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9]
임동식 장편소설 영화 농장 [19]
  • 임동식
  • 승인 2023.11.2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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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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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 고단한 노동에 찌든 영화 농장 사람들은 나날이 푸르러 가는 들녘의 벼들을 바라보며 시름을 잊는다.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푸른 잎새들이 해풍에 사라락 거리며 반짝이는 것은 다가올 결실의 계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들녘을 바라보는 영화농장 사람들은 가을의 풍요를 고대하며 고단함과 더위도 다 잊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1950년 7월 27일, 들녘의 가운데서 대전은 동생인 태곤과 영화 농장 사람들의 일부가 되어 신작로 아래 배미 논에서 일하고 있다.

행여나 벼를 밟을까 포기 사이를 조심스레 밟아가며 피를 뽑던 대전이 무자구질을 하는 태곤을 소리쳐 부르자 태곤이 무자구에서 내려와 대전에게로 다가갔다.

"성님! 무자구질 그만 허께라우?"

"그래! 그만 허면 논에 물은 되얐응께 쬐간 남은 피를 마저 뽑아불자!"

이렇게 하여 해가 뉘엿거리는 시간이 되자 피사리를 다 마친 형제는 집으로 향했다. 지난 6월 무룡동 석규의 귀띔으로 난을 피해 속초로 갔던 대전은 인민군들의 남침으로 속초 또한 끓는 솥처럼 소란스럽고 불안하여 차라리 그리된 바에야 죽든 살든 고향으로 가자고 영화농장으로 돌아왔던 것이며 대전이 속초에 머문 기간은 한 달 남짓이었던 것이다.

대전 형제가 마당에 들어서자 청호리의 나 종률이 몇 사람을 대동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대전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전을 맞는다. 그 일행들은 인민군 두 사람과 일로의 공산당 열성분자 세 사람이었다.

"성님! 쬐깐 더 지다리다가 안 오시먼 논으로 뵈러 갈라고 헌 참인디 마치 와게 불었네. 성님! 자, 서로지간에 인사들 나누입시다. 이짝에 이분은 이참에 남조선 통일과업에 참여하여 북에서 오신 최창옥이시랍니다. 저 이분은 내나 말씀드렸던 박대전 씨이십니다."

인민군 최창옥은 얼굴이 붉고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불거진 눈에 배가 나온 보통 키의 사나이로 성격은 화들짝하게 보였다. 최창옥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히 하여 대전에게 악수를 청하자 대전도 엉겁결에 손을 내민다.

"박대전 동무 반갑습네다. 저는 최창옥이고 고향은 해줍네다. 이번에 김일성 수령 동무의 남반부 해방과 통일사업에 합세하여 죽기 살기로 내려와 무안 내무서를 담당하게 됐습네다."

"야~~아. 그라시오? 저는 이 마을 사는 박대전이오만 어쨌그나 반갑소."

사나흘 전, 청호의 나정율은 대전을 찾아와 대전에게 남로당 일로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청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대전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청을 거절하였고 이제 와 다시 그 청을 실현시키고자 최창옥을 대동하여 찾아온 것이다.

최창옥은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대전에게 권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박 대전 동무! 이제는 말입네다. 김일성 수령 동무의 영도 아래 남조선도 북조선과 함께 통일되어 위대한 조선인민공화국이 됐습네다. 기런 조국의 발전을 위해 대전 동무도 일어서시라요!"

나 정율의 말처럼 일로 인민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최창옥의 말을 듣고 대전은 갈등했다. 불과하면 얼마 전에 보도연맹원이 되어 공산주의와 손을 끊겠다고 서약을 했던 것이나 그의 아버지의 생전에 만류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 싶으나 공산화가 되어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없는 일로 사회만 될 수 있다면….

고심하던 대전은 최 창옥의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으며 대전의 대답을 들은 최 창옥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양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붉은 벽돌 건물의 일로 면사무소, 그 앞으로 다섯 그루의 오래된 벚나무가 서 있고 그 그늘에 인민군 병사들이 서넛이 키득거리며 노닥거리고 서 있다. 그들이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서는 대전 일행을 보고

"동무들 안녕하십네까?"

하고 인사를 하자 대전은 옆에 따르는 나 정율에게

“저놈들은 위아래도 없는갑네? 아무한테나 동무라니….”

