 근심 걱정이 태산이다. 순녀는 생각했다. 양가에 태풍처럼 불어닥친 당혹스러운 현실이 전쟁을 맞고 있는 시국과 관련이 되어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닐 것이라고…. 잠시 생각을 한 순녀가 말한다.

"어무이! 아무짝에도 지가 본서에를 가 봐사 쓰겄네요.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닌개비요."

"그래도 그러제. 홀몸도 아닌 니가 어찌게 간단 말이여!"

시어머니의 만류는 한가한 게으름이나 마찬가지, 만사는 다 제때가 있는 법, 어쩌면 근식의 생사여탈이 시를 다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녀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비자금 뭉칫돈을 챙겨 친정어머니, 인길댁이 만들어준 주머니에 넣으며

"말례야! 같이 가자!"

하고 무안경찰서로 향한다. 순녀와 말례는 철둑 너머 인동에서 무안행 마이크로버스를 잡아탔다. 일로에서 출발하여 무안으로 가는 버스는 늘 비포장 황톳길을 다니므로 버스의 안이나 밖이나 붉은 황토 먼지투성이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전경들은 논인지 산인지 혹은 나무인지 사람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차창에 뿌옇게 먼지가 끼어있다. 창가에 앉은 말례는 시야가 답답한 것인지 도시락을 싼 보자기 끝자락으로 몇 번인가 차창을 닦아 보지만 헛수고임을 알고 이내 그만두면서 말한다.

"언니! 어무이는 요새 날마다 걱정을 태산같이 허시네. 오빠 땀세 낮에는 순사들이 찾아오제 밤에는 좌익들이 찾아오제 거그다 성님은 본서로 잽혀갔제…. 긍께 애 터져 죽을락 허신당께."

"없는 사람을 어쩌라고 그 지랄들이데. 썩을 놈들…."

"그렁께 말이여. 밤에 좌익들이 오먼 나도 무서와서 죽겄당께."

그나저나 언니 배가 동산만이나 헌디 힘들어서 어찌게 댕겨오까!"

"힘들어봤자 죽는 고통만큼이나 허겄냐? 잽혀간 사람들은 대체 전장으로 보낼란지 아니먼 죽여불라고 이러는지 큰 꺽정이네"

두 자매가 애타는 대화를 하는 사이 버스는 무안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경찰서로 가는 도중 순녀가 걸음을 멈추며 말한다.

"말례야! 본서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점빵에 들러서 댐배를 몇 갑 사 가자!"

말례는 담배가 왜 필요한지 굳이 듣지 않아도 의미를 아는 것인지 순녀가 하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윽고 자매들이 무안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정문에 두 명의 초병이 서 있는데 왼쪽은 검은 제복의 경찰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헌병이 M1 소총을 들고 서 있으며 평소와 다른 이 모습은 전시체제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초병은 정문으로 접근하는 두 자매 앞으로 다가와

"뭔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투박한 말투로 묻는다.

"우리 신랑과 친정 성님을 쪼깐 만나자 허고 왔는디요."

"신랑이 누구요?"

"신랑은 일로 사람, 오 근식이고 성님도 일로 사람, 이 영산이오."

초병은 초소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초소를 나와 손짓으로 본관을 가르치며 그곳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순녀 자매가 경찰서 본관으로 들어섰다.

당직대에는 정문과 같이 경찰과 헌병이 서 있고 당직대 맞은편 쇠창살 안으로는 좌우로 남녀가 따로 나뉘어 수감 되어 있다. 수감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당직대 앞에선 순녀 자매를 쳐다본다.

그 눈빛들은 혹시나 자신과 연관된 사람이 아닐까 하고 바라보는 애절한 눈빛들이다. 당직대에 선 경찰이 순녀 자매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더니 이름과 나이 등 신상에 관한 것들을 묻고 이어서 피면회자의 이름을 묻자 순녀가 대답했다.

"오 근식허고 이 영산이오."

"오 근식은 보도연맹원이요? 이 사람은 만날 수 없소. 이 영산은 저 유치장에 있으니 30분 동안 만나고 가시오!"

근식을 만날 수 없다니 순녀가 따져 묻는다.

"어째서 오 근식은 만날 수 없닥 헌다우?"

"상부의 지신께 더 이상은 알락 허지 마이쑈!"

기가 찰 노릇이다. 상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상부의 지시라고 일갈해 버리니 더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올케언니인 경주댁을 만나기로 하고 순녀 자매는 유치장으로 간다.