하고 묻자 나 정율이 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일행은 아무렇지 않은 양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최 창옥과 더불어 인민군 복장에 총을 짊어진 병사들 서넛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대전 일행이 들어서자 최 창옥은 벌떡 일어나며

"위원장 동무! 어서 오시라요! 여기 의자에 앉으시겠슴네까?"

"아니 괜찮헌께 기냥 앉거 있으시요! 그나저나 아침 식사나 해겠오?"

대전은 위원장직을 수락하고 첫 출근을 한 참이라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여 얼렁뚱땅 아침 식사 인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최 창옥은 의자를 기꺼이 대전에게 내 주고는 말을 꺼냈다.

"위원장 동무! 우리 조선인민군 주력부대가 부산을 눈앞에 두고 낙동강에서 교전 중이라는데 말이지요, 이제 부산 함락은 눈 깜빡할 사이일 겁네다. 기것도 기럴 것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우리 인민군 6사단장이신 방 호산 사령관 동무께서 어제 목포에서 그쪽으로 대군을 몰고 가셨으니끼니 양키 쌔끼들 끝장이라우요.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네다."

최 창옥이 득의양양하여 자랑스럽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자 대전은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으며

"시방 낙동강에서 교전 중이면 사상자가 많을 텐디 어느 짝이 유리허닥 헙니까? 많은 사상자가 안 나고 끝나사 쓸 텐디…."

하고 물었다.

"기거야 두 말이 필요 없이 남조선 에미나이들이나 양키놈들 종이호랑입네다. 기것보다도 우리는 우리 인민공화국 건설에 독버섯 같은 악질지주들이나 극악무도한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됩네다."

최 창옥은 인민공화국 창설에 걸림돌이 되는 악질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해야 된다는 말과 아울러 이것은 김 일성의 명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최 창옥의 말이 끝나자 나 정율은 박수를 치며

"옳소! 그러먼 그래야제라우."

하고 신이 난 듯 소리 질렀다. 대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 정율을 쳐다봤다. 그때 몇 사람의 장정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예전 남로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로서 다행히도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아 지금껏 산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 며칠 사이로 나 정율 일행들이 이들을 선동하여 이제는 내놓고 공산당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최 창옥은 이들을 향해 재차 아까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들도 최 창옥의 말을 반기기는 나 정율과 한가지였다.

"맞어요. 반동분자들을 색출해 불어야제 이 일로가 공평허게 잘 사는 사회가 되제라우!"

이들은 앞을 다퉈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며 응원에 힘을 얻은 최 창옥은 대전을 향해

"위원장 동무! 여기 당원 동무들에게 리 별로 할당을 해서 반동분자들, 악질지주들을 색출하는 것이 어떻습네까?"

하고 묻자 대전은 일언지하에 이렇게 거절을 한다.

"우리 일로면 사람들은 그저 농사밖에는 모르고 암소양치 마냥 유순허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요. 그렁께 우리 일로면에는 악질지주나 반동분자들을 색출헐 것이 없소. 다만 반동분자들이 있닥 허먼 우익의 앞장을 서 좌익활동을 한 우리 동지들을 악랄허게 죽인 몇 사람이 있을 뿐이제라우."

하고 대전은 자칭 공산주의자들이나 최 창옥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주장하고 나섰다. 최 창옥은 못마땅한 듯 입맛을 쯥쯥 다시더니

"그럼 좌익 동지들을 살해한 에미나이들과 친일 앞잡이들이라도 색출하시라요!"

조선인민공화국의 남조선 합방을 위한 그 첫 과제로 민주성향이 짙고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라는 것이 김 일성의 교지요, 최 창옥은 그 교지를 성실히 이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전은 최 창옥이 여러 차례의 독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속내를 쉽사리 드러내지를 않았으며 고작해야 보도연맹원들을 죽인 장본인들을 색출하는 것에 고개를 까닥거릴 따름이었다.

이날 저녁나절 퇴근길이다. 최창옥과 인민군 두 사람은 무안 읍내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소로 향하고 대전과 나 정율을 비롯한 몇몇 공산당원들은 대전의 뒤를 따라 주막으로 향했다.

역 앞 주막은 장날이나 되면 모를까 평소에는 늘 한산하고 고작해야 역전에서 짐을 나르는 짐꾼(아까부라고 불림.)들이 일과를 마치고 막걸리 한 잔에 고단함을 달래는 정도였으나 이즈음은 세상이 혼란스러운 까닭에 화물마저도 뜨막하여 짐꾼들 또한 없어서 주막 안은 조용했고 방문 앞 작은 마루에 걸터앉아 졸고 있던 주모가 주막을 들어서는 대전 일행에게 부스스한 얼굴로 호호호 웃으며 아는 체를 한다.

"아짐! 어째 한가허신개빈디 여그 막걸리 한 되 줘 보이쑈! 안주는 솔전 붙인 거 있으먼 몇 장 썰어 주시고라우!"

이윽고 술과 안주가 차려지고 대전은 주전자의 술을 딸아 좌중에 한 바퀴 돌린 후 말을 꺼낸다.

"자~아! 한 잔씩 듦서 내 말 좀 들어들 보소! 아까침에 최 내무서장은 악질 반동분자들허고 지주들을 색출해서 처단해사 쓴닥 허는디 우덜이 공산당원을 헌답시고 그 내무서장 말 그대로 헌다 치먼 공산당에 대한 면민들의 인심이 채 좋을 수가 없네. 그러니 차라리 공산당을 안 허고 말제…."

이렇게 말하며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장했던 까닭인지 안주들을 먹어대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 와중에 나 정률이 한마디를 꺼낸다.

"성님 말씀이 옳기는 헌디 그 최 내무서장, 이 사람 몇 차례 겪어 본께 보통 고집이 아니던디라우."

그러나 대전은 단호했다.

"지까짓 것, 고집이 시먼 얼마나 시겄는가? 여러분! 내 말 듣고 절대로 반동분자니 뭐이니 색출허라는 디는 우리가 서두르먼 안 되네! 지까짓 것들이 우덜한테 총부리를 들어대든 안 헐 테제."

술자리를 마치기 전, 대전은 다시 한번 당원들에게 당부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 대전의 이러한 속내를 알게 된 최 창옥은 대전을 몇 차례에 걸쳐 회유하려 하였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자 나 정율을 불러 대전의 위원장직을 박탈하자는 뜻을 밝히자 나 정율은 펄쩍 뛰며

"일로에서는 대전 위원장님만큼 실력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이 없고 마땅헌 적임자가 없단 말이제라우."

이렇게 말하자 최 창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나 정율에게 없었던 것으로 하자며 입단속을 시켰던 것이었다. 이즈음 이웃 면인 청계면이나 몽탄면 쪽에서는 반동분자를 색출하고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총살까지 한다는 소문이 낭자하여 민심은 뒤숭숭하기 그지없었다.

전답을 많이 가진 지주들을 잡아들여 재산을 모으게 된 경위를 캐묻고 조금이라도 불순함이 밝혀지면 처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전답을 몰수하기라도 하였으며 왜정시대에 친일을 한 사람들이나 종교계의 인사들도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었다.

한편, 북한의 인민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인민 1, 2군을 총동원, 8월의 대공세를 퍼붓고 있었으며 이에 부산의 절대적 사수를 위해 국군과 미군은 동해안의 영월을 시작으로 낙동강을 거쳐 마산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니 이른바 낙동강 전선이다.

8월 초순에 시작된 낙동강 전투는 9월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며 전투에 참여한 인민군은 서울 등지에서 강제 징집한 의용군을 포함하여 약 10여만 명에 이르고 한미연합군 역시 그 정도였다.

그동안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삼팔선을 넘어온 인민군들은 손쉽게 서울을 함락하고 한강 전선을 넘어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어붙일 수 있었으나 낙동강 전선만큼은 달랐다.

낙동강까지 줄곧 쫓기다시피 하던 국군과 미군은 부산 임시정부를 눈앞에 두고 돌연 낙동강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며 인민군들은 장거리 원정 전투로 피로가 겹쳐 악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연합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있었으니 이 작전의 코드명을 '크로마이트'라고 했다.

인민군의 허리를 잘라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며 이 작전을 구상하며 어느 곳으로 상륙할 것인지를 두고 작전에 참여하는 참모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1945년 대한민국 해방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군들의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항으로 이미 상륙을 경험했던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 극동군 해군 사령관인 찰스터너 조이를 비롯한 다수의 참모들은 인천항의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을 지적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밀물 시간대인 여섯 시간 안에 상륙을 다 마쳐야 한다는 것과 해안의 석축 방파제가 방어군에게 유리한 반면 상륙군에게 불리하다는 점, 썰물에 좌초된 상륙선은 위기의 상황에도 다음 밀물 시간까지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이 적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점 등이 상륙 항으로 결점이라며 평택항이나 군산항을 운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끝내 인천 상륙을 주장했으며 상륙의 어려운 점에 비추어 상륙만 마치게 되면 전체적 전황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더글러스 맥아더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천상륙작전은 진행되었다.