여성 유치장에는 어떤 죄를 범했는지 다섯 명의 여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경주댁은 긴장이 고조되었던 가운데 순녀 자매의 등장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듯 반가운 모양이다.

"오매! 우리 애기씨들, 날할나 더운디 이렇코 왔소!"

"성님! 어무이가 성님 갖다 드리라고 이렇코 벤또를 싸 주셨어라우. 한 끼에 못 잡수먼 나놔서 잡수이쑈!"

도시락을 받아든 경주댁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애기씨들 고맙소. 근디 시누이 양반이랑 동봉이 아제하고 내월촌 양반은 어저께 저녁나절에 쩌 뒷문으로 덱꼬 나갔는디 그 뒤로 안 뵈이요."

경주댁의 이 말에 순녀는 귀가 번쩍 띄었다. 순녀가 묻는다.

"서이만 나갔소?"

"아니, 여러 차례에 많이 나갔제."

순녀는 옳다거니 하고 당직 경찰관에게 다가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경찰과 헌병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사정한다.

"아자씨! 보도 연맹원들이 쩌 뒤쪽에 있는 모양인디 한 번이라도 얼굴 좀 보게 해 주이쑈!"

경찰은 곤란스러운지 서너 발 떨어져 서 있는 헌병의 눈치를 보며

"아짐! 그랬다가 내 모가지 떨어지요. 그나저나 나 급헌께 변소에 좀 가야 쓰겄소."

하면서 허리띠를 쥐어 잡고 밖으로 나가자 순녀도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쫓아 나선다. 경찰은 건물 모퉁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서서 순녀를 쳐다본다.

"아짐! 눈치가 빠르시구만이라우. 내가 갈쳐 드릴랑께 그대로 허이쑈!"

당직 경찰의 귀띔은 이런 내용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은 현재 경찰서 뒤 창고에 가둬져 있으며 며칠 사이에 모두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좀 마련하여 경찰서장에게 찾아가 그 돈을 건네주며 붙들고 늘어지란 것이다.

그리고는 끝으로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 듣지 않은 것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몇 번이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순녀는 품에 있는 담배를 마저 꺼내어 당직 경찰관에게 건네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경찰은 남이 볼세라 담배를 주머니 여기저기에 쑤셔 넣으며 서둘러 당직실로 들어갔다.

순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모름지기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예지하며 아찔해진 것이다. 순녀는 지난 어느 겨울밤, 근식이 자신의 부푼 배를 어루만지며 '우리 이 아이를 낳거든 잘 키워봅시다.'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며 그러했던 남편이 지금에 와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맥이 풀리는 것이었다.

스물두 살의 순녀, 아직은 신혼 초기의 풋내기 아낙, 인생의 초년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운명의 고비를 맞고 있는 순녀, 그녀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사람의 지능은 저마다 다르며 지능의 수준이나 성향에 따라 만물의 이치를 채 깨닫지 못하고 삶을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찍부터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사에 통달하여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스물두 살, 순녀는 나이보다 비교적 세상사를 많이 깨우친 여인으로서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난관은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진 여인이었다.

순녀는 전대 속의 두툼한 돈을 만지며 건물 모퉁이를 돌아 정문 쪽으로 갔다. 정문 앞에는 순녀를 기다리던 말례가 서 있었다. 순녀는 말례에게 당직 경찰에게 들었던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해주고 경찰서장을 만나고 오겠노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순녀는 어려운 출입과정을 거쳐 서장실에 들어섰다. 서장은 합죽선 부채질을 하며 부하직원이 가져온 듯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고 그 옆에 부하직원은 서장의 어떤 지시를 기다리는 듯 서 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서장은 힐끗 곁눈질로 순녀를 쳐다보더니

"아주머니는 뭔 일로 오셨소?"

하고 묻자 순녀는

"바쁘실 텐디 죄송허지만 서장님한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라우."

하고 대답하자 서장은 잠시 기다리라며 보던 서류를 들여다본다. 문전박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실오라기 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란 희망적인 생각에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순녀는 기다린다. 이윽고 부하직원이 사무실을 나가고 사무실 안에는 서장과 순녀 단둘이 남았다.

"젊은 아주머니가 홀몸도 아니시그만 허고 잡은 말이 뭔 말입니까?"

서장의 물음에 순녀는 내내 머릿속에 준비하고 있던 말을 한다.

"야~. 저는 일로서 온 박 순녀라고 허는 사람인디 제 남편이 연맹원으로 여그 잽혀 온 오 근식이여라우. 그러고 도덕지 사람들 박동봉, 오 쌍본, 박 성숙이랑 다 한 동네 사람들인디 서장님 아량으로 이 사람들 좀 놔 주시쑈!"