한편, 전쟁 초기 김일성은 모택동으로부터 전쟁 도중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가능성을 조언으로 들은 바가 있었고 김일성도 그러한 가능성에 수긍하였다.

그러나 부산 함락을 눈앞에 둔 이 시기는 오직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낙동강 전투에 전념해야 할 뿐, 연합군들의 상륙작전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미국방부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자 맥아더의 지휘 아래 작전은 은밀하게 진행이 되었다. 인천 상륙에 앞서 미 해군 첩보 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와 그 휘하인 해군 공작조가 인천 시내에 잠입 장비의 배치도, 배치된 병력, 고지 등의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으며 도중에 인민군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직면하였고 대원들의 퇴각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끝까지 교전, 대원들은 무사히 퇴각하였고 두 사람은 적들의 고문에 못 이겨 기밀 누설할 것을 염려, 자결을 했던 것이다.

한편, 낙동강 전선의 총사령관이며 미제 8군 사령관인 헤리스 월튼 워커 중장은 9월 13일 기자회견에서 '10월 중순 경, 연합군은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고 발표, 이것을 보도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보도를 접한 인민군 수뇌부에서는 그 안에 부산 점령을 마치겠다는 작전으로 후방의 병력을 모두 낙동강 전선에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니 인민군으로서는 연합군의 기만술에 속아 넘어간 크나큰 과오였던 것이다.

9월 13일 연합군의 폭격기는 군산, 삼척, 마량도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는 기만전술로 적을 교란시키고 혼선에 빠지게 하였으며 이와는 별개로 상륙작전의 본진은 본진대로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연합군은 인천 상륙에 앞서 월미도를 장악, 해안포와 동굴 진지 등을 제압하고 인천항과 시가지에서 날아올 포사격에 대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상륙작전에 가장 핵심이며 어려운 인천항의 상륙은 미 해병 5 연대와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주축이 되었으며 상륙 바로 전, 월미도에 이미 상륙한 미 해병대의 박격포 사격 그리고 함정의 함포 공격을 받은 방파제 너머 인민군의 진지는 대부분 초토화되고 저항은 미약하였다.

이윽고 낮 2시 30분 미 해병 5연대 1대대와 2대대는 해안을 돌파하여 사다리로 방파제를 넘어 시가지로 진입하였으며 곳곳의 벙커에 매복하고 있던 인민군들과 교전을 하였다.

일부 인민군들은 전의를 잃고 투항을 해오고 일부는 끝내 벙커에 남아 소총으로 끝까지 저항하니 이들에 대해 미 해병대는 불도저를 이용하여 벙커를 짓누른 후 아예 땅에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전술을 구가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인천 시내의 인민군 소탕 작전을 말쑥이 마친 미 해병은 서울탈환을 위해 경인가도를 출발하였던 것이며 대한해병도 그 뒤를 이었던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게 끝이 났으며 6‧25 발발 이후 이전과는 달리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전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상륙작전이 되었던 것이었다.

중공의 모택동은 6·25 동란에 참전한 연합군에 대해 기존에 있던 38선을 넘어서 공격을 할 경우 중공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란 경고를 했다.

38선을 월경하는 자체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게 이유이다. 이즈음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연합군의 지원으로 국군은 수적 우위에 있기는 하였지만 뚜렷하게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남북의 대치국면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9월 20일 낙동강 전선에 연합군의 인천 상륙 상황이 전해지고 그 소식에 이어 낙동강의 연합군과 협공을 위해 서울 쪽에서 연합군이 낙동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잇따랐다.

이 소식을 접한 인민군들은 소련과 중공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설왕설래하다 결국 전의를 상실, 퇴각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연합군과 국군이 위아래에서 협공해 오게 되자 갈 길을 잃은 인민군들은 지리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해 9월 23일 저녁나절, 일로의 면사무소 앞, 호남선 철길 아래쪽으로 수십 명의 장정들이 서 있고 그들과 마주하여 여남은 명의 인민군들이 서 있다.

인민군들과 마주한 사람들은 대전과 그의 수하들이었으며 모두가 근심 어린 어두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 중의 한 사람이 말한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기 남아 있으면 양키놈들에게 개죽음을 당할 겁네다. 남조선 에미나이들, 보도 연맹원들 무자비하게 죽인 거 보시라요! 기래서 우리와 같이 퇴각하자우요! 김일성 수령께서도 기꺼이 받아주실 거고…. 기래 우리 후일을 도모하자우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김일성이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던 것이요, 그것을 인민군들이 대전의 일행들에게 말하며 함께 퇴각 동행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대전의 일행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앞에 선 인민군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인민군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저기 저 논바닥에 구덩이를 보시라요! 미제 놈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얼마나 무자비합네까? 저게 논바닥에 떨어져서 그렇지 선량한 우리 인민들이 맞았더라면 어드렇게 됐갔시오? 기러니끼니 우리 함께 가자우요!"

인민군이 지적하는 논바닥의 커다란 웅덩이는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파인 포탄 구덩이였으며 연합군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은폐하고 적들을 교란시키기 위해 마구잡이식 폭격을 했던 흔적이었다.

논바닥의 웅덩이, 벼 이삭이 풍요롭게 익어가는 논의 한복판에 포탄이 떨어져 생긴 커다란 둠벙 같은 구덩이다. 포탄의 폭발로 구덩이에서 튕겨 나온 흙덩이는 방사형으로 퍼져나가 널따란 논의 벼는 대부분 쓰러지고 흙에 덮여 모두 쓸모없이 되어버렸다.

이 처참한 광경은 6‧25 동란으로 우리 한민족이 겪고 있는 쓰라린 상흔과도 같은 것이었다. 약소국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반쪽 분단의 해방이 아니었던들 어찌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을 것이며 미소 양 강대국의 힘겨루기가 없었더라면 어찌 반쪽의 해방을 맞았을 것이요, 애초에 힘 있는 조선이었더라면 감히 왜놈들의 조선 침탈이 없었을 것이니 저 논바닥의 커다란 웅덩이는 약소국, 힘없는 우리 민족의 애환과도 같은 흔적이었던 것이었다.

대전의 일행들은 과연 그 구덩이를 바라보며 밀려드는 공포감으로 침묵할 뿐, 말이 없었고 인민군들은 애원이라도 하듯 대전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탕! 탕! 탕!' 난데없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면사무소 서북 방향의 덕산 앞 논두렁으로 일말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고 100여 보 뒤로 경찰과 군인들이 그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쫓기는 사람들은 인민군과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이요, 쫓는 사람들은 경찰과 국군이었다. 뒤를 쫓는 군경은 다소 거리가 좁혀지면 적을 향해 총질하고 그러면 쫓기는 자들도 뒤돌아서 응사했다.

그들은 쫓고 쫓기며 덕산 쪽으로 삽시간에 사라져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인민군들과 대전 일행은 아연실색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인민군이 보란 듯 말을 한다.

"저것 보시라요! 내레 뭐라 했습네까? 남반부 에미나이들이 동무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까니 자자! 서둘러서 어서 결정들 하시라우! 우리는 무안으로 가 최 창옥 동무와 합세해서 퇴각할 거니까니…."

인민군의 말이 끝나자 나 정율이 결심한 듯 말한다.

​"대전 성님! 그라고 동지들! 어차피 여기 남아도 우리가 살 수는 없을 것인디 평생 후회 없이 우덜 뜻이나 펼쳐보게 저 동무들이랑 함꾼에 갑시다!"

대전은 끄응 앓는 소리를 하며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퇴양난의 곤혹스러운 지경에 놓인 것이다. 일행들은 불안한 모습으로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술렁거린다. 이때 누군가 소리쳤다.

"우덜 다 같이 저 동무들이랑 떠납시다! 여그 남으면 우덜 목숨은 없는 것이나 한 가진께…."

이 말에 모두가 '떠납시다! 떠납시다!' 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하여 모두 인민군과 같이 퇴각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대전만은 의견이 달랐다. 대전은 그 나름의 소견을 얘기했다.

"나는 가지 않을라네. 내가 공산주의를 지향허는 것과 우리 민족의 통일 조국을 바라는 것은 자네들과 똑같은디 우리 동족끼리 서로 나와 틀리닥 해서 헐뜯고 죽이는 것은 싫네. 어떤 방식으로 누가 통일허든지 통일은 해사 쓰고 기왕이면 공산주의로 통일허면 좋다고 생각허네. 그런디 남과 북이 갈려서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은 싫고 그래서 나는 이짝이나 저짝 편을 들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잡은께 자네들은 갈 테면 가시게나!"