순녀의 이야기를 들은 서장은 허허 하고 당찮은 둣 웃더니

"아니 시방 젊은 아주머니 신랑 한 사람을 놔주라고 해도 될까 말까 헌 마당에 동네 사람들을 무리로 놔 달라니 말이 되는 소리요? 그것은 절대 안 될 말이요."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순간 순녀는 품속에서 돈뭉치를 꺼내 들고 한 걸음 물러선 제안을 한다.

"그러먼 제 신랑만이라도 쪼깐 빼 주이쑈! 저는 보시다시피 이렇코 만삭이요. 신랑이랑 단둘이 살다가 혼자 돼 불먼 어찌게 살겄소? 여그 인사로 돈을 쪼깐 마련했는디 사양허덜 마시고 쪼깐 힘써 주이쑈!"

서장은 어려운 관계의 청탁 중에도 동네 사람들까지 구하려는 순녀의 도덕적인 의리에 다소의 감명을 받은 터라 딱 잘라 거절도 못 하고

"내가 그 돈을 받으면 자칫 내 목숨과 바꿔야 될 수도 있소. 그렇다고 임부로서 만삭의 여인이 애절허게 청을 허는디 당신이 나라면 어찌 허겄소?"

하고 순녀에게 반문하자 순녀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

"저는 더 말을 못 허겄소. 우리 신랑을 구허는 것도 좋제만 서장님도 꾸리실 가족이 있으실 텐디 서장님의 목숨이 달린 문제락 허신께 더는 말을 못 허겄소."

"그 말이 사실이요. 그러나 사람은 뜨건 가슴을 가져야 쓰요. 그래야 이 사회가 서로 융화를 하고 밝아지는 것이요. 그러나 법은 지켜가면서 말이요. 내 여러 말 않고 당신 남편을 구해 줄 것이니 절대 비밀로 해야 되고 당신 남편이 집에 가더라도 일체 바깥 활동을 못 허게 해야 쓰요!"

서장의 이 말에 순녀는 순간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희열의 눈물을 주르르 쏟는다.

"서장님! 차말로 감사허요. 이 은혜는 꼭 갚을라우."

순녀가 눈물 섞인 감사 인사를 하자 서장은

"오늘 저녁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맞춰 오 근식 씨를 내보낼 테니 당신은 돌아가시오!"

서장의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대답을 할 겨를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건장한 두 명의 사나이들이 들어왔다.

서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자리를 권한 후 자신도 다시 의자에 앉는다. 두 명의 사나이 중 상급자인 듯한 사나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서장에게 말한다.

"오늘 상부의 지시가 왔습니다. 현재 본서에 있는 보도연맹원 전원을 명부와 함께 이송 준비를 하세요! 한 명도 빠져서는 안 되고 연맹원들 묶을 긴 밧줄도 함께 준비하세요! 내가 지시해 놨으니 차편은 GMC 다섯 대가 올 것입니다."

이 사나이는 방첩대의 목포지구대장이었다. 방첩대, 1948년 5월 27일, 창설한 조선국경수비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가 그 전신이며 초기 대장은 김 일안이었다.

1949년 10월 방첩대로 개칭, 군, 경, 검 합동수사대를 예하로 편입하였으며 남한 내의 시도에 12개의 지구대를 두었다. 주요인물의 뒷조사와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대북정보, 첩보 수집이 주 업무였으며 이 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감시, 탄압하므로 이승만의 사조직(비밀경찰)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6‧25 동란 초기 좌익전향자들로 구성된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들을 학살하고 이 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과 좌익세력의 타파와 척결에 최선봉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단체이다. 이후 육군본부 직할부대인 특무부대로 개칭함.

방첩대 지구대장의 지시에 서장이

"예! 알겄습니다. 어디 교도소로 몇 시에 출발헙니까?"

하고 묻자

"지금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우리 군이 수원까지 후퇴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도소고 뭐고 따질 시간이 없어요. 바닷 물대에 맞춰 출발할 것이고 가는 곳은 칠산 앞바다입니다."

지구대장의 말에 서장은 못 들을 말을 들은 듯, 아니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눈을 찔끔 감았다 뜨며 묻는다.

"아~니, 연맹원들을 갯바닥에 처넣게요? 정당한 재판 절차도 없이?"

서장의 이 말에 지구대장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힘껏 내려치며

"여보시오! 지금은 전시체제고 인민군들이 언제 여기까지 밀고 내려올지 모르는 판국에 재판은 무슨 놈의 재판? 저놈들을 그대로 놔두면 옆구리에 적군을 끼고 놔둔 것이나 같으니 에누리 없이 똑바로 해야 됩니다! 가만…. 근데 저 임부는 누구입니까?“

하고 뒤늦게 순녀를 의식한 듯 지구대장이 묻는다. 어색하게 한쪽에 서 있던 순녀가 목례를 하였고 주눅이 든 서장은

"저 그렁께…, 저의 처제인데 일전에 돈을 좀 빌려 쓴 것이 있어서 시방 돌려줄 참이었습니다. 처제! 자 돈 여기 있응께 갖고 가시쑈!"

서장은 얼렁뚱땅 순녀를 처제라고 둘러대고 순녀가 준 돈은 빌려 간 채무라고 얼버무리며 순녀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순녀 또한 얼떨결에 돈을 받아 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돈을 받는 순간 지구대장에게 직접 사정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서장이 지구대장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으로 보아 근식의 생사를 돈 몇 푼으로 흥정한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장의 거짓 연출이 곧바로 들통이 날 지경이 아닌가.

순녀는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좌절감 속에 서장실을 나와 말례를 만났다.

"말례야! 이 일을 어째야 쓰끄나? 느그 성부, 죽일랑갑다."

"오메 뭔 일이여? 그러먼 경주 성님도 죽인단 말이여?"

"성님이사 여잔디 죽일라디야? 그나저나 연맹원들이 도독질을 헌 것도 아니고 살인을 헌 것도 아닌디…. 오매 잡놈들이네. 그것도 새내키로 묶어서 칠산 앞바다에 수장시킬랑개빈디…."

순녀는 자신의 부푼 배를 만지며 울고 있었다. 대체 공산주의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것이 어떻게 잘못된 것이기에 선량한 민초들을 살육하려는 것일까. 답답하고 사지가 떨리는 공포감에 순녀는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언니! 쩌짝 나무 밑으로 가서 앉거! 몸할라 무거운디 잘못되면 어찌게 해."

순녀 자매는 경찰서 맞은편으로 가 정문이 잘 보이는 나무 그늘에 앉았다. 경찰서의 정문에는 여전히 두 사람의 초병이 서 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과연 방첩대 목포지구대장의 말대로 군용 GMC 트럭 5대가 경찰서 정문 앞에 도착하고 트럭에서 내린 다수의 군인들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아까 서장실에서 방첩대 목포지구대장의 말이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순녀는 자신의 부푼 배를 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말례는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자매의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대체 공산주의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것이 어떻게, 얼마큼 잘못된 것이기에 선량한 민초들을 살육하려는 것일까.

민주주의이건 공산주의이건 그 본질은 인간의 행복의 여건 중의 하나인 생존의 본능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최종의 목적일 것인데 그 실천 방식이 나와는 다르다 하여 상대를 억압하고 살육한다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의 본질에서 일탈한 처사가 아닐까.

이윽고 총을 든 군인과 경찰들의 경계 속에 줄줄이 포승줄에 묶인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정문으로 끌려 나와 군용트럭 쪽으로 향한다. 마른 조기처럼 엮여 끌려가는 보도 연맹원들은 모두가 땀 범벅이 된 얼굴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눈빛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줄줄이 엮인 까닭에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도 따라서 넘어지고 그러면 군인이 다가가 발길질을 하며 행진을 재촉한다.

"오매매~ 언니 쩌기 성부네 성부. 쩌기 봐!"

순녀는 차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대열을 바라본다. 과연 오 근식은 앞뒤 사람들과 한 줄에 엮인 채 끌려가고 있었으며 물론 도덕지의 동봉, 성숙, 쌍본, 나 도남 등, 다수의 일로 사람들이 죽음의 행렬에 끼어있었다.

보도 연맹원들이 다 트럭에 실려지자 각 차마다 뒤쪽으로 경계할 총을 든 군인들 네 명씩 동승하였다. 맨 앞 선두 차에 인솔 장교가 올라타며

"자~ 가자. 칠산으로…!"

하고 지시를 하자 다섯 대의 트럭은 출발하였다. 연맹원들을 실은 트럭은 작열하는 땡볕 속에 뿌연 황토 먼지만을 남긴 채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공산주의 새로운 세상을 바랬던 영화 농장 사람들의 영혼은 이렇게 칠산 앞바다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며 이를 바라보는 순녀 자매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