이렇게 하여 대전은 무리들과 갈라서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해거름이 되어 대전이 자신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동네 사람들과 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대전의 어머니가 아연실색하며 버선발로 대전에게 다가왔다.

"점돌 애비야! 어서 오니라! 아까침에 순사들이 와서 너를 찾는디 뭔 일이다냐?"

인길댁의 이 말에 대전은 ‘아뿔사!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전신에 힘이 빠지는 듯 우두커니 서버렸다. 마루에 걸터앉아있던 길수와 만복도 대전에게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듯 말한다.

"성님! 이놈들이 성님을 잡으로 온 것 같으요. 그렁께 잠시 어디로 피해겠다 오시는 것이 좋겄소."

"맞어라우. 니 놈이나 와습디다."

길수와 만복은 자신들의 일처럼 걱정스러워했고 인길댁은 안절부절 서성거린다. 위기의식을 느낀 대전은 더 지체할 수 없다 생각하고 인길댁에게 나직한 소리로 말한다.

"어무이! 또 어무이 속을 태워드리게 되니 불효 막중헌 놈입니다. 잠시 몸을 피했다가 세상이 조용해지면 돌아올 텐께 저 없는 동안 너머 애닳지 마시고 계시쑈! 그러고 점돌 애미허고 말례는 어디 갔답니까?"

"오냐. 점돌 애미랑은 이참 명일에 쓴다고 나락 비러 갔단다. 그런디 쪼깐 시간이 일킨 허제만 저녁 밥을 묵고 가그라!"

"어무이! 걱정허지 마시쑈! 기냥 갈랍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대전은 방으로 들어가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가방에 넣고 문을 나섰다. 그때 이웃에 사는 신촌댁이 상을 들고 마루로 왔다. 신촌댁은 대전의 작은어머니로서 조카가 빈속으로 떠나는 것이 염려됐던지 날렵한 솜씨로 그사이에 상을 차린 것이다.

"조카! 아무리 바빠도 배 곪고는 안 된께 언능 한 숟갈 들고 가소!"

신촌댁의 이 말에 마루에 앉아있던 다른 여인네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아제! 인자 집을 나서시먼 어디서 저녁밥을 드시겄소. 여그서 언능 한 끼 때와 불어야제."

"그라제. 성님 바쁘시겄제만 한술 뜨고 가이쑈!"

한결같이 대전의 여로를 걱정하는 말에 대전은 하는 수 없이 상머리에 앉아 수젓가락을 드는데 세 살배기 용균이 대전의 무릎으로 파고든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철모르는 아이지만 따뜻한 아버지의 품을 아는 모양이다. 대전은 정녕 자신의 식사보다는 무릎에 앉힌 피같이 어린 아들의 배를 채워주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식구들과의 기약 없는 이별을 눈앞에 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마음을 어찌하랴.

저녁 식사를 마친 대전은 마당에 늘어진 땅거미를 밟으며 집을 나선다. 배웅을 위해 동네 사람들과 인길댁이 신작로까지 따라나서고 대전은 인길댁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어무이! 세상이 조용해지면 돌아올 텐께 꺽정마시고 계시쑈!"

"오냐! 그러먼 어디로 갈라냐?"

"배뫼 누이들 집으로 가 볼랍니다. 거그는 조용헐 테제라우."

대전이 집을 떠나간 그 이튿날, 그리고 그 이튿날도 우익의 좌익소탕 작전은 이어지고 있었으며 총으로 무장을 한 우익들은 수차례에 걸쳐 대전의 집을 들이닥쳤으나 대전은 집에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대전은 전란의 혼란한 시기에 전란의 커다란 회오리에 휩쓸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일로면에 이웃한 청계면이나 몽탄면, 영암군 등지에서는 좌, 우익의 교전이 많았고 수세에 몰린 좌익과 인민군들은 노출이 쉬운 평지보다는 산으로 숨어들어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하는 본진과 합류하려 했던 것이며 이 과정에서 쫓고 쫓기는 무리들의 교전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의 이름 모를 전투에서 산화되어 갔던 것일까, 대전은 가족들의 가슴에 안타까운 기억만을 남겨놓은 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종적을 알고자 여러 방면, 여러 지역을 샅샅이 뒤져도 끝내 알 수 없었으니 6‧25 동란은 비단 영화농장뿐만이 아닌 삼천리 방방곡곡 골짜기마다 피비린내 나는 흔적들